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처 없는 도처의 성스런 거처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무한자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무한자를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거처와 먹을 것이 필요하고 돌봄이 있어야 하는 듯이 그를 대합니다. 무한자를 사랑하는 만큼 그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한자는 그러한 것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인간에게 그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무한자는 자기 자신으로 족합니다. 학문적 용어로 자존적 존재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만일 무한자가 내게 이것이 필요하다 저것이 부족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한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무한자를 통해서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청일 것입니다.
무한자는 다윗에게 “지금 내가 거처해야 할 집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무한자 스스로가 나의 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운신의 폭을 그 집에 제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생명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어야 할 존재가 일정한 공간에 한정된다면 그것을 무한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나친 신심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무한자는 자유로운 분입니다.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인 수녀의〈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라는 시에서 떠올리는 심상(心想)은 우리가 가져야 할 신상(神象, 神想; 무한자의 이미지)입니다.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멀어지는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렐 수 있다면”(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 기쁨의 열리는 창, 마음산책, 2004, 32) 치자꽃은 향기가 좋다고 합니다. 달작지근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가데니아(Gardenia)라고 불리는 이 꽃은 순결한 소녀가 순결한 남성을 만나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하얀 치자꽃이 노랗게 시들어 갈 때는 슬픔이 묻어납니다. 사라진다는 것처럼 서글픈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의 향기는 늘 처음의 그 향기를 머금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 세조 때 양희안의《양화소록》이라는 글에 보면 치자는 꽃 향기가 맑고 부드럽고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잎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고유한 향기가 있습니다. 처음의 향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좋은 향기로 인해서 그 사람과 인연을 맺어갑니다. 시간이 갈수록 향기가 퇴색된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그 처음 향기는 기억하지 않고 다른 향기를 욕망하곤 합니다. 사람 따라 향기가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향기 따라 사람이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향기를 발하는 것이지 향기가 그 사람의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한자의 향기, 무한자의 존재도 사람이 있는 곳에서 현전합니다. 무한자는 자신의 집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Numquam enim habitavi in domo). 오히려 무한자는 자신의 집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백성이 어디서 살지가 더 중요합니다. 어느 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도록 만들어 줄 것인가가 그의 관심사입니다(ponam locum populo).
사람이 올바로 자리를 잡고, 사람이 거처할 만한 곳, 안전한 곳, 안정적인 곳을 마련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습니다. 무한자는 자신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염려가 더 큽니다. 자신의 사람들이 거처하는 공간과 자리에 무한자가 현존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백성이 자리매김하는 곳이라면 무한자는 언제든 어느 곳에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그의 관심이 먼저지, 자신의 거처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람에 대한 무한자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리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곳, 내가 거처하는 곳, 내가 일하는 곳, 내가 말하는 곳이 성스러운 자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삽니다. 그저 무한자의 자리를 빙자하여 자신의 자리를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나의 자리는 무한자의 현전을 보이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무한자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우선입니다.
종사(宗師)의 가르침에 따라서 일정한 공동체가 탄생하면 유형의 조직을 갖춘 종교적 건물을 마련하려고 하는 게 인간의 의지입니다. 유형의 건축물을 통해서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전’(aedificabis; aedes)입니다. 성전(temple)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집을 짓는다는 것은 연결입니다. 사람의 집을 지을 때도 마음과 마음, 몸과 마음을 잇고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유형의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그 집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어떤 관계이냐에 따라서 집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관계를 우선으로 해서 디자인과 크기와 예산과 형태와 의미 등 두루 고려해야 합니다.
무한자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에게 말하고 있는 무한자의 말씀은 자신을 위한 집을 짓기 전에 관계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Numquid tu aedificabis mihi domum ad habitandum?) 이 질문은 무한자의 집을 짓기 전에 그 무한자와 사람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의중을 파악하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무한자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후에 그 성전에서 자신의 이름(nomini)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무한자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고,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 되기를 의도합니다(Ego ero ei in patrem, et ipse erit mihi in filium). 종교(교회)는 이 무한자의 의지를 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무한자의 거처를 축조하기 전에 무한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길이길이 기억해 줄 수 있는지를 타진합니다. 건축은 무한자가 직접하기 때문에 그에 앞서 아버지로서의 신과 아들로서의 사람의 관계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무한자가 거처하는 성전이 모든 세속적인 시간성을 넘어서(tem-ple) 무한자와 어우러지는 회상(상상력)과 무한자를 구현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 후반부를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 기쁨의 열리는 창, 마음산책, 2004, 32-33)
인생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정주하고 싶으나 그 시간은 잠깐일 뿐 실상은 한시도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는 순간적인 삶입니다. 그 나그네와 같은 인간의 삶을 먼저 안정적으로 정주시키고 자신의 거처를 생각해보겠다는 무한자의 의지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정체가 이미 떠돌이였습니다(ambulabam; ambio). 자신이야말로 나그네였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함께 두루 돌아다녔습니다(transivi cum omnibus filiis Israel). 그래도 “내 거처를 먼저 마련하라”, “내 자리가 최우선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무한자의 사랑을 먼저 깨닫고 그와의 관계를 더 두텁게 만들면서 무한자가 거처하는 집을 짓는다면 그 집에서는 무한자의 향기가 더욱 짙게 발할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무한자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무한자와 더불어 풋풋한 사랑이 넘치는 집이 될 것입니다. 그게 신과 우리와의 진정한 관계여야 합니다. 신전이라 하면서 그곳에 들어가 예배를 잘 드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무한자의 사랑을 알리고 그에 대한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표현하여 곳곳에 그 향기가 배어 있는 집으로 만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애써 지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전이라 지어놓고 하는 일이란 사랑도 없고 무한자의 향기도 나지 않는 곳이라면 그가 지향하고 있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무한자는 말합니다. “나는 내 백성이 머무를 곳을 정해 주어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전처럼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이 안심하고 살게 하리라. 지난날 내가 위정자들을 시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던 때와는 달리 너희를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하리라. 나 야훼가 한 왕조를 일으켜 너희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리라. 네가 살 만큼 다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나에게 집을 지어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든든하게 다지리라.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삼하 7,11-14a).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무한자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와 같이 무한자의 사랑을 이웃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퍼주는 성전의 역할을 담당했던 개념이 원시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에클레시아(ekklesia, qahal)였습니다. 그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고 화려한 집을 짓는다 하여도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이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사무 7,1-1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