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4장 43-45절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나
요한복음 3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내용처럼 그는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에게 증거 하기를 그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로 만물 위에 계신 분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고도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그를 사랑하시는지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는 것도 증거 하였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할 수 있지만,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 할 때가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베푸실 때였는데, 요한복음 4장에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려고 하셨습니다(3). 아마도 갈릴리로 가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가신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려고 하셨습니다(4). 우리나라 지도로 생각해 보자면 가장 남쪽이 유대 지역이고 그 위쪽이 사마리아 지역, 그리고 그 위쪽이 갈릴리 지역입니다. 유대 지역을 떠나 갈릴리고 가신다고 할 때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빠른 길을 택한다는 의미에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려고 하셨는가? 사마리아 여자와 만나 대화하신 내용에 근거하자면 단순히 사마리아 지역을 빠르게 통과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고(9), 그래서 유대와 갈릴리 지역을 오갈 때 사마리아 지역을 거치지 않기 위해 우회하여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일반적으로 우회하던 지역을 일부로 통과하여 가셨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곳에도 ‘내 백성’이라고 칭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고, 바로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일부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여 가셨던 겁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가 여섯 시쯤으로 우리나라 시간으로 하자면 정오쯤 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한 우물곁에서 쉬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고 없었을 때인데, 한 여자가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바로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 마시는 물로 시작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수 있는 생수로 대화의 주제를 옮기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이 생수에 대한 것임을 알리셨습니다. 물론 여자가 이 생수에 대하여 곧바로 깨달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위 여자가 부끄러워하는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으로 여자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오랜 갈등 가운데 한 가지인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 20절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즉 앞선 대화에서 여자는 육적인 의미로만 반응했다면 선지자로 여기면서 영적인 대화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여자에게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리되 그 정통성은 사마리아가 아니라 유대에 있지만 유대의 정통성 역시 허물어지고 결국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과 24절을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여자의 반응은 단지 선지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알았고, 동네로 들어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까지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여자가 동네로 들어가 동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전 제자들에게도 이르신 내용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자와 만나기 전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다가 여자와의 대화가 마칠 때쯤 돌아왔습니다. 여자가 동네로 들어가고 난 뒤 제자들은 예수님께 먹을 것을 드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은 단지 육적인 의미로만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자신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구약 선지자들이 뿌리는 역할을 했다면 너희는 뿌린 것을 거두는 자 있다고 하시면서 지금이 거둘 때요 지금이 추수할 시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내용이 사마리아 여자의 증언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내용입니다. 39절 하반부를 보면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2절에서는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처음에는 여자의 말로 인하여 믿었지만,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면서 말씀하셨을 때 그가 세상의 구주임을 알고 믿었다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성에서의 복음 사역을 마치고 난 뒤의 일입니다. 본문 43절에 보시면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난 뒤 이제 본래 목적지인 갈릴리로 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때 갈릴리로 가면서 하신 말씀이 있는데, 44절입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조금 전까지 설명한 사마리아에서의 사건을 염두 해 두시고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서 한 여자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난 뒤 그 동네 사람들에게 동일한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예수가 구주임을 고백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대조적인 말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의 한 지역에서는 소위 복음의 수확이 일어났지만,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높임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고향에서 높임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3장 53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13:53-58)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유대 지역에 있는 베들레헴입니다(마2:1). 그러나 태어나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나세렛이란 곳으로 가셨습니다(마2:23). 그래서 예수님의 고향이 어디냐고 할 때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이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 있는데(마21:11),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난 뒤 어디로 가셨는가 하면 고향으로 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듣는 자들이 놀라면서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반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할 때 단지 가르침만 있었다고 볼 수 없고 가르침과 함께 이적의 역사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후 내용인데, 예수님의 지혜를 듣고 능력을 보았다면, 그래서 놀랐다면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만,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알고 그의 형제와 누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가 아니냐? 그 형제들은 야고보와 요셉, 시몬과 유다가 아니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는 자들이 아니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말이 거짓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직업도 맞고 어머니 이름도 맞습니다. 형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누이들도 있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외적인 것만 알 뿐입니다. 그가 세례 요한이 증거 한 것처럼 위로부터 오시는 이요,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로 만물 위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에 대하여 놀랍게 여겼지만, 또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도 보았지만, 그것이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을 때 그것이 사람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면 그 출처가 어딘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5-28)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면서도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억지스럽게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된 것을 구하고자 하는 자세도 없었습니다. 그저 편견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는 말씀이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면 어둠이 물러가야 합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왜 물러가지 않습니까? 빛이 비춰 어둠은 물러갔지만 그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버린 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증거와 같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누군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말하는 그들, 유대인들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고 하셨고, 특별히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관리들의 경우 그리스도에 대한 외적 지식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에서는 헤롯이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미가 선지자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마2:5-6).
그러나 이런 지식조차 저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올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으로 가시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0절부터 보시면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요7:40-43) 앞에서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나사렛으로 옮기셨습니다. 거기서 어릴 때부터 사셨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 때문에, 즉 베들레헴이 고향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겁니다.
요한복음 1장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빌립을 그의 제자로 부르시고 난 뒤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했을 때 나다나엘 역시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a) 즉 나사렛이라는 출신 배경이 올무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결국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따르게 되느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이렇게 말합니다. “...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1:46b)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요한복음 1장 47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1:47-50) 그러니까 빌립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님께 나아갔는데,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께로 오기 전부터 나다나엘을 알았다고 말씀하심으로 예수가 인간으로만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던 겁니다. 이런 믿음은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혈통에 의해서도, 육정에 의해서도, 사람의 뜻에 의해서도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는 저들의 편견이 원인입니다. 고향이 나사렛이라고 생각하는 그 편견이 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의 부모와 형제, 누이에 대해서도 안다고 생각한 것, 다시 말해 미천한 신분에 지나지 않으며 배운 것도 없는 그런 집안이기에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그런 편견을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한 마디로 그들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절했던 겁니다.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없었는가? 믿을 수 있는 증거들이 없었는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이 믿을 수 있는 내용이었고, 그의 행하시는 바들이 믿을 수 있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당시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고 증거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마7:29).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1)고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으로 다시 가시면, 앞에서 40절 이하 43절을 봤는데 43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었다고 할 때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51절입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리고 여기에 대한 반응이 52절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많은 이들은 예수가 나사렛이 고향이라는 것 때문에,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왔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말을 들으라. 그 사람이 행한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그의 행하시는 바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궁극적인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지만,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자들은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믿음 없음이 하나님 탓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믿음을 줘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증거들이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편견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을 때 그것이 믿음 없음의 원인으로 지적될 뿐입니다.
이런 내용은 시각을 좀 더 넓혀서 보면 유대인의 배척과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할 때, 그리고 그것이 앞선 말씀인 사마리아 수가라는 성에서의 수확과 비교된다고 할 때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만, 그것도 권위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을 증명할 만한 이적과 기사들 보면서도 배척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에 친히 오셨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1절의 말씀처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치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 4장의 기록처럼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영접하더란 것입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에 대한 언급도 했지만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경우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몰랐다면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영적 변화가 분명히 있는 니고데모의 모습입니다. 니고데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대인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모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이 유대인 중심이었다면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복음의 문이 더욱 분명하게 열리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45절을 보시면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사마리아에서 떠나 갈릴리로 가시면서 하셨는데, 이제 갈릴리에 이르렀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그를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이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인데, 갈릴리 사람들은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영접했는가? 그들도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요한복음 2장 23절의 내용과 연관이 되는데, 거기 보면 “유월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설교된 바가 있지만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고 본 그것으로 그를 영접했다, 믿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러한 존경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선물은 잘 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는 기적을 통해 그 소문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하면서 지금 사도 요한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표적이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킴으로 복음의 길을 평탄케 한다는 의미로도 주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서 영접하였다고 할 때 이것을 사마리아 수가 성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사마리아 수가 성 사람들의 믿음은 41절 말씀에서처럼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았다는 데 있습니다. 반면 갈릴리 사람들은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있습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요한복음 4장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표적과 기사가 있어야지만 믿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표적 자체만으로는 참된 믿음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표적은 말씀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표적이 말씀을 섬긴다고 할 때 표적이 있어야지만 믿는 것은 말씀 자체를 믿는 것보다는 질적으로 낮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할 때 만약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나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튜 풀 주석에 보면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어떤 이적도 보지 않았지만, 오직 말씀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던 반면에, 이 갈릴리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는 하였지만, 명절 때에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을 본 것이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 이유였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은 저 사마리아인들의 믿음만큼 그렇게 고귀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주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20:29)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렛이 아닌 갈릴리 지역의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 예수님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면이 드러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하자면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신 믿음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의 기록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런 표적과 기적의 역사는 기록된 말씀의 완성과 함께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표적과 기적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더 나은 믿음을 주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20:29)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고 말씀하신 책망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그의 말씀을 통해서도 주어지고, 그의 말씀을 통해서만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계시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표적과 기적의 역사가 멈추었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시고 오히려 배척 받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다시 말해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참된 믿음을 가진 우리는 세례 요한의 자세처럼 그분만을 흥하게 하고 그분만을 높이는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 오늘 내용으로 하자면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의 수준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의 수준으로 있는 것이 더욱 주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더욱 강화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더욱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