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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어린 시절 체험
유병길
할아버지 어린 시절에는 먹을거리가 부족하여 힘들게 살아 오셨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꽁보리밥, 시래기죽, 감자, 고구마 등 무엇이든 배불리만 먹을 수 있다면 행복했답니다. 민족의 대명절인 설날이 지나면 양식이 떨어져서 부잣집에서 장내 쌀을 빌리는 농가가 많았답니다.
“할아버지 어린 시절에는 어떤 음식을 먹었어요? 지금도 그때의 음식을 먹을 수가 있을까요?”
“음, 지금 사람들은 먹지 않는 음식이지만 찾으면 그때의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가 있을 거야.”
“할아버지의 시간을 돌려서 할아버지 어릴 때의 음식 체험하고 싶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할아버지 어린 시절의 음식체험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든 1945년에 태어 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동안 그때 먹었던 먹을거리를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 먹는 체험을 하려고 월별 계획을 세워서 벽에 붙여놓고 체험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1~2월에는 콩나물밥, 무밥 먹어보기. 칡뿌리 먹기.
양식을 늘리려고 집집마다 안방 아래 목에는 짚으로 엮어 만든 큰 콩나물시루에서 콩나물을 계속 키우며 밥솥에 콩나물을 넣어 밥을 짓고, 무구덩이에 무, 배추뿌리를 보관하면서 매일 무를 썰어 넣고 밥을 지어 양념간장을 넣고 비벼서 맛있게 먹었답니다. 아이들은 고구마 배추뿌리를 깎아 먹었답니다.
첫 실천으로 작년 심은 토종배추(의성씨도리)뿌리를 무와 같이 구덩이에 묻어 두었는데, 1월 중순에 아궁이를 열고 배추뿌리를 꺼내어 깎아 먹었고, 무와 배추뿌리를 채썰기로 쌀과 같이 밥솥에 넣어 밥을 지었습니다. 밥 위에 양념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서 별미로 먹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옛날 맛보다는 못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맛이 있었습니다.
칡뿌리를 캐려고 뒷산에 가서 괭이와 삽으로 캐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굵은 뿌리를 씻고 톱으로 잘라서 껍질을 벗기고 칼로 찢었습니다. 하얀 좁쌀 같은 덩어리가 붙어있는 것을 입에 넣고 씹으니 칡 특유의 단물이 나와서 삼켰습니다. 할아버지 어릴 때는 산에서 케어 씻지도 않은 검은 칡뿌리 토막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이빨로 찢어 씹으며 단물을 삼켰다고 그때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유원지나 시장에 가면 칡뿌리 즙을 내어 팔고 있으나, 뿌리를 씹어 먹어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3~4월에는 버금다지(마디나물), 참꽃, 쑥버무리 먹기
3월 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논에 나가서 버금다지(마디나물)을 뜯어 와서 깨끗하게 씻어서 무를 채 썰어 넣고 저러기를 만들어 밥을 비벼먹어 보고, 버금다지(마디나물)를 한 줌 쥐고 밥 한 숟갈 떠서 쌈장을 넣고 쌈을 싸서 먹으며 보릿고개를 넘겼다던 그때 맛도 보았습니다.
봄에 땅이 풀리면 여자들은 봄나물을 캐러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겨우내 먹던 지겨운 무시래기 팥잎국에 냉이를 넣고 끓이면 향기가 좋은 별미였답니다.
동네 초상집이나 잔치 집에 일을 하러 간 어머니들은 전 한 쪽이라도 먹을 게 생기면 자신은 먹지 않고, 광목 치마폭에 숨겨 얼른 집에 아이들을 갖다 주었답니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하굣길에 참꽃을 따서먹었다던 방구머리 바위로 올라가서 할아버지의 옛날을 회상하며 참꽃을 한줌 따서 입에 넣어 먹었고, 가지를 꺾어 입으로 꽃잎을 따먹기도 하고, 꽃을 따와서 꽃전을 붙이고 설탕을 넣어 꽃술도 담았습니다.
날씨가 풀리고 마을 앞 논밭 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쑥을 뜯어 쑥국을 끓이고, 체반 위에 보자기를 깔고 밀가루를 묻힌 쑥을 쪄서 쑥버무리를 만들어서 별미로 먹었습니다. 밥 대신 도시락에 쑥버무리를 싸서 학교에 갔으나 부끄러워서 책상에 올려놓지 못하고 무릎 위에 도시락을 놓고 몰래 먹었다던 할아버지의 기억이 살아났답니다.
들판의 봄나물이 억세어 먹기가 힐들 때는 산으로 갔습니다. 큰 자루와 다래끼, 점심을 싸서 너시 고개, 잣밭 고개, 노음산 중국암까지 오르내리며 다래 순, 도라지, 삽추순, 원추리, 엉겅퀴 등 먹을 수 있는 나물은 다 뜯어서 자루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지고 와서 삶아서 말렸습니다. 잘 마른 나물을 보관하였다가 채소가 없는 겨울에 삶아서 먹었답니다.
5~6월에는 아카시아 꽃, 감꽃, 오디, 산딸기 먹기
할아버지와 같이 제방에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가지를 잘라 꽃을 한 봉투 따고 담 밑에 노랗게 핀 골담초 꽃을 따서 다듬었고, 할머니가 전을 부쳐주셔서 처음으로 아카시아 꽃전 골담초 꽃전을 별식으로 먹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마당에 떨어진 감꽃을 주워 씻어 주어서 먹어보았습니다. 떫고 텁텁하고 맛이 없었습니다.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주시면서, 이렇게 목에 걸고 다니며 꽃을 먹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맛을 서로 많이 먹으려고 다투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에는 뽕나무가 없어 오디를 구경 할 수가 없어 시장에서 오디를 사다가 생과로 먹고 믹서 기로 갈아서 한 잔씩 나누어 먹었습니다.
산딸기와 복분자를 재배하는 농가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없으니 산딸기를 따려 가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작년에 할아버지 친구가 몇 포기 주어서 울타리 밑에 심은 딸기나무에서 딸기를 땄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주전자를 들고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큰 소나무가 많아서 딸기나무를 찾기가 힘이 들었는데 한 곳에서 딸기나무 숲을 만났습니다. 너무 많이 익어서 오늘 우리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땅에 다 떨어 질 것 같았습니다. 따 먹으면서 잠시 땄는데 주전자에 가득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릴 때 이 산에 큰 나무는 없었고 딸기나무와 진달래꽃 나무가 많아 봄에는 꽃으로 붉게 물들어 꽃을 따먹었고, 보리가 노랗게 익어갈 때면 산에 올라가서 붉은 산딸기를 따서 배를 불렸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딸기를 배부르도록 먹었다니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딸기를 씻어 주전자에 넣고 방망이로 눌러서 딸기 주스를 만들어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이들은 괭이를 들고 돼지감자를 케어 물에 씻거나 껍질을 벗겨 먹었습니다. 그때 돼지감자는 밭둑 도랑둑 공터 어느 곳이든 많이 자랐습니다.
제방 둑 찔레넝쿨에 핀 찔레꽃을 따 먹었고 새순이 돋아나면 굵은 찔레나무 굵은 순을 꺾어 껍질을 벗기고 아작아작 씹어 먹어 보니 달작지근하고 상큼한 맛이 났습니다. 이 맛에 배가 고파 많이 꺾어 먹었던 것 같습니다.
소 쟁기로 논갈이를 할 때 땅속에서 올라온 콩보다 굵은 검고 둥근 올방개(올미) 뿌리를 주워 씻어서 먹으면 달콤한 맛이 있어 아이들이 쟁기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삐삐(삘기)도 뽑아서 먹었고, 먹어서 해가 되지 않는 것은 뭐든지 먹고 살아남았습니다.
밀 보리가 익어갈 때 깜부기가 많아 이삭이 까맣게 되었습니다. 깜부기 이삭을 잘라 입에 넣고 침으로 우물우물하여 먹으면 온통 입안이 새까맣고, 밀 서리도 했다고 하셨지만, 밀을 재배하는 농가가 없어 밀 서리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리농사를 지을 때 양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으면, 양지바른 밭둑 밑의 노란 보리이삭만 잘라 나무 막대로 두드려 타작을 하고 큰 가마솥에 불을 때면서 보리를 넣고 소금물을 뿌려가며 나무 주걱으로 저으면서 보리 껍질을 말려 디딜방아에 찧어 떡 보리쌀을 만들었답니다.
속껍질이 덜 벗어져 터실터실 했던 떡 보리쌀, 보리밥도 지어 먹고 보리죽도 끓여 허기진 배를 채우며, 힘들었던 보릿고개를 넘겼답니다.
7~8월에는 보리 밀 개떡, 박 잎 전, 박나물, 박회 먹기,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보리 개떡을 찾아 먹거나, 보리쌀을 삶아 빨래 줄에 걸어놓은 소쿠리에서 한주먹 쥐어 먹었고, 밀가루를 한 사발 퍼서 물을 붓고 술 약과 사카린을 넣고 반죽을 하여 잠시 두었다가 큰솥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솥 안에 들기름을 바르고 밀가루 반죽을 붓고 솥뚜껑을 잠시 덮어두면 전 같은 빵이 되어서 동생들과 같이 먹었다는 할아버지.
보리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어 보리개떡을 만들어 먹을 수 없었으나, 보리쌀을 삶아 건져서 소쿠리에 담았다가 먹어 보았으나 맛이 없어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밀가루 2컵에 이스트와 설탕을 넣고 반죽하여 30여분 두었다가 피자 펜에 식용유를 두르고 반죽을 넣어 전과 같은 빵을 만들어 주셔서 먹었는데 파는 빵맛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별 맛이 없었습니다.
먹을거리가 풍족한 요즘 보리개떡과 보리국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음식입니다. 보리를 찧을 때 처음 나오는 거친 껍질은 받아내고, 나중에 나오는 보릿겨를 따로 받아 체로 쳐서 밀가루 같이 보드라운 보릿가루에 소다 사카린을 넣고 반죽하여 몇 시간 발효시켰다가 솥에 밀가루 빵과 같이 쪘습니다. 김이 오르고 난 후에 솥뚜껑을 열면 밀가루 빵같이 많이 부풀어 오르지는 않았지만 검은색의 보리개떡이 만들어 졌습니다.
고운체로 쳤어도 밀가루같이 부드럽지 못하여 딱딱하고 까맣고 맛은 없었지만, 사카린의 단맛과 배고픔에 요즘은 개들도 먹지 않을 보리개떡을 많이 먹었답니다. 보리개떡은 가족끼리 논밭에 풀을 맬 때 새참으로, 어린애들의 군것질로 먹었습니다.
보릿겨를 물에 반죽을 하여 밀가루 국수같이 홍두께로 밀어서 칼로 썰어 삶으면 면발이 없고 끊어진 검은 국수. 그 국수도 마음 놓고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었답니다.
자주 씻지도 않고 흙이 묻어 새까만 손으로 새까만 보리개떡을 들고 흘러내리는 누른 코를 훌쩍거리며, 아껴 먹는다고 조금씩 떼어 먹는 모습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는 할아버지.
봄에 박 모종 2포기를 사다가 심었는데 아기 머리만큼 큰 박 3개가 달렸습니다. 어제부터 비가 내려서 할아버지가 우의를 입고 박 잎을 따다가 전을 부쳤는데 배추 전 같이 맛이 있었습니다.
전을 붙일 배추가 없던 옛날 장마철에는 박 잎으로 전을 부치면 배추 잎으로 전을 붙인 것 같았고, 맛도 배추 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박을 하나 따서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내고 썰어서 양념하여 끓이다가 들깨가루를 넣어 반찬을 만들어 먹고, 채 썰어 초장에 묻혀 박회를 만들어 반찬으로 한 끼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9~10월에는 송기, 콩서리,
소나무 새순을 잘라 낫으로 곁 껍질을 벗기고 하모니카 불 듯 이로 훑어서 하얀 속껍질(송기)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소 벌초를 마치고 새순을 잘라 속껍질을 먹으니 단맛과 진한 솔 향이 입안에서 가슴 속까지 가득하였습니다.
아저씨, 형, 동생들도 같이 맛을 보았는데, 배고픔의 고통을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반응은 많이 달랐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바로 뱉아 버렸습니다.
들깨를 베고 쉬는 시간에 할아버지가 콩서리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콩잎이 떨어지는 두 포기를 뽑아서 콩잎을 따내고 들깨를 수확한 빈터에서 참깨줄기에 불을 붙여 콩서리를 하였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 콩대를 잡고 불속에 넣으니 콩꼬투리 작은 털에 불이 붙어 발갛게 탔습니다. 콩꼬투리가 하나 둘 불속으로 떨어져 거의 다 떨어졌을 때 할아버지가 콩대를 버리고 불을 해쳐 불타는 줄기를 버리고 윗옷을 벗어 흔들어 재를 날렸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까만 꼬투리를 눌러 파란 콩알을 입에 넣어 맛있게 먹었고, 먼저 떨어진 꼬투리에서 튀어나온 콩알은 뽁은 콩처럼 딱딱하였으나 고소하여 살아있는 추억의 맛이었습니다.
학교 갔다 오다가 배고플 때 무를 뽑아 잎줄기를 잘라내고 입으로 파란 껍질을 돌려 벗기며 먹었다는 할아버지. 콩을 뽑으며 무를 뽑아서 낫으로 푸른 부분을 깎아서 한 입 먹으니 속이 시원 하였습니다.
두 골 심은 고구마를 캤는데 량이 많았습니다. 작은 아버지 집에 두 박스 보내고, 삶은 고구마 몇 개로 점심을 해결하였다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고구마를 쪄서 김장 김치와 같이 저녁을 먹었습니다. 물고구마라 달고 맛이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는 단 호박을 삶아 검은콩과 밀가루로 새알을 만들어 넣고 호박범벅도 만들어 먹으며 겨울을 보냈습니다.
11~12월 배추뿌리, 메주콩 먹기
서리가 오기 전에 고구마를 케어 작은방 구석에 쌓아두고, 붉은 고추를 따고 목화를 따고 파란 다래가 달린 줄기를 뽑아 양지바른 곳에 말렸답니다.
벼와 조를 수확한 논과 밭에는 가을보리와 밀을 파종하였습니다. 일이 끝나면 무 배추를 뽑아 김장김치를 겨울에 먹을 양식으로 100포기 이상 많이 담았답니다. 남은 무는 구덩이를 파고 땅에 묻어 두고 겨우내 꺼내어 먹었답니다.
무 잎은 시래기를 만들려고 짚으로 엮어서 잘 마르도록 그늘에 걸어 놓고, 토종 배추뿌리와 무는 구덩이를 파고 땅속에 묻었습니다. 배추뿌리를 깎아서 먹으니 약간 매웠으나 맛이 있습니다.
메주 끓이는 날 메주콩은 자주 먹어보았는데 할아버지 어릴 때는 배가 고파 메주콩을 많이 먹고 배탈이 나서 설사를 많이 하셨답니다.
할아버지 초등학교 때 분유를 나누어 주는 날은 보자기를 가져가서 한두 되씩 받아왔답니다. 동생들과 같이 마른 가루를 입에 넣고 침으로 버무려 먹었고 반죽을 하여 밥 위에 쪄서 먹었고, 따뜻한 물에 타서 우유를 만들어 마셨답니다.
미국 공법 480에 의거 잉여농산물인 밀가루를 배급으로 주었습니다. 미국가루는 쫄깃쫄깃하여 우리가 재배하는 밀가루와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농가에서는 밀재배를 많이 하여 밀가루를 판매 하였으나, 밀가루가 지원되면서 판매를 할 수가 없었고 자가 소비를 하였으나 1970대 후반에는 우리 밀을 재배하는 농가가 없어지고 농가에서도 밀가루는 사서 먹었습니다. 공짜로 우리나라에 준 밀가루에 길들어진 입맛 때문에 우리 밀은 자취를 감추었답니다.
송화 가루 다식, 박 정과, 가죽 자반 등은 사라지는 음식으로 이번에는 체험을 할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꼭 해보려고 할아버지와 약속을 하였습니다.
1970년대 통일벼를 재배로 흰쌀밥을 먹기 시작하였고, 후반에는 배부르게 흰쌀밥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하였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세치혀끝이 밥맛을 따지게 되어 통일계통 벼는 자취를 감추고 밥맛 좋은 일반 벼를 재배하였으나, 1990년대 후반에는 서구화된 식습관과 외식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밥맛 좋은 일반 쌀도 남아도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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