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비류-성천 沸流(今 成川)
沸流(今 成川)
沸流는 遼史地理志에 正州(今 未詳)는 근본 沸流王의 故地이니 公孫康의 並한 바 되었고 渤海에서는 沸流郡을 두니 沸流水가 有하였다.
三国史에 高句麗 始祖 二年에 沸流国王 松壌이 来降하니 其地로써 多勿都를 삼고 松讓을 封하여 主를 삼으니 麗語에 復旧를 多勿이라 하였다. 輿地勝覧에成川府는 근본 沸流王松讓의 故都라 하였다.
劔據青峯一十二
遊車衣水逝湯々
朱蒙不是真豪傑
欺負酸寒喫茶王
釖掾 푸른 峯이 열둘인데
遊車衣水가 湯々히 逝하도다.
朱蒙은 참 豪傑이 아니라
酸寒한 喫菜王을 欺負하였도다.
釖舒掾青峯은 一名 紇骨山이니 成川府西北二里에 在하여 攢峯이 十二가 有하여 俗에 十二巫峽이라 称하였다.
朴元亨 詩에 江上群峯掾光峯前江水正播藍이라 하였다. 遊車衣水는 沸流江이며 곧 卒本川이니 俗称에 遊車衣津이다. 成川府 西三十歩에 在하였다.
其源이 二가 有하니 一은 陽德県吳江山에 出하고 一은 孟山県大母院洞에 出하여 府의 北에 至하여 合流하고 紇骨山을 歴하니 山에 石穴이 四가 有한데 水가 穴中에 入하여 沸騰하여 出하는 故로 名을 沸流江이라 하였다.
또 慈山郡禹家 淵과 合流하여 大同江에 入하였다. 喫菜王 三国史에 高句麗 東明王이 沸流水에 菜葉이 流下함을 보고 水上에 人이 有함을 알고 獵하다가 찾아가서 沸流国에 至하니
国王松譲이 出見日 寡人(王의謙称)이 멀리 溯隅에 있어 일찍 君子를 보지 못하였는데 今日에 相遇함이 또한 다행하지 않은가 알지 못한다.
吾子가 어디로 좇아왔는가. 朱蒙이 말하니 我는 天帝의 子로 某所에 와서 都하였다. 松譲이 曰 我가 여러 世에 王이 되여 地가 小하여 両主가 용납하기가 足지 못하니 君은 立都한지 오래되지 않았다.
我의 附庸됨이 어떠한고. 朱蒙이 그 말에 忿하여 더불어 射하여 재주를 비교할 때 松譲이 画鹿으로써 百歩内에 두고 능히 그 臍를 다가가지 못하니 朱蒙은 玉指環을 百歩 外에 懸하고 瓦解와 같이 깨트리니 松譲이 크게 놀라 敢히 争치 못하고 도리어 附庸이 되었다.
- 한글
비류(지금의 성천)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정주(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모름)는 본래 비류왕의 고향이며, 공손강이 정복한 곳이 되었다. 또 발해에서는 비류군을 두었는데 벌류수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에 따르면 고구려 시조 2년에 비류국왕 송양이 와서 항복하자 그 땅으로 다물도를 삼고 송양을 봉해 주를 삼았는데, 여기서 다물은 고구려말로 복구를 뜻한다. 《여지승람》에서는 성천부가 본래 비류왕 송양의 고도라고 했다.
푸른 기륭산 봉우리가 열둘인데
유차의수가 굽이쳐 흐르는구나.
주몽은 과연 호걸이 아니라
가난한 겻재왕을 능멸했었지.
기수능청봉은 기륭산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며 성천부 서북 2리에 있다. 울룩불룩한 봉우리가 12개여서 속칭 십이무하라고 한다.
박원형의 시에 "강 위 여러 봉우리 기륭 앞내 물은 푸른빛이 퍼지는데"라고 했다. 유차의수는 비류강이며 곧 졸본천으로, 속칭 유차의진이다. 성천부 서쪽 30보 되는 곳에 있었다.
그 근원이 두 갈래인데, 하나는 양덕현 오강산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맹산현 대모원동에서 나와 부의 북쪽에서 합류한다. 기륭산을 지나는데 산에 돌구멍 네 개가 있어 물이 구멍 안으로 들어가서 끓다가 나오는 탓에 비류강이라 불렸다.
또 자산군 우가연과 합류하여 대동강으로 들어갔다. 겻재왕은 《삼국사》에 고구려 동명왕이 비류수에 겨자잎이 흘러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위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사냥꾼을 보내 벌류국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류국왕 송양이 나와 "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훌륭한 분을 일찍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만나 뵙게 되어 기쁘지 않겠습니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하자,
주몽이 "나는 천제의 아들로 어딘가에 와서 도읍을 정했습니다"라고 했다. 송양이 "나는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었으나 땅이 작아 두 주인을 모시기에 부족합니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부용이 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주몽이 그 말에 노하여 활을 겨누며 재주를 비교했다. 송양이 백보 안에 사슴 그림을 두고 그 배꼽을 맞히지 못하자, 주몽은 백보 밖에 옥지환을 걸고 박살냈다. 송양이 크게 놀라 감히 다투지 못하고 부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