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영 규
1996년『조선일보』신춘문예
시집『설산 아래에 서서』
화이트아웃*
신설新雪에 묻히며 얼어버린 고정자일을
파내고 뜯어내며
어렵게 어렵게 다시 올라온 공격캠프
가슴 떨리는 급경사의 협곡을 만든
능선자락을 덮으며 넘어오는
굵게 묶은 북유럽 여인의 은회색 머리카락처럼
두려운 유혹마저 느껴지는
저 무거운 구름더미들
넓이조차 어림잡기 어려웠던
우루고스계곡**까지 메워지고 덮혀버리자
공격캠프는 깊이를 모를 구름바다에 잠기고 말았다
회색이 섞인 무거운 구름 속의 화이트아웃
텐트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던 대원들
지퍼를 내리고 밖을 살피려는 순간
목을 잡아 조이듯
텐트 안까지 껄쭉히 메워버리며
대원들의 등반 의지까지 지워버리는
대원들은
복부腹部 저 아래로부터 명치를 찌르고
목젖 아래까지 찔러대는
좌절감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아~ 산山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 화이트아웃: 가스나 강설 등으로 공간과 경계의 판별이 어렵게 되어 환상 방황을 하게 되는 행동장애를 일으키는 상황. 시야상실視野喪失 또는 백시伯視라고도 한다.
** 우루고스계곡: 북인도히말라야 멘토사(6,440m)봉의 우르고스 패스에 있는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