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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출애굽기 20장 16절
하나님께서 명하신 도덕법 ⑫ : 9계명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소유에 대한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소유가 있다는 것이고, 때문에 그것을 불의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자신의 소유를 위해서 합법적으로 얻고 증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마음에는 물질 혹은 소유에 대한 탐심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든 사고들을 버려야 할 것도 가르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과 무엇을 비교하여 말씀하시느냐? 재물을 비교하여 말씀하시는데(마6:24), 그만큼 이 세상에서 물질이 차지하는 정도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비교하실 때 다른 것에 대한 대표가 물질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람의 마음에는 물질이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물질 혹은 소유에 대한 탐심을 버리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역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대하여 자족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소유를 주실 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시는 것은 아닌데, 어떤 경우에라도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되, 성경은 더 많이 받은 자가 덜 받은 자를 돌아보도록 가르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주시는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자들을 채우기 위해서, 그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주신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돕는 것이 자랑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마6:3). 할 수만 있다면 모르게, 그러나 알려지더라도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주의 뜻을 따라 내놓을 뿐이라는 마음으로, 결코 교만하거나 거만한 자세가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필 내용은 십계명 가운데 아홉 번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명예와 관련된 것인데, 간단히 말하면 이웃에 대하여 증거를 할 때 거짓으로 그 명예를 깎아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거짓 증거는 그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대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선한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인데, 많은 부분은 거짓을 증거 할 때 이웃에게 여러 가지 피해를 주고자 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거짓을 증거 하는 일에 대하여 금하십니다. 오히려 이웃에 대하여 참되게 증거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말과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실에 있어서 진실만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9계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우선 77문입니다. “제 9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 9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의 유지와 증진을 요구합니다. 특히 증거 할 때에 더욱 요구합니다.” 78문은 금하시는 바에 대한 것인데, “제 9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 9계명은 진실(진리)에 해가 되거나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금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경우는 한 문항으로만 9계명을 설명하는데, 112문입니다. “제 9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내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의 말도 왜곡시키지 않으며, 헐뜯거나 모략하지 않으며,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데에 참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마귀의 일로 알아 피함으로써 하나님의 무거운 진노가 내게 임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또한 법적인 송사에서와 다른 모든 일들에서도 진실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진술하고 고백하며, 또한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증진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선 신명기 17장 6절과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이스라엘 국가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재판법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는 사형을 명하시는 일들이 있었는데, 이것의 목적은 7절 마지막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을 제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공의가 시행이 되어 이스라엘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죽일 것을 명하셨는데, 그때 누가 먼저 손을 대도록 하셨느냐 하면 증언한 사람이 먼저 손을 대고 난 뒤 나머지 백성들이 손을 대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하라고 명하셨는가?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 보자면 증언하는 자가 거짓 증언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증언하는 자가 두려운 마음으로 사실만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펴본 여섯 번째 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 속에서 우리는 악한 말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분노와 같은 악한 마음이 밖으로 표출될 때 언어라는 것을 통해 표출되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악한 말, 즉 언어의 폭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6계명은 이것도 살인이라고 말하는데, 언어의 폭력만이 살인이 아니라 거짓 증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언어의 폭력은 아닐지라도 거짓된 말로써 얼마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우리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거짓이 너무나도 만연하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거짓광고 혹은 과대광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날만 그런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고의든 아니든 항상 거짓이 있어왔습니다. 왜냐하면 거짓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보십시오. 분명 자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탓을 합니까? 아내인 하와 탓을 합니다.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사실 안에 거짓을 고했던 것입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뱀이 꾀어서 먹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먹었는가? 자신은 먹고자 하지 않았으나 뱀이 꾀어서 어쩔 수 없이 먹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와는 그 스스로가 먹었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거짓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굳이 아담과 하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런 사실은 우리 자신에게서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누군가 나의 잘못을 말할 때 우리는 분명 잘못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거짓을 동원합니다.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감하고자 이런 저런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그만큼 거짓은 우리 삶에 있어서 익숙한 것입니다. 심지어 4월 1일 만우절이라고 해서 작은 거짓말정도는 괜찮은 것처럼, 오히려 그런 거짓말을 즐기는 날로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그만큼 거짓이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거짓과 관련해 거짓의 아비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누군가? 마귀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왜 우리가 거짓을 좋아하는가? 거짓에 익숙한가? 특히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거짓이 나올 수 있는가? 우리가 거짓의 아비인 마귀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존재인가? 한 마디로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그가 거짓말쟁이가 되었는가?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마귀도 천사로 지음 받았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는 그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때 처음은 타락하고 난 뒤를 의미합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어떤 존재였는가? 여느 천사들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 있었는데(유1:6), 그들이 마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위를 버리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 요한복음에서는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말하는데, 거짓말 하는 이유가 진리와 상관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진리와 거짓은 반대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진리 안에 있으면 거짓은 설 수 없습니다.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진리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원리적으로는 거짓이 우리 안에 있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에게 거짓은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그럼 거짓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진리 안에 있는데 거짓에 익숙한 자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마귀 아래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진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9계명을 명하시는가? 이전에는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따라서는 안 되기 때문에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거짓은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으로도 사용됩니다. 앞서 신명기 17장의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거짓을 말함으로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을 수 있습니다. 혹은 생명까지는 아니라할지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제 9계명이 명예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때 거짓은 얼마든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습니다. 그만큼 거짓은 악한 것입니다.
이런 거짓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거짓을 말하는 그 자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짓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반대되게 말하는 것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함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명예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좀 더 교묘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진실보다 부족하게 말하는 것도 거짓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족하게 말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진실 전체를 말하도록 요구받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 전체를 요구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실을 말한다고 하면서 사실 전체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목적이 상대방에게 해를 줄 목적으로 있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침묵하는 것을 통해서도 상대방에게 악한 평판을 돌릴 수 있습니다. 잠언 31장 8절과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즉 입을 열어야 할 때 열지 아니함으로 참된 사실을 말하지 않을 때 이웃에게는 악한 평판이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 역시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 외에도 우리는 사람이 그 이웃에 대하여 근거 없는 의심을 할 때, 그리고 사람이 선한 근거 없이 이웃을 비난할 때 거짓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근거 없이 의심한다든가 혹은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다 거짓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물론 이웃의 악행에 대한 적절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악행을 행한 이웃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이 실제로 드러날 때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들이 그런 악행에서 벗어나도록 권하고 주께서 명하시는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책망 혹은 위로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책망을 할 때 저들이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 없이 의심하다든가, 아무런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참된 것을 말하지만 그 의도가 이웃을 해하려는 목적으로 참된 것을 말하는 일들이 있는데, 이것 역시 거짓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때로는 어떤 말을 들으면서 그 의미를 곡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험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으면서도 얼마든지 거짓에 동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거짓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거짓 자체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참된 것만을 말해야 하는데, 에베소서 4장은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4:25) 거짓을 버리라는 것은 앞서 말한 모든 거짓과 관련된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흰 색을 검은 색이라고 말하는 그런 정도의 거짓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속임수, 온갖 종류의 교활함 등을 다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세상은 거짓투성이입니다. 죄로 물든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고, 정직 혹은 진실보다는 거짓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스스로 속을 정도로 거짓되며, 때로는 알아도 침묵합니다. 그만큼 이웃의 진실과 명예에 무관심합니다. 그런 거짓됨과 이기심은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지속되어 영적 이기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아니면 사랑과 화평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와 무관한 일들을 진행시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고 말하는 로마서의 말씀(롬1:21)과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총회 공과 참조)
때문에 주님께서는 교회와 성도를 향하여 거짓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여서 그 사람의 명예를 깎아 내리는 행위는 다른 자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깎아 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쉬운 예로 남편과 아내를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7계명을 통해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속여서 아내를 깎아내린다면,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속여서 남편을 깎아내린다면 그들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만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명예도 깎아내리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도 그러해야 합니다. 비록 저들이 우리의 지체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고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선한 본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거짓이 아니라 정직과 진실을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정직과 진실은 다른 사람들을 세운다는 측면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비록 세상은 거짓투성이일지라도 성도는 그런 거짓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과 관련된 말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 됩니다. 험담하거나 수군거리거나 농담 섞인 조롱과 같은 말에 대해서 멀리해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칭찬하는 것, 격려하는 것, 때로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기보다는 권면하고 타이르며 책망함으로 그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 성도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해야 될 모습입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말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말의 실수가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야고보서는 혀에 대해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고 표현할 정도입니다(약3:8). 단지 불신자만이 아니라 신자임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고 말합니다(약3:9).
그러나 이것이 신자의 합당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 모습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좋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말을 기뻐하시는데,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는 말은 칼빈에 의하면 믿음을 일으켜 주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말함으로 믿음을 일으켜 줄 수 있는 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말이란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칼빈은 그의 골로새서 주석에서 은혜를 드러내는 말이란 “공허한 수다, 조롱, 그리고 모든 종류의 농담과 반대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실만을 말하고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정직해서는 결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일이 허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것이 복된 삶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하면 외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난처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율법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다 거짓을 향하여 간다할지라도 우리는 진리만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를 싫어하는데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럼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교회들 가운데는 복음을 왜곡하는 곳도 있습니다.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데 참된 것을 말하면서도 거짓을 말하는 교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적지 않은 교회가 복음을 왜곡한다고 해서 여러분도 왜곡된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 진리가 아닌 것을 거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볼 때 어려움과 난처함과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요, 진실이요, 정직에 문제라면 그것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복음과 진리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말씀드리지만 거짓 가운데 가장 심각한 거짓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것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경우 공적인 거짓말과 관련해 재판장의 잘못된 판단을 말함과 동시에 사역자들에 대한 내용도 열거하는데, 바로 사역자들이 기초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거나 교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이 공적인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진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합니다. 당연히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역자가 아닌 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올바른 교리를 가르칠 때 가르침에 대한 공적인 거부가 있다면 그것 역시 공적인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여러 차례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시대에 따라, 대상에 따라, 연령에 따라, 형편에 따라 말씀을 퍼즐 맞추듯이 하는 것은 거짓 위에 거짓입니다.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힐 것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모든 것은 다 폐하게 될 것입니다(마15:13, 겔6:6).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자체를 말하거나 성경을 인용하여 말하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미신입니다. 사단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조차 말씀으로 시험했습니다(마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에 대하여 ‘또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서 답하셨습니다(마4:7).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석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정직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총회 공과 참조).
거짓과 관련해 우리가 살펴볼 내용 가운데 한 가지는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선한 거짓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20장의 말씀을 보고 있지만 출애굽기 1장에 보면 히브리 산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들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 2장에 보면 두 정탐꾼을 살린 라합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것 역시 선한 거짓말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핵심은 거짓을 말하지만 선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두 사건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말씀드리면, 출애굽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애굽 왕 바로는 그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히브리 산파에게 태어나는 아이 중 남자는 다 죽일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 히브리 산파는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리는데, 애굽 왕이 그들을 불러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합니다. 실제로는 해산을 도왔지만 아이를 살리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말하더란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점령을 위해서 두 정탐꾼을 보내는데, 그 소식이 여리고 왕에게 들어가 수색을 하게 됩니다.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였는데, 그들을 찾으러 온 군사들 앞에서 기생 라합은 이미 떠난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들이 내게로 왔지만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였고 지금은 떠나고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이미 두 정탐꾼을 숨긴 상태였지만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에 대해 선한 의도를 가진 것이기에 괜찮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4월 1일 만우절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 의도가 선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괜찮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것 역시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우선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장 히브리 산파에 대한 내용인데, “나는 하나님의 본질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여인들이 거짓말했다는 점과, 거짓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므로 그들은 죄를 범했다는 점은 모두 인정되어야 한다.” 물론 그들의 죄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으로 인해 칭찬받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답하셨다는 점에는 사실상 어떤 반박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아버지로 돌보실 때, 그들의 선한 행위가 더러운 것들로 어느 정도 오염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정결한 것처럼, 그 선한 행위를 여전히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조금도 흠이 없이 완전한 행동은 없다.”
계속해서 여호수아 2장 라합에 대한 내용입니다. “허위진술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이 비록 좋은 뜻에서 나온 거짓말이라 해도 거기에 잘못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소위 말하는 직무상의 거짓말을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진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는 점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의도가 형제들을 돕고, 그들의 안전을 도모하며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거짓말이 합법적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 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다... 전반적으로 정탐꾼들이 구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는 거짓 진술을 통해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행동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칼빈만이 아니라 우르시누스 역시 동일하게 말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9계명에 대한 해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을 숨기고 덮은 모든 거짓말은 물론 예의로 하는 거짓말이나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선의로 하는 거짓말도 여기서 정죄하는 것이다... 애굽의 산파들이 왕에게 거짓말을 했으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선의의 거짓말을 변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해를 주는 법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거짓말이 누구에게 유익이 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의도를 가진 거짓말, 선한 목적을 위한 거짓말에 대하여 괜찮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혹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출애굽기 1장이나 여호수아 2장의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따라서는 대부분 그런 상황 속에서 거짓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심정으로 애굽 왕의 말을 따를 수 없다, 정탐꾼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우리의 본성은 자기 방어 기질을 발휘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때 우리는 선의 의도, 선한 목적을 가지고 거짓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모든 선한 행실 가운데는 점과 흠이 있습니다. 없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점과 흠이 있는 선한 행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점과 흠이 없는 것으로 여겨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점과 흠이 있지만, 그리고 죄가 결부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 때문에 죄에 대해서, 점과 흠이 대하여 괜찮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을 동원하여 자기 백성을 지키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정직함 가운데, 진리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죽으면 죽는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란 사람이 소유를 팔아 그 값의 얼마를 감추면서도 마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처럼 하는 일이 있는데, 이때 사도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4) 우리의 거짓말도 마찬가지라 생각이 됩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하는 것으로 있지만 사실 하나님조차 속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숨은 마음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거짓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저희 교단 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9계명과 관련해 실린 내용을 읽어드리면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하십니다(창4:7).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을 행치 아니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행치 아니하는 것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롬14:23). 즉, 죄를 직접적으로 범할 때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치 않거나 믿음으로 행치 않는 것이 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은 것은 선을 행치 않은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행한 것만이 하나님께 선행으로 인정받습니다. 이것이 불신자가 외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선행을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선행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아는 지식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자의 선행의 출발점입니다. 마치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기초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진실을 보존하며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정직은 믿음으로 행한 것이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지식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은 가장 사악한 거짓이며, 성경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정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