279. 사(死)는 생(生)의 길 / 요한복음 4:47(궁조)
사람은 죽음의 의미를 알아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얼마나 비참하고 두려운 일일까요. 이 세상에 죽음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떨어진 꽃은 다시 피고 죽은 풀은 다시 푸르러질 수 있지만,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왕, 장군, 문인, 명사, 재자 가인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실 때, 어떤 왕의 신하에게 병으로 죽게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으로는 그를 고치고 살릴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신하는 교만을 버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아들이 죽음 앞에 놓여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비통해했습니다. 죽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 신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위안을 받았고, 아들이 살아났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만약 그 신하가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면, 이런 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에서도,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 갑자기 믿음이 생기고 주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진정 살아있는 날이었습니다. 도적을 만나 도망칠 때는, 전에 넘지 못했던 담벼락도 잘 뛰어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물이 없어 죽게 되었을 때,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삶은 날마다 죽음을 맛보는 가운데서 참된 삶의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병법에서 "함지사귀 이후에 산다"고 한 것이 이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철학은 죽음을 알아야 하고, 죽음의 철학은 삶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모르면 야만적이거나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미래관은 불교나 유교의 미래가 아니라, 거울 속을 바라보듯 살펴보는 것입니다.
빙산을 통해 바라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약동하는 삶의 나라가 보입니다. 빙산만 통과하면 그 곳에 갈 수 있습니다. 평영가수굴은 점점 캄캄하고 무서워지지만, 우리가 통과하는 물은 빙산이므로 앞을 보며 계속 나아갑니다. 비록 나이가 많고 병이 있으며 삶의 취미가 없는 것 같지만, 나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든 주님을 위해 살다가 마지막엔 주님께서 허락하신 나라로 가면 되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 보면 조선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공산당의 압박으로 죽을 지경이며, 전 민족이 죽음 앞에 놓여있습니다. 38경계선에서는 날마다 총소리가 들리고, 인민군이 와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여 살 수 없게 되어 많은 이산가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국 지역도 적화가 되어 상황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이렇게 동양 전체가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과거 50년 전, 조선의 기독교는 독립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려는 사상가들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종교가 정치의 도구가 아님을 깨닫고 물러나면서, 조선에는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나타났습니다. 의인 50명만 있어도 고모라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신 하나님이시니, 과거 실패를 겪은 조선 사람들이 이제 참된 삶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