訓敎經 (下) - 22. 삼시대를 위한 책임 오늘 여러분 앞에 말씀하려는 제목은 ‘삼시대를 위한 책임’입니다. 현재의 기점
우리가 하루하루 생활하는 데 있어서, 이 순간을 두고 보더라도 그 순간은 현재로서만 연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현재라고 할 때, 현재를 잘라 보면 반드시 과거가 현재의 첨단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 여기에는 반드시 과거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순간에는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가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진정한 현재의 기점이 어디냐? 이때 우리는 한 선으로 표시할 수 있는 것과 선으로 표시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경지까지의 현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재, 없다면 없고 있다면 있는 것과 같은 현재의 한 점, 현재의 한 선이 오늘 우리 일상생활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루를 두고 보면 거기에는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한달을 중심삼고 보면 지난달이 있고 내달이 올 것입니다. 일년을 중심삼고 보면 지난해가 있고 내년이 오는 것입니다. 청년시대를 두고 보면 소년시대가 있고 미래의 장년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현시대를 중심삼고 보면 과거시대가 있음과 동시에 미래의 시대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이날, 현재의 위치라는 것은 지나가는 과정에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동시에 앞으로 생각지 않은 미래를 맞는 순간점에 있다고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은 한 점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현재는 과거를 부정하는 현재가 될 수 없고, 미래를 부정하는 현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에 빛나는 가치의 기준
그러면, 현재에 빛나는 가치의 기준이 어떤 것이냐? 빛나는 과거를 이어받은 자리요, 빛나는 미래를 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그 방향을 올바로 지시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되지 않고는 빛나는 현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것을 보더라도 숨쉬는 그 자체에서 벌써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일생도 그러한 운명의 노정을 현재의 첨단에 연결시켜서 남겨진 것이요, 역사도 그러한 일생들을 합한 인연을 연결시켜서 현재라든가 미래, 혹은 과거라든가 현실, 현세계, 현세대라는 것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역사적인 한때, 한 순간, 역사를 대표하는 때는 과거의 어떤 때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또, 미래의 어떤 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미래는 미래대로 그것이 동강이 나 가지고 제멋대로 움직여 가지고는 하나의 목적의 방향을 올바로 가려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행렬 가운데 한 일원으로 서서 줄을 맞추게 될 때는, 반드시 앞을 맞추고 뒤를 맞출 수 있게끔 자세를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혹은 ‘우로 나란히’ 하게 되면, 반드시 좌우관계를 봐서 오른쪽이나 왼쪽의 방향을 맞추지 않고는 표준하는 직선의 한 열을 그려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의 패턴을 이어받더라도 그것이 제멋대로의 방향을 취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인간이 바라는 목적, 또는 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가 바라는 목적과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바라는 목적과 우리 후손이 바라는 목적이 제멋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삼시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점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엄숙한 자리에서 과거를 이어받아야 됩니다. 자기 멋대로 오른쪽에 치우쳐서도 안 될 것이고, 왼쪽에 치우쳐도 안 될 것입니다. 좌우와 전후 관계, 더 나아가서는 상하관계를 가리면서 과거를 이어받을 수 있는 엄숙한 자리로서의 현재는 용인될 수 있으되,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이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자리에서 과거를 이어받는다면 그 현재는 중요한 가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현재를 보다 빛낼 수 있는 미래와 연결시키는 현재의 위치를 설정하지 않고는, 우리의 희망이라든가 소망이라든가 더 빛나는 내일을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의 자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현재의 위치에서 ‘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는 언제나 ‘나’ 하나를 생각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 하게 되면 거기에 반드시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좌우가 있고 상하가 있는 것입니다. 전후, 좌우, 상하관계로서 연결되어야 된다 이겁니다. 그 전후, 좌우, 상하가 제멋대로가 아니라 동서남북이면 동서남북, 고저면 고저에 있어서 같은 천주의 방수(方數)와 평행선에 놓여질 수 있는, 언제나 일치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와 아래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오늘에 있는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마음대로 섰다 해서, ‘과거 위에다 맞춰 주소. 아래에다 맞춰 주소’ 그러게 돼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위와 아래의 중간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틀어지게 되면 전부가 틀어진다 이거예요. 그런 상하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이 어떤 것이냐 하면, 현실인 것입니다. 또, 좌우를 중심삼고 볼 때, 좌우를 조정할 수 있는 중심점도 결국은 현재인 것입니다. 전후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오늘 우리 현재의 입장이라는 것은 3시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점이며 3단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점인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일치되지 않는 데서는 통일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목적이 있고 누구에게나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현재가 아닌 미래의 것일수록 방향성이 뚜렷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크면 클수록 일년만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일생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 혹은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그 방향을 맞춰 가지고, 수많은 세대, 수많은 인간상을 거치고 나서야 달성되는 것입니다.
역사성을 두고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 일생이라는 것은 지극히 짧은 것입니다. 영원한 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우리의 일생이라는 것은 한 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어떠한 방향이 있다면, 그 방향을 향해서 우리는 언제나 일치되어야 될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한 방향을 설정했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 방향을 향해서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도 그 방향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민족의 역사도 이 방향을 통해서 엮어내 그 방향을 통해서 남기려고 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적 역사의 방향을 우리가 생각하게 될 때에, 현재로 연결된 그것을 거쳐서 미래가 있고 현재가 연결되는 그 자리에 과거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 우리들이 현재 섭리상에 처해 있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개인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개인은 개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개인은 어디까지나 뚜렷한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어떠한 선을 그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된 그 한 점이라는 것은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 운명의 한 순간
한 순간에, 그 방향이 연결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자기의 생애노정에 뒤넘이치고 있다는 사실, 엇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갈라져 나가느냐? 그 방향이 어떻게 틀려져 나가느냐? 한 순간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달라지고, 한 순간에 어떠한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로 말미암아 그 방향이 변경될 수도 있는 겁니다.
어떠한 순간에 한마디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거꾸로 될 수도 있고, 어떠한 순간에 부딪친 하나의 문제로 말미암아 방향이 변경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느끼는 것, 우리의 오관으로 느끼는 모든 감정을 통해 가지고 그 방향의 첨단이 예민하게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동쪽을 향해 섰는데 진짜 동쪽을 향해 섰느냐 할 때, 동쪽을 향해 섰다고는 하지만 진짜 동쪽에 서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거예요. 동쪽을 중심삼고 동서남북의 선을 그린 그 선의 중심을 향해서 섰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동쪽 편에 섰다. 동편에 섰다’ 이렇게는 말할 수는 있지만, 나는 동쪽 방향에 완전히 일치된 자리에 있으니, ‘나를 본받아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섰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방향이 반드시 목적을 향해 간다면 그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에 제일 가까운 지름길이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은 모르지만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분은 그 하나의 방향을 알아 가지고 꼬박꼬박 그 방향에 맞춰서 전후좌우의 도수를 맞춰서 그곳으로 전진시킬 것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계기 같은 거, 전기 미터 같은 것을 볼 때, 그것을 진짜 영점에 맞출 수 있게끔 조절해 가지고 그걸 중심삼아 가지고 계수적인 수리를 증가시켜서 무엇을 세고 하잖아요? 좌로 몇 도가 됐는가, 우로 몇도가 됐는가, 상하관계가 어떻게 됐는가 하는 것을 측정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행로도 그와 같은 운명에 서 있지 않느냐 할 때, 이것은 두말 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나, 그러한 입장에 선 오늘, 그러한 입장에 선 이 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역사가 흥하고 망하는 운명길에 접어드는 것도 오늘에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가운데 어느 점에서 되는 거예요. 그 점은 오늘의 어떤 시간도 아니요, 어떤 분도 아니요, 어떤 초입니다. 순간이에요. 똑딱하는 그 순간에 역사적 방향이 왔다갔다한다 이겁니다.
여러분의 몸에 병이 났다면, 병이 한꺼번에 와락 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에 한 점에서부터 영향이 돼 가지고 마이너스 방향으로, 혹은 왼쪽 방향으로, 혹은 내리닫이 방향으로 출발한 그 순간이 병이 나는 시초입니다. 거기서부터 그 점을 가하게 되면, 그 환경을 가하게 되면 그것은 점점 내려가게 되어 가지고 그것을 다시 추어올리려면 우리 인간이 모든 생명을 기울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 인생은 무엇을 위해서 태어났느냐? 내가 태어난 것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느냐? 내가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너무나 단순한 거라구요. 내가 사는 데는 뭘하며 사느냐? 그저 밥이나 먹고 아들딸 낳고 그저 일상적 습관적인 행로를 더듬어 간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왔다 간 인간들과 마찬가지의 회전운동을 남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런 인간은 역사시대에 한 점을 잘라 놓은 존재, 즉, 모래가루와 같이 허공에 떠돌아 가지고 어떠한 관계와도 인연맺지 못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이거예요.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그는 고독한 자요, 전체의 연합체로 되어 있는 조직사회에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냐. 그를 무엇에 쓰느냐? 만일 제멋대로 자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가지고 어디 가서 붙었댔자 그것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기울어질 수도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장애도 될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방해도 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한 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적 총합실체로서의 나의 책임
‘나’라는 존재는 어떤 체제 내의 연관적인 생명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수백, 수천 대의 선조들의 모든 생명의 요인을 관계지어, 연관시켜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많은 생명들의 모든 방향을 대표할 수 있는 현재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선조들이 거쳐온 전체 과거의 방향을 총합한 실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표한 선봉에 선 ‘나’가 잘하면 역사적인 선한 선조들의 방향을 연장시킬 수도 있는 거라구요. 잘못하게 되면 아무리 좋은 조상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간 길을 몽땅 꺾어 놔 버릴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와 가지고 선한 선조들의 공적을 완전히 무시시켜 버리는, 완전히 영점으로 화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거예요. 신중하고도 심각한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도 그래요. 보는 데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생각하는 데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행동하는 데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거예요. 전부가 그러한 관계성을 지녀 가지고 생애의 노정을 가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가 아니냐. 여기에서 선하고 악한 사람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한 사람이 결정된 것이 아니요, 미래에 선한 사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과거에 결정된 것이 아니요,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결정되느냐? 오늘입니다. 이 순간이다 이겁니다. 이 순간에 선한 사람이 결정되는 것이요, 이 순간에 악한 사람도 결정되는 거예요. 오늘, 이 엄연한 현실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남이 아닌 나라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중심삼고 내가 책임진 입장에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 현재는 역사적 관계에 등장하는 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미래의 역사노정에 등장하는 순간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보편 타당한 운명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 현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개인적으로 봐도 그렇고, 혹은 한 민족의 역사를 봐도 그렇고, 혹은 세계사를 중심삼고 봐도 그렇고, 역사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섭리사를 중심삼고 봐도 그와 같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거가 잘 나왔다 해도, 방향이 1도만 틀어지면, 그래서 그것이 영원히 가게 되면 목적과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조정할 뿐만이 아니라, 모든 승패의 결과는 현시점의 순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매순간마다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언제 어느때에 악한 자리에, 혹은 실패의 자리에 부딪쳐 가지고 파산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길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야 되겠다 이거예요. ‘아 어제 못 했으면 내일 하지’ 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어젯날 못 했으면 반드시 과거는 여기에서 구덩이가 파지는 것이다 이겁니다.
세계 인류는 삼시대가 연결된 하나의 직선길을 가야
세계사를 중심삼고 어떤 성인들을 추모한다 하게 될 때, 그들을 왜 추모하게 되느냐? 지난날의 사람이면 사람이지 현재에 있는 우리가 그 사람들하고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 사람들이 제시한 방향, ‘세계 인간은 이렇게 돼야 된다’고 제시한 방향에 전부가 맞추려고 하느냐 이거예요.
그러면, 위인은 어떤 사람이냐? 국가적인 운명, 한 민족의 운명을 바라보고 그 민족이 선한 민족이 될 수 있는, 혹은 성공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게 되면 그를 민족의 애국자라고 할 수 있는 거라구요. 더 나아가 세계가 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사람을 성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자보다도 애국자를 넘어서 성인 앞에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한 순간이라는 것은 엄청나고도 두려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위협보다도 더 무서운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천년을 망하게 할 수도 있고 만년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오늘 현실 가운데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오늘은 이렇게 가야 되겠다. 방향을 잘 맞추고 금을 그어 놓고 가야 되겠다. 하루의 선을 그어 놓고 가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혹은 한 달을 생활하게 될 때 반드시 ‘이렇게 가야 되겠다’고 하며 금을 그어 놓고 살아야 됩니다.
그 금이 철저하고 틀림없고 완전한 금일수록 그 순간순간을 연결하는 하루 가운데 한 순간순간을 완전하게 그어 나가지 않고는 완전한 하루와 한 달을 남길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완전한 한 달을 남기지 못하면 거기에서 완전한 일년이 허사가 되는 것이요, 완전한 일년이 허사가 되는 날에는 영원한 이념도 허사로 귀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마다 책임 없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책임을 져야 됩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구요. 어떤 단체의 책임을 진다 하면 그 단체의 방향을 제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을 책임졌다 하면 반드시 방향을 중심삼아 가지고 책임이 벌어지는 것이지 방향도 없이 그저 함부로 해서는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책임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 현재 역사관을 통해 가지고 그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책임적 내용을 지니고 나서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책임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게 될 때는 그 책임자에게 책임추궁이라는 것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추궁하는 것이요, 시대적으로 추궁하는 것이요, 미래적으로 추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하루의 순간이 얼마나 엄청난 순간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공이 다른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구요. 어떠한 상대적인 물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삼은 시간권내에서 좌우되고 있다 이거예요. 시간권내에서 좌우되는데, 그때의 방향 설정 여하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천태만상의 변형이, 변한 상태가 거기에서 전개되게 마련입니다. 역사와 현재와 미래와 하나님이 원하는 길
과거를 무시한 현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과거를 그리는 것입니다. ‘성현의 가르침이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왔으니까, 지금 오는 중이니까, 이분이 가려고 하던 것이 이것이니까, 나는 거기에 맞춰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언제나 과거를 살펴야 되는 거라구요. 또, 언제나 미래를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우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살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중심이 되려고 합니다. 누구든지 출세해서, 성공해 가지고 ‘내가 중심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지요? 그 중심 존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인류를 통합한 하나의 중심선상에 서고 싶다는 말이라구요. 사람 각각에게는 그런 하나의 선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길고 어떤 사람은 짧아서 전부가 달라요. 차이가 벌어진다구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역사가 원하는 길, 현재가 원하는 길, 미래가 원하는 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보면 사정에 얽매여 산다, 혹은 인연에 얽매여 있다, 또 관계를 지어 가지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 나간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살이를 중심삼아 가지고 우리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사정이니 무슨 인연이니 하는 내용을 통틀어 보게 될 때에, 이것을 어디에 맞춰야 되겠느냐? ‘아, 나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 그 일에다 맞춰야 돼, 뜻이고 뭣이고, 일에다 맞춰야 돼’라고 하면 그것은 벌써 틀린 것입니다. 역사시대와 반대적인 자리에 서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반대에 해당하는 보응이 즉각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더라도 자기가 기분 나쁘다고 마음대로 다 해보라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 나름의 방향입니다, 자기 나름의 삶이라구요’ 그러면 안 됩니다. 말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역사와 맞춰 해야 됩니다. 과거와 맞춰 해야 되고, 미래와 맞춰 해야 돼요. 끝날의 목적을 향해 오늘의 방향을 맞추어 나가야
개인적인 미래보다도 가정적인 미래가 멉니다. 개인의 완성시대, 이상시대가 온 다음에 가정의 이상세계가 오게 돼 있습니다. 가정적인 이상보다도 종족적인 미래는 더 멉니다. 종족보다도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 국가보다도 세계, 세계보다도 하나님의 뜻은 맨 나중에 되는 거라구요. 클수록 나중에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끝날을 표방해 가지고 거기에 맞추려고 합니다. 종교의 모든 내용을 가만히 보면, 끝날, 말세시대에 적합한 완성을 표준해 가지고 전부 다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종교를 보면 어리석어 보이지만 종교인들은 그것을 참 멋지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저 끝에다 방향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것이 틀린다고 하더라도, 끝점과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보통 사람들, 자기 멋대로 가는 사람들, 혹은 가정적 목적을 중심삼고 가는 사람들이나 국가적 목적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들은 가정적 목적이나 국가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인들은 그래도 종착점을 바라보고, 나중을 바라보며 간다 이거예요.
역사성을 지닌 종교역사는 길었습니다. 민족의 역사보다 길었더라 이거예요. 우리의 가정적인 살림살이보다도 긴 이 역사의 내용과 가치를 보유하고 있더라 이겁니다. 개인들이 가는 것보다 긴 역사를 지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그러실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다리를 놓아 가려 할 때, 이런 길이 있으면 이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섭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그러한 대목적을 향해서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은 역사적인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것이요, 그런 사상이 있으면 역사시대에 필연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상이 될 것입니다. 그 사상권내에서 나라가 움직이는 거예요. 개인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가정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국가가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세계가 움직일 수 있는 권도 거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내가 중심삼고 있는데 거기에 세계가 움직일 것 같아요? 가정 가운데, 우리 가정 생활을 중심한 관에 세계가 들어올 수 있어요? 없다구요.
먼 거리의 목표를 향해서 오늘의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를 사랑하고, 미래를 사랑하고, 현재를 승리의 것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무리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끝날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성공을 바라더라도 당장에, 젊은 시대에 성공을 하겠다는 사람, 젊은 시대에 성공해 가지고 좋아하겠다는 사람은 소인이 되는 거라구요. 일생을 거쳐 가지고, 일대를 다 투입해 가지고 성공을 바라는 사람도, 그 일대에 성공했다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뜻이 있는 사람은 일대가 아니라 몇십 대를 거쳐 가지고, 내 일대에 안 되면 내 후대 몇십 대, 혹은 몇천 대를 통해서라도 이 뜻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몇천 대가 틀림없이 그 방향을 통해 나간 종족이 있다면, 또 그런 민족이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런 종족과 민족을 통해서 집약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추천해서라도 그런 종족과 민족을 통해서 세계사적인 완성의 뜻을 세울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인과응보의 역사
이렇게 볼 때에, 오늘 현재라는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생을 사는 동안에는 아침에 기분 좋게 출발했다가 나가자마자 돌변지사를 만날 수도 있고 생각지도 않은 친구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알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길거리를 다니다가 만나서 인연된 사람과 주고받고 행동한 것이 자기 일대에 치명적인 운명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가 만나자고 할 때, 원치 않는 약속을 하여 만날 경우 그 길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길도 될 수 있는 거라구요.
장구한 역사를 두고 보면 오늘 현재에는 관계가 없지만 역사시대의 조상으로부터 관계가 있어서, 내 시대에 탕감의 결과를 맺으려는 인과응보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앞에 나타난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에 그가 나와의 순간적 만남에 있어서 내 일생을 파탄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죽는 그 시간에 내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칼침을 맞아서 죽는 최후의 길을 가는 운명에 서더라도, 내가 죽는 순간에 어떤 방향을 가지고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욕심을 가지고 죽는 날에는 함정으로 떨어지는 거라구요. 그러나 인류를 위하는 공적인 욕심을 가지고 그런 방향으로 틀어 놓고 죽으면, 그의 대를 다시 이어 가지고 그 방향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기필코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조를 통해 이 시대에 태어난 현재의 씨족은 어떻게 되느냐? 그들이 관계맺을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세워 놓지 않으면 방향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 방향을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이 불의의 운명에 부딪쳤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바톤을 이어받아 가지고 방향을 가려 가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중심삼고 시작했으면 그 사람을 중심삼고 대를 이으면 좋지 않겠느냐? 만약에 아버지가 그러한 사명을 책임져 가지고 대를 이었을 때 그 아들딸이 다시 그 대를 이어갈 수 있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아들딸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에게 아들딸이 없고, 있다고 해도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딸이 안 됐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할수없이 그 친척 가운데에서 대를 이을 사람을 찾는 것이며, 만약에 친척 가운데에도 없을 때는 그 동네에 그 일족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돈의 팔촌까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관계되어 있는 혈족이 그것을 이어받지 못할 때는 그 친척 가운데에서, 친척 가운데에도 없을 때는 그 동네사람 가운데에서 그것을 이어받을 사람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동네 사람이 복받는 것입니다. 인생 행로의 목적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일생을 함부로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 각도를 측정해야 됩니다. 탐색반이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러 갈 때는 반드시 경도 몇 도, 위도 몇 도 이렇게 각도를 재면서 가는 거라구요. 그러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거예요. 그 방향을 몰랐다간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거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일상생활도 각도를 측정해 가지고 몇도 어디로 가고 몇도 올라가고 몇도 내려가고 몇도 좌우로 간다는 것을 가릴 수 있는 현재의 위치를 확정짓지 앉고는 안심하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어떻게 태어났느냐, 어떻게 되어 왔느냐, 인생이 가는 행로가 어디냐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한탄적으로 결론지어서 ‘인생행로는 고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해인데, 아는 고해면 이롭다는 거예요. 알고 가는 고해라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모르고 가는 고해일 때는, 어떡할 테냐? 안심하고 밥을 먹을 수 있어요? 여러분이 안심하고 시집 장가를 갈 수 있어요? 그것을 무엇이 보장하느냐 이거예요. 보장을 못 한다구요.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일체의 내용을 다시 규명해야 되겠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방향도 모르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살 수가 있어요? 가면 갈수록 가망이 없는 자리에서 여러분은 가만 있을 수 있느냐 이거예요. 소리를 질러 누굴 부르든가, 죽음을 향해서 비약을 하든가 초월을 하든가 해야 될 것입니다.
가망이 없으면 돌이켜 뒤로 돌아오든가, 출발을 다시 하든가 하는 놀음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행로이기 때문에, 과거의 수많은 뜻있는 사람들, 성현현철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생애를 바치고 죽음의 경계선을 왕래하면서 싸워갔던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그렇게 싸울 사람들이 나타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로를 지나가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한 가정을 책임졌다고 생각해 봤어요? ‘내 가정은 틀림없이 이 세계의 인류가 갈 수 있는 표본적인 가정으로 가게 하겠다’고 생각해 보라구요. 심각한 문제라구요.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되는 대로 살지’ 하는데, 되는 대로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을 찾아가서 그분과 더불어 담판을 하고 그분과 더불어 해결점을 지어서, 오늘의 내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가, 현실을 확정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거예요. 행복은 현실을 떠난 자리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구요. 현실에 보장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이 과거의 결실로서 등장하는 행복의 기점이 되어야지, 과거의 결실의 자리가 아닌 현실은 이상적인 기점이었던 과거까지 부정할 수 있는 내용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현실은 역사적 표준점이요 미래의 기원
역사적인 결실을 현재에서 타진해야 됩니다. 미래의 새로운 기원과 출발을 다짐해야 할 자리, 그러한 내용을 결정지어 가지고 전진해야 할 자리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현실은 역사적 표준점입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바라왔던 역사적인 표준점이 돼야 됩니다. 현실은 걸어오는 역사시대에 바라던 하나의 표준점이 돼야 된다 이겁니다.
나에게서부터 사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미래와 과거는 연관성이 없습니다. 과거는 미래의 사회를 횡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구요. 또, 미래는 과거의 모든 어떤 때가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구요. 그것은 전부 다 점이예요. 나에게 전부 다 그 목적점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또, 그 다음에 나로부터 목적점을 지향해 확대되어 나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내일의 희망이 더더욱 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조정이라는 것은 어디서 가능하냐 하면 현실입니다. 미래에 가서 조정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조정했다는 것도 안 된다 이거예요. 언제나 현실입니다. 여러분들이 과거와 초점이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한 발짝만 틀리게 되면, 자기 개인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자기 일족이 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천년의 유대교 역사,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해 가지고 왔을 때에, 4천년 역사의 방향은 어디에 집약되었느냐? 예수에게 집약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점이 틀려졌기 때문에 4천년 역사는 완전히 나가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직행해야 할 텐데 영적으로 갔으니 난데없는 데 갔지요. 난데없이 영계에 올라가서 영·육이 갈라졌으니까 다시 내려와서 그것을 묶어 놔야 됩니다. 거기에는 탕감이 벌어집니다. 너무 올라가서 그걸 끌어내리니 공연한 소모가 벌어지고 탕감이 벌어지는 거라구요.
내가 기쁘다고 허허허 웃는다고 해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행복하다고 해도, 그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느냐? 그 행복이 미래와 관계를 지을 수 있느냐? 내일과 관계성을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을 모르겠다면, 그건 행복이 아닙니다.
만약, 혼자 망하게 되면 자기 혼자 망하겠다고 결심해서 혼자 망하면 되지만, 가정이 망하게 되면 얼마나 비참한 거예요? 자식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고, 아내, 혹은 남편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니, 그게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역사적 결실을 이루어야 할 나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 여러분들이 마음을 맞추어야 됩니다. 이런 면에서 탕감복귀라는 말이 참 고마운 말이라구요. 탕감복귀하려면, 과거에 실패했던 것을 그대로 현재에 전개해 놓고 그보다 나아야 합니다. 낫지 않으면 방향이 설정 안 됩니다. 그보다 못하면 안 된다구요. 조금 나으면 조금 나은 것만큼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인 위인들의 업적을 현재의 우리는 이어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4대 성인이 남긴 공적이 뭐냐?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간 것이 아니라구요. 그들은 인생이 갈 수 있는 대표적인 길을 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준이 멀었다 이겁니다. 개인으로서 가고, 종족으로서 가고, 국가가 가고, 세계가 가야 된다는 그 표준이 막연하지만 동쪽 방향이다, 이렇게 돼 있다구요. 동쪽 방향으로 영점조정은 안 됐지만, 조금 기울어지든가, 조금 오른쪽으로 가든가 해서 치우치긴 치우쳤지만, 동쪽으로 가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성인들은 다 종교 지도자들이더라 이겁니다. 그들은 자기 혼자만으로 간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관(觀)과 일치될 수 있는 목적을 그려 갔기 때문에, 거기에 역사적인 인류가 동원되었다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구요.
현실에 기독교면 기독교의 나날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의 나날, 지금 기독교로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왼쪽으로 치우쳤느냐 하는 걸 생각지도 않는다구요. 그저 그냥 가면 된다는 거라구요. ‘기독교의 전통을 그저 그냥 따라가면 돼’ 하는데 그건 좋다는 거예요. 역사를 맞추려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예수가 바라던 소원 기준과 일치되느냐? 안 됐다면 이 기독교는 몰락해 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터전을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방향이 틀리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일치점을 확정지을 수 있는 현실에서, 미래의 일치점이 출발할 수 있는 오늘의 현실적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분리되어서 내 맘과 몸뚱이가 엇갈린 것과 같이 되면 안 된다구요. 어떻게 직선을 긋느냐 하는 운명권내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점에 놓여져 있는데 ‘나’라는 현실적 중심존재를 들고 나서 가지고, 한 시대 이때만 보고 사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방으로 가더라도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나’라는 것을 들고 나오려면, 역사를 대표한 내가 돼야 됩니다. ‘나’라는 현실의 기반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표준점이 돼 있기 때문에, 역사의 초점을 대표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대표의 결실입니다.
따라서 내 개인을 중심삼고도 그러하지만,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은 물론이요, 인류를 대표한 자리에서 내가 역사적 결실의 자리에 섰다고 할 수 있는 확신이 서야 됩니다. 어떤 자리에서든 대표의 자리에 섰다 할 수 있다면, 그는 역사적 첨단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계사적인 첨단에 선 대표적인 ‘나’다 하는 자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가치 설정의 한 기점이 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함부로 되어 가지고는 가치적인 것일 수가 없다구요. 역사시대를 대표한 ‘나’라 할 때, 과거의 역사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빛나는 가치를 플러스시킬 수 있는 ‘나’일 때에는, 나를 통해서 발전적인 미래가 계승될는지 모르지만, 역사시대보다 못한 ‘나’ 일 때는 그렇게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가 그리던 이상을 현실적인 이상관으로 가져라!’ 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그런 입장을 조정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푸줏간에 가면 평저울로 재지요? 그 평저울을 보면 가운데 왔다갔다하는 것이 있지요? 그게 물건을 놓으면 무게에 따라 움직인다구요. 거기에 평점이, 조정점이 있다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은 조정점입니다. 그런데 딴 데서 맞추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와 같이 돼 있는 것이 오늘 인생살이의 노정을 걸어가는 현재의 입장이요, 현실의 입장이요, 순간의 입장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다구요. 이 순간에 잘못하게 되면 사탄편이 될 수 있고, 잘하게 되면 하늘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도 할수없이 이런 역사시대를 거쳐 나오면서도 완성의 한때를 맞지 못한 것은 현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상들이 실패한 것은 그 어떤 현실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에 잘못 했기 때문입니다.
현재란 역사적 결실점, 시대적 중심점, 미래의 출발점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는 한 시대가 아닙니다. 3시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과거시대를 대표한 자리요, 미래를 연결하는 자리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자리는 과거를 대표하고 현재에는 이 세계가 들어가 있습니다. 현재는 인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과거의 세계 인류 전체를 대표한 자리요, 이 세계를 대표한 중심점입니다.
가정을 대표한 중심점을 맞추었으면, 또 국가의 중심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국가 기준을 중심삼았으면 또 세계의 중심점을 맞추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당초 세계를 위한 중심점을 맞추어 놓으면 딴 것은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라는 것은 무슨 중심점이 돼야 하느냐? 세계 인류를 대표한 세계적인 중심점에 맞추어야 합니다. 희생이 아니라, 고생이 아니라, 죽는 일이 있더라도 가야 되는 거예요. 현실은 어떤 것이냐? 미래의 출발점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역사적 결실점이요, 시대적 중심점이요, 미래에 대해서는 출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리 잘했더라도 여기서 내가 한마디 잘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3시대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입니다. 실패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요, 3시대의 사탄의 화살이 집중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이런 점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네가 역사적인 대표의 자리에 섰느냐? 현실적인 중심존재로 섰느냐?’ 할 때, 못 섰다 하면 지옥문을 열고 들어가게 돼 있다구요. 그러면 복귀 못 되는 것입니다. 복귀완성의 점이 둘이에요? 하나밖에 없다구요. 완성의 인을 찍는 자리가 두 자리예요? 한 자리에서 찍는 거예요. 미래의 출발점이 없게 되면, 천국이상이고 무엇이고 다 부정이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이걸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실이란 삼시대를 위한 책임을 해야 할 중심점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아. 이렇게 된 것이구나!’ ‘아 선조들이 나를 맞추고 있구나!’ 이러면서 잘 맞춰 나가면 선조들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열리는 거예요. 굴을 뚫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좋은 곳에 고속도로가 있으면 전부 고속도로로 가지요? 그러니까 그곳이 현실적인 중심점이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엔 미래적인 출발점이에요. 거기서부터 희망의 출발을 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는 가도 가도 희망입니다. 가도 가도 절망이 아니라구요.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3시대를 위한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예요. 현실에 있어요. 그러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역사를 대표한 자리에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인류가 가야 할 중심적인 자리를 올바로, 깨끗이 닦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미래의 후손들 앞에 십자가라든가 수난길을 안 남기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밤이나 낮이나 역사적 방향에 맞추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국가 기준을 넘어설 때까지 잘못 맞추어 가게 되면 비운에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런 관점에서 현재의 입장보다도 내일의 개척자의 입장에서, 현재의 자리에서 기준을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앞선 자리에서 현재의 기준을 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앞서가야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3시대를 책임해서 결정지어야 할 중심점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밥숟가락 한번 드는 것이 패자의 서러운 길을 걸어가게 할 수도 있는 것이요, 내가 생각하는 거기에서 망운의 징조가 싹틀 수도 있는 것이요, 하루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일생을 망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행복한 줄로 생각하기 쉽지만, 하루가 얼마나 두려운지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한 가지 일을 다짐짓게 될 때 하늘이 설정한 목표와 목적을 향해 기준을 맞춰 나가는 오늘을 맞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첫댓글 아주
천지인 참부모님 진심으로 사랑 합니다 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