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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당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
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노락당 못지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종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 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입구의 담벼락에 붙은 안내플래카드. 매주말 예술마당 행사가 열린다.
오른쪽 벽에는 게시판이 있어서 그때그때 열리는 행사를 알수 있다.
대문. 예전에는 후문이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ㆍ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 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자신이 그 곳에서 살던 때를
생각하여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명,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기념
축하하였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 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종로에 있는 옛건물들은 사연이 없는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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