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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호세아 8장 11-14절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만드는도다
호세아 8장 1절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고 할 때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에 대하여 말한 바가 있는데, 이 우상들은 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4절에 의하면 자기를 위한 것으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은과 금으로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제단 또한 만들었는데, 오늘 본문 11절은 이 제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물론 수없이 많은 우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조차 버린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제단을 만들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제단에서 제물을 드린다고 할 때 우상에게만 드린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그 제단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제단, 그리고 그 제단에서 드려지는 제물들이 다 죄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위한 제단, 하나님을 위한 제물이 죄를 위한 것일 수 있는가? 우상을 위한 제단, 우상을 위한 제물에 대해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어떻게 죄를 위한 것일 수 있는가? 그것은 1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율법을 통해 명한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2절도 보시면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율법과 상관없는 것이기에 죄를 위해서 제단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맞춰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웁니다. 그런데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죄를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죄일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고 있는 않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면 교회를 세우지만, 그리고 그곳에 모여 예배를 드리지만 죄를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칼빈의 경우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드는 것이나 교황주의자들이 성당을 많이 짓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가 이미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가르침으로 가득하다면 아무리 화려하게 교회당을 지어도, 그리고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하더라도,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더라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라고 말씀한 내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제단을 많이 만들면서도 그들은 죄를 위하여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제단을 많이 만들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교회당을 지으면서 죄를 위하여 짓는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감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이 짓는 것이라면 아무리 크고,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웅장할지라도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것은 죄를 위하여 있다는 것 외에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김영규 목사님이란 분이 계신데, 그분의 책인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신학」의 내용 가운데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pp.11-13).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들도 종교개혁이라 하면 루터의 95개 조항(1517.1031/11.1)을 내세우며 그렇게 기치를 들어야 하는 것이 마치 종교개혁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명제들의 내용을 보면 그 시대의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정신을 찾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명제들에서는 그 당시 루터가 자신의 학교에서 강의했던 것과 같은 독특한 의미에서 오직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강조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교황 자체를 부정한 일이 없었고 어느 정도 제한적 의미에서 그의 사죄권도 인정하였다(1,5,6,20). 그리고 그 명제들 안에 연옥자체가 부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법으로 인하여 형벌을 받고 있는 자들의 죄용서 문제와 그 당시 부패된 사죄방식들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면죄부에 대해서도 면죄부 동기와 그 정신을 근원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었고 그 유효성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루터의 명제들 안에는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지금도 경고하는 부분이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아직도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첫 비판에도 미치지 못한 상태이다. 즉 제 43조항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곤궁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과 화려한 성전건축 헌금 사이를 비교하는 명제가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성전 건축헌금보다 구제헌금이 더 좋은 것으로 개혁을 내세웠다. 물론 성전건축 헌금을 거두어들이는 아이디어에 있어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건축 헌금하는 것 자체와 죄용서가 결합되어 있는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그 죄용서 방법 자체의 비성경적인 성격에 대해서 비판하여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전선축 헌금방식에 있어서 아직도 루터의 그 비판으로도 충분하리만큼 교회부패가 현존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로서 제 46조항에 보면 성도가 최소 생계유지비를 간직하는 것과 그것을 넘어서 건축 헌금하는 데 헌신해야 하느냐는 물음을 전제하는 대답이 있는데, 그 경우에 그가 개혁명제로 내세운 대답은 건축헌금보다 가정의 생계유지비를 앞세워야 한다는 개혁정신이다. 즉 건축헌금을 내도록 하는 데 있어서 교회가 마가복음 12장에 있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말씀으로 강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웃 사랑과 관련하여 루터는 제 45항에서 예수님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사랑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속죄받는 것이 의미가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개혁의 명제로 내세웠다. 루터의 이런 첫 종교개혁정신은 제 29조항과 제 50조항에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성당건축을 위해서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서 세우느니보다 그 성당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이 좋다는 치명적인 정신을 내세우기까지 하고 있으며 불의하게 건축헌금에 강요되어 돈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교회가 오히려 그 성당을 팔아 그 도둑한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개혁정신이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신교의 첫 시작이면서 루터주의의 첫 시작이 이 95개 조항들이다. 그러나 그 개혁은 개혁주의의 첫 시작이 아니다.
좀 긴 글이지만 개혁주의가 아니라 신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내용에도 오늘날 미치지 못한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강요합니다. 부흥강사를 불러서 각 가정마다 약정을 하게 하고,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처럼 말하기까지 합니다. 신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루터의 95개 조항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 11절 말씀이 적용된다고 하면 과한 적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저들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만드는 에브라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예배 방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경배와 찬양의 방식을, 누가 열린 예배 즉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 Sensitivity Service) 방식을, 누가 영적 체험을 중요시 하는 이머징 예배(Emerging Worship) 방식을 죄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명하고 있지 않는 이상, 자의적으로 만들어 낸 이상 하나님께서는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만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해도 하나님 편에서는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제단이 그에게 범죄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평가로는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단을 통해 죄만을 쌓는다는 것이요, 제단이 범죄의 처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6절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28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무엇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하시는 그런 허용의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28절에서 ‘하나님이... 하게 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체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죄를 짓도록 만든 승인자이신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죄를 승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주체라 할 수 있는가? 형벌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주체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는데, 저들의 죄에 대하여 죄로 벌하신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이 주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만들자 하나님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마음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죄를 내놓습니다. 죄를 쌓아갑니다. 바로 죄를 죄로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을 통해 분명히 명하고 있지만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규범이요 기준으로 주셨지만, 저들은 율법을 규범으로 기준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기록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기록된 율법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의 전통을 세워 하나님의 법을 대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6)란 책망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수없이 많은 제단을 만들어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고 하셨던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명하지 않는 모든 예배 방식, 소위 자의적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는 방식은 오직 말씀으로 명한 것 외에는 없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배와 찬양의 방식, 열린 예배 즉 구도자 중심의 예배 방식, 그리고 이머징 예배 방식 등 시대에 따라 조금씩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명하셨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런 방식을 통해 소위 은혜를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은혜는 거짓된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방식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유익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체험했다는 것으로 속습니다. 자신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체험이 증거가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체험보다 성경이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 즉 성경조차 인정하는 체험을 했을지라도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겁니다(벧후1:16-19 참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시는 방식은 오로지 그의 말씀 안에서 확인되는 것으로만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백성을 위하여 만 가지로, 다시 말해 수없이 많은 것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사기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겠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죄 외에는 나타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순종이 제사보자 낫다는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나님이 명하신 것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
이런 측면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규범입니다. 다른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성경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경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죄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3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내게 고기를 제물로 드리고 먹을지라도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수없이 많은 제단만큼 수없이 많은 제물도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하시는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자의적 예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고기를 드리면서도 드린 고기를 그들이 먹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기에 보면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 말씀하는 내용이 있는데, 제사를 드리는 자가 먹을 수 있는 제물은 화목제뿐입니다. 레위기 7장 11절 이하에 보면 여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본문의 말씀이 단지 화목제만을 의미하는 말씀인가? 그렇게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스라엘이 번제물의 경우 온전히 불태워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임의적으로 화목 제물로 변경하여 일부를 자기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도 그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 바꾸어 드리더란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조건 아래에서만 드린다는 것입니다. 유익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법조차 바꾸어 유익이 되게 하고서 드리는 것, 이것이 지금 북이스라엘의 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헌금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헌신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지만 그런 종교적 열심 또한 그러하지 않습니까? 앞서도 말했지만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헌금을 하게 할 때 항상 헌금에 대한 보상을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서의 보상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말하기 미안해서인지 하늘에서의 보상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정신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난 주 다윗의 본이라고 하면서 역대상 29장 14절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면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나와 내 백성이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즐거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다윗과 그의 백성의 자세이지, 거기에 무엇을 바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드립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어떤 기도를 합니까? 십일조 백만 원 하는 성도가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근사한 기도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마음이 있느냐?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가운데는 구백만 원을 챙기겠다는 속셈도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을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자가 없습니다. 이런 열심을 통해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녀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열심을 냅니다.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온통 자신의 유익으로 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저들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죄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있다는 증거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되게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가? 회개해야 할 죄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죄라고 여기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선지자를 통해 회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의 죄악을 기억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벌하시는데, 애굽으로 다시 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애굽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종으로 있던 곳입니다. 그곳으로 다시금 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애굽에서 종노릇했던 것처럼 다시금 종노릇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노릇한 것처럼 그렇게 종노릇하게 만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할 때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육체는 애굽과 같은 강대국에게, 혹은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에게 종노릇하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저들이 돌이키지 않음으로 죄를 기억하신다고 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 없이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너희의 죄악이 이러하다고 하신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말씀 앞에 비춰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세상적인 관점을 따르고 있는지를 알고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생각하도록 하나님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14절을 보시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왕궁들을 세웠으며 유다는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으나 내가 그 성읍들에 불을 보내어 그 성들을 삼키게 하리라”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렸다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수없이 많은 제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자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렸다고 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이해도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43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런 목적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위한 모든 방향을 무엇을 향해 가는 것인가? 죄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지 않는 이상 그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왕궁을 세웠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를 위할 때 그것을 그냥 두시는가?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왕궁들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고, 특별히 여기서는 유다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 그들의 경우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불로 인하여 삼켜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를 위하여 쌓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스라엘이 자기를 위하여 왕궁들을 세웁니까? 왜 유다가 견고한 많은 성읍들을 쌓습니까? 그렇게 해야지 힘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저들은 자신을 위하여 세상 방식으로 힘을 쌓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라가 강하기 위해서는 많은 군사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힘을 키워갔던 겁니다. 강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성을 쌓은 것이고, 강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좀 더 견고한 성읍들을 세워갔던 것입니다. 이 말은 저들이 하나님을 힘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외적인 것을 더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는 모습이 저들의 신앙이었던 겁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무늬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었던 것이지 전혀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바가 없었습니다. 호세아 8장 4절의 말씀처럼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동일하게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제단을 만들었고, 또한 자기를 위하여 왕과 지도자를 세웠으며, 자기를 위하여 왕궁들과 성읍들을 세웠습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물을 드리지만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이익이 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바꿀 정도로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라는 것을 새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죄의 종으로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자기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지만 오늘 본문 1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곧 우리를 위한 삶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전에도 말씀 드린 바가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은 우리가 소모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곧 우리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순, 즉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은 우리의 본성상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셨습니다. 신앙의 분별은 바로 이 말씀을 규범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 말씀 안에서 확인된다 하더라도 폐하신 것이 있습니다. 율법 안에 의식법, 재판법, 도덕법이 있다고 할 때 의식법과 재판법은 그 형식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분명히 폐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은 여전히 도덕법 안에 살아 있도록 하셨는데, 제1계명에서 4계명까지를 통해 하나님은 예배와 경건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제5계명에서 10계명까지를 통해 사랑과 질서에 관한 교리와 의무를 영원한 도덕법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예배와 경건이 이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사랑과 질서에 대한 내용도 이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는 그것을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