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이문재, ‘푸른 곰팡이’ 전문-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2021. 03. 백란주
황금 석곡이 꽃망울을 품었다, 터트렸다. 익숙한 일인데도 처음인 듯 수줍게 터뜨린다. 방향성을 잃은 듯 드리운 꽃대는 자유로운 뿌리와 닮았다. 그렇게 또, 봄이 시작되었다.
반복하는 일이라고 해서 대충 품거나 피지 않는다. 익숙함이라고 과정을 생략하지도 않는다. 조금 빠르거나 느릴 뿐 봄꽃은 봄에 피는 것이 소신이라고 말한다.
꽃다발이 되기 위해 피어올린 꽃대와 관상용이 되기 위한 꽃대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다. 꽃다발이 되기 위해 하우스 속에서 보내는 꽃은 화려함으로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관상용 꽃은 다시 피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뿌리를 지켜야 한다. 쓰임새에 따라 운명이 다름을 탓하지 않는다. 다름을 닮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들의 삶대로 살다가 간다.
봄이 되는 시점, 지인들에게 오는 소식의 공통점은 목련이다. 목련 좋아하는 나를 생각하며 다른 듯 닮은 목련 모습을 내게로 보내준다. 어느 장소의 목련이 어떻게 피었는지를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이 시간이 슬프다. 학교에 가지 않고 대면 수업하는 아이들처럼 그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 사진 속에 갇힌 모습으로 마주함이 내게는 슬픈 일이다.
기다림이 동반된 설렘은 꽃망울처럼 부풀어 오른다. 어디쯤 왔는지 발자국을 계산하듯 목련가지에 닿는 바람을 느끼는 나만의 셈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목련은 설렘이 사라지는 허무다. 바람이 다른 온도를 품는 순간부터 눈도장을 찍는 나의 설렘은 마치 사라져가는 빨간 우체통 같다. 손톱 크기에서 엄지손가락 사이로 다시 손뼘으로 그렇게 하늘을 향해 눈대중하는 나의 설렘이 점차 짧아진다. 목련이 너무 빨리 와버렸다.
이문재 시인은 시 쓰기, 글쓰기가 음식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독자를 너무 배려해서 ‘암죽’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소화시키기 편하게 독자를 아이 취급하는 경우를 말한다. 때로는 독자에게 거친 음식 그대로 익히지 않고 내어놓아 독자가 오랫동안 씹어 소화를 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시는 시를 읽는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이 한 번 쓰고 시를 읽는 독자가 한 번 쓰기 때문에 좋은 시는 독자의 손에서 나온다는 시인의 겸손이 마냥 부럽다.
느리게 가자, 게으르게 가자는 시인의 말이 위로가 되는 봄날이다. 빨리 그리고 잠시 지나가는 봄을 붙잡기 위해 눈짓도 손짓도 빨라만 간다. 느끼지 않고 스치는 감각이 우선시 된다. 마음에 머무는 시간을 두지 않고 보이는 것에만 닿으려는 봄의 안타까움이 나를 툭 건드린다.
빠른 것, 자극적인 것에 익숙한 현대문명으로 감각은 마비된다. 단체 톡방에서 순식간에 올라오는 자음, 모음의 짧은 댓글만으로도 마음을 읽어야 한다. 마음언저리를 맴도는 자들에게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언어들이 자라나고 있다.
손편지로 주고받았던 며칠의 발효, 며칠의 암흑은 설렘이었다. 알 수 없는 믿음이 있었다. 기다리던 시간은 느린 걸음으로 수줍게 오는 봄을 닮았다. 답이 오지 않으면 수신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거라는 기다리는 몫의 마음이 숨겨져 있다. 기다리는 행복이 살아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손편지를 대신하는 메일로 인해 발효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우스를 누르는 순간 짧은 발효는 그대로 전달된다. 뜸이라는 시간이 사라지는 만큼 틈이라는 감정이 생겨난다. 경계에 머물지 못한다.
카톡이란 메시지는 나를 돌아본다. 삭제 기능이 있어서 잘못 보냈다고 느껴졌을 때는 지워버릴 수 있다. 찰나의 감정, 날 것의 감정이 그대로 허공을 날아다닌다. 사라져가는 발효의 시간이 조금 두렵기도 하다.
서툰 우리를 인정할 수 있는 여유조차 빼앗기는 기분이다. 오감이 사라지고 하나의 감각으로 사는 기형적 모습의 무리를 발견한다.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
님이여, 아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 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한용운, 〈사랑의 끝판〉 전문-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라는 역설에 나는 잡힌다. 게으른 것이 바쁘기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관찰하고 느끼는 것이 게을러야 되는 바쁜 일이다. 느린 나는 시인이 넣어준 감정을 따라가느라 바쁘다. 시인들의 오감은 바쁜 것과 게으른 것이 동격이다. 익숙함을 서툴다 말하는 그들의 언어는 게으른 듯 바쁜 자연과 함께 걷는 이상한 걸음에서 나오는 마법이다.
시를 쓰는 선생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 한 권을 다섯 번 이상 필사를 해보라고 했다. 한 편의 시를 다섯 번 이상 옮겨 적다보니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무엇인가가 있다. 스치듯 지나갔던 단어가 남고 뒤끝처럼 남아있던 속 좁은 감정도 보인다. 숨어있던 속정이 따라온다. 발효의 시간이다.
아름다운 산책을 하듯 세심히 관찰하는 것, 푸른곰팡이가 피어날 시간을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빨간 우체통에 넣고 기다려야 한다.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빨간 우체통이 사라지는 무엇들을 지키기 위해 경고의 색을 품었다.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조금은 느리더라도 자연의 냄새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바쁜 내 걸음에게도 느리게 빼앗기면서 기다려주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러 느린 걸음으로 봄마중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