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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껏 끌어안고 면도날로 긋기>의 줄거리:
면도날이라는 말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불편한데, 기껏 끌어안고는 면도날로 긋는다니, 약간 섬뜩합니다. 대체 가리키는 바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회하거나 외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참 복지의 삶이 이 불편함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반드시 정면 돌파해야만 하는 불편한 진실은 바로 모든 사람의 삶에서 너무나 보편적으로 자행 되는 '부지중 살인'입니다.
기껏 끌어안고 면도날로 긋기
(여호수아 20:1~9)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기껏 끌어안고 면도날로 긋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기껏 끌어안고 면도날로 긋기’
작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이틀 동안에 경기도 안산시에서 “꿈 아끼다 똥 된다”라는 페스티벌이 열렸었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을 “7포 세대”라고 하는데 일곱 가지를 포기하고 삽니다. 연애를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하고,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주택구입을 포기하고, 삶의 조건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고, 인생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꿈을 포기합니다. 이러한 7포 세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고무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열린 페스티벌이었습니다. ‘꿈 아끼다 똥 된다’라는 페스티벌이 참 희한합니다.
우리 속담에 “아끼다 똥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낀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왜 꿈꿀 수 있는 힘을 활용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꿈을 포기한 것을 아끼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실 ‘꿈을 아낀다.’는 말은 꿈을 갖고 있고, 갖고 있는 것을 아끼는 것을 말하는데, 이분들이 뜻하는 본래의 뜻은 꿈꾸는 능력을 왜 아끼느냐는 것입니다. 꿈꾸기를 아끼다보면 인생이 똥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특별히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고자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고, 관련분야에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문화예술 현장을 직접 체험하게 해주기 위해서 마련된 페스티벌이었다고 하는데 참 기발합니다. 이 분들의 말을 잘 생각해야 본뜻을 알게 되는 것과 다르게 진짜 그대로 ‘아끼다 똥 된다’라는 속담은 신앙적으로도 의미가 상당히 깊게 확인될 수 있는 진실입니다.
‘아낀다.’는 말을 생각할 때에 제일 먼저 창22:11~12절이 생각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근거해서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껴서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인생이 똥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선민에게 있어서 ‘아낀다.’는 문제는 참으로 큰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분명히 좋아해서 아끼고 사랑해서 아끼고 때로는 애증의 관계에서 마음에 담아두기도 하고 원수를 마음에 담아 끌어안기도 하는데, 이렇게 좋아하든 싫어하든 마음에 담아서 아끼면 반드시 똥 되는 일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3: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합니다. 내 마음 안에 끌어안고 있으면 반드시 면도날로 긋게 되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제 땅 분배에 대한 이야기는 여호수아까지 분배가 되면서 완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곧바로 이어서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세 군데씩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여섯 개의 도피성을 두라고 하십니다. 다 아시는 대로 도피성을 두는 이유는 부지중에 살인한 자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웃을 죽게 하면 죽임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너무나 황당한 마음에 보복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보복으로부터 의도 없었던 살인자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피성을 여섯 곳을 만들고, 그 간격을 적당하게 유지하는데 어디에서 일이 벌어지더라도 가능한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이고, 잘 보이는 언덕에 길도 잘 닦아 놓으라고 하시는데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의도 없었던 살인자의 목숨을 보전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도피성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죄를 지은 우리들이 피신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하는데,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좀 더 깊이 본문을 들여다봅니다. 먼저 살인이 무엇이냐 부터 짚고 들어가야 합니다.
살인이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성경이 살인을 금하고 있습니까?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범죄행위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가 악하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살인이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의 의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더 이상 그 자리에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섭리하시려는 뜻이 없으실 때에 죽음이 나타나게 됩니다. 모세, 요셉, 야곱, 이삭과 아브라함도 죽었습니다. 이 ‘죽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더 이상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 생애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식물인간이 된 사람일지라도 그와 연관되어 일어나는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서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하고 싶어 하시는 일과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에 살려두십니다. 그런데 ‘죽음이 임했다’는 것은 그런 뜻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살인이 무서운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향하여 뜻을 내보내고 계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들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하시며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으시거나, 선민에게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시며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직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를 죽이는 것은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거나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을 훼손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창조주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뜻이 내려오는 것을, 마치 면도날로 가녀린 실핏줄을 끊어내는 것처럼 끊어냈다는데 그 죄질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뜻을 가지고 계시는데 죽인 것입니다.
극단적인 비유일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마10: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라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실제 뱀은 생물학적으로 지혜가 없지만 사탄을 상징하는 비유로 쓸 수 있습니다.
이북에서 2인자, 3인자들이 계속 숙청당하는데 김정은 정권 3년 동안 숙청당한 자가 70~8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에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숙청하는 이유가 김정은이 배석한 회의석상에서 잠깐 존다든지, 등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뻗는다든지, 다리를 꼰다든지, 말대꾸를 한다든지 하는 이유로 숙청의 대상이 됩니다. 무슨 일에 대해서 조금 ‘참고하라’는 식의 말대꾸라도 하게 되면 총살을 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비행기를 쏘는 기관포로 사람을 쏴 죽인다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졸면서 ‘주권자의 뜻을 끊었다’는 것인데 무서운 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살인은 하나님의 뜻을 끊는 모든 행위입니다.
만약에 도피성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부지중 살인도 요즘 말로 과실치사에 국한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부지중 살인’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는 그 사람을 향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을 부지중 끊는 것입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의도가 끊어진 상태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끊어지게 만드는 것이 살인입니다. 비록 사람의 목숨(육체)을 죽인 것이 아닐지라도 그 이웃을 향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을 끊어버리는 모든 행위가 부지중 살인으로 상징되는 행위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늘 만족과 기쁨이 넘치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 땅을 분배해 주시고 난 뒤에 바로 이어서 도피성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부지중 살인이 과실치사에 국한되는 문제라면 일평생 살면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삶의 국면이 얼마나 다양한데 이 문제가 땅 분배 이후에 곧바로 따라오는 이유는, 부지중 살인이 복지를 훼방하는 요소 중에 가장 빈번히 일어날 수 있고, 가장 보편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부지중 살인이 어떤 것입니까? 나 말고는 다 이웃이 됩니다. 남편도 이웃이고 아내도 이웃이고 자식도 이웃이고 주변의 사람도 이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부지중 살인이 상징하는 바대로 하나님의 뜻을 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이 과정을 분해해서 단계별로 이야기해봅니다.
내가 가족을 보고 마음에 담습니다. 아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담게 되면 반드시 판단이 나오고 생각이 나오고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되는데 이게 바로 면도날이 됩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를 끊어버리는 면도날인데 이것이 부지중 살인입니다.
나는 미워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사랑합니다. 사랑해서 마음에 담았고 기껏 담은 것을 면도칼로 그어버리는데 그 마음에 담은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에 대해서나 집 밖의 이웃에 대해서나 원수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원수를 마음에 미워하고 증오하느라고 잊지 못해서 끌어안습니다. 그러면 그 원수에 대해서 반드시 판단이 생기게 되고 생각이 생기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과 말씀을 다 끊어버리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끊어지는 죽음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이 더 이상 당신의 뜻을 내려 보내실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는 살아있지만 내가 하나님의 뜻을 끊는다면 살인인 것이고 내가 죽음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도피성의 제도를 보면 부지중 살인을 한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기간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인데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결고리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상징으로 도피성 제도를 통해 우리에게 상징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그 의미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은 다음에야 삶의 현장으로 복귀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과 뜻을 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마음으로 그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이것부터 벌써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것인데, 이 잘못된 관계를 대제사장이 끌어안고 죽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갖는 의미는 훼손된 관계를 뜻합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아이가 한국에서 공부를 잘 못해서 조기 유학을 갑니다. 형편도 어렵고 부부가 헤어져있기도 힘든데 결심을 하고 어린 아이를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아이가 거기서도 공부를 잘 못합니다. 그쪽의 문화를 배워서 중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대학 진학이 힘들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한국의 입시환경에 견뎌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합니다. 그 아이를 담는 바람에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연결고리인데 그 연결고리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냐면 그 대제사장이 죽으면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대제사장이 상징하는 바가 왜곡된 관계를 풀어주는 것이므로, 지금 잘못한 것이 있다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내가 그동안 아껴서 마음에 끌어안고 내 판단과 생각과 의지의 면도날로,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판단과 생각을 끊어냈는데, 이 잘못된 상황 전체를 십자가에서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끌어안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끊어낸 그 죄악을 끌어안고 주님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이제까지 내가 아껴서 끌어안고 있던 모든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면도날로 끊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내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죽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세요. 아끼다 똥 됩니다. 아끼느라 마음에 끌어안으면 반드시 내 생각이 나타나게 되고 내 판단이 나타나게 됩니다. 미워하고 싫어해서 끌어안아도 내 생각과 판단은 나오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지금 면도날로 끊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계획과 내 뜻은 하나님 것에 대한 면도날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것을 넘어서 나 이외의 이웃의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 대해서 내 마음이 강하게 끌어안든지 약하게 끌어안든지 내 생각으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서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끊어버리는데 이것이 바로 부지중 살인입니다.
이 부지중 살인을 피하고 나면 나를 향해서, 내가 마음 밖으로 내보낸 존재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뜻이 임하며 복지가 됩니다. 그 사람들이 설사 불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 대한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임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로 가능해집니다. 어쨌든 내 마음 안으로 무엇인가가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범위를 넓혀서 사람뿐만이 아니라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업을 아껴서 마음에 품으면 내 생각이 나타나는데, 그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면도날로 끊겨버립니다. 하나님 뜻 안에 있는 사업을 내가 죽이는 것이지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내 마음 안에 들어오려는 세상의 것들을 다 차단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차단시키면 내 마음 안에 생기는 빈 곳에 하나님(성령님)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 자식, 가정, 사업, 이웃들이 아끼는 바람에 똥 된 경우가 분명히 있으실 것입니다. 아껴서 똥 되는 이유는 마음으로 끌어안으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내 뜻이 면도날이 되어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 십자가 붙잡고 아까워서 아니면 미워서 마음에 담게 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