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청룡사 주변 청룡리의 탐방 포스팅을 해본다
청룡사 들어가기 50m전 오른쪽 길로 가면 바우덕이 사당 이정표가 나온다
바우덕이에 대해선 따로 포스팅을 하고 먼저 청룡사 부도탑이 있다
부도는 스님이 입적 후 유골을 안치한 탑이며, 청룡사부도군은 청룡사 입구에 있는 사적비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 편에 위치해 있다.
석축(石築)의 대지(臺地)위에 모두 10기의 석조부도를 안치했는데, 대지의 산쪽으로 1단 높인 곳에 5기를, 낮은 곳에 5기를 각각 건조(建造)했다.
10기의 부도 중 1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종형(石鐘型)으로 방형과 8각, 또는 원형의 지대석위에 1석으로 조성한 탑신을 안치했다. 8각의 지대석에는 측면과 상면 조직이 있는 것도 있다.
이처럼 「묘화당대사상민(妙華堂大師尙敏)」과 같이 부도의 주인공을 밝혀 기명(記銘)된 것도 있다. 내 눈엔 묘련당으로 보이는데...
탑신부에도 하단부에도 하단부에 조식이 있는 부도가 있으며, 정면은 거의 보주형(寶珠形)을 이루었다. 또한 보주형 정상부에 있어서도 보륜을 동일석에 조각하거나 주변에 망련을 조식하는 등 화사한 상륜(相輪)을 이룬 것도 있다.
부도탑보다도 내가 이쪽으로 방향을 튼 이유는 청룡사 뒷편 산 위에 인평대군의 손자 묘소가 있기 때문에 찾기 좋은 겨울철에 방문한 것이다
마땅한 길이 없어(나중에 안 정보로는 길이 있단다) 이 부도탑 옆으로 산을 헤쳐서 올라갔다
청룡사 대웅전이 보인다
소문으로는 인평대군의 큰아들 복녕군의 아들 의원군이란 소문이 있어 찾았는데 묘소 주인은 복평군 아들 완천도정 이엽이었다
복평군 이연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때 형 복선군(福善君)이 남인인 허견(許堅) 등의 추대로 역모를 하였다는 무고를 받게 되었는데, 고변서 중에 기록되어 있는 허새(許璽)·이덕주(李德周)·유성상(柳星相)·남언철(南彦哲)·이우인(李友仁)·유흘연(柳屹然) 등과 고변한 사람들을 함께 잡아서 국문한 결과 복평군·복창군(福昌君)도 연루되어 삼복(三福)이 역모죄로 유배, 사사되었다.
사실 역모와는 거리가 먼 소소한 모임들이었는데 숙종 초 남인의 힘에 의해 정국에서 쫓겨난 서인세력 및 그 세력 주축인 청풍김씨 김육의 후예 김석주와 현종비 명성왕후 등에 의해 무고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남인선비들을 싸그리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수 있었던 사건이 경신환국이다 서인들의 후세인 현재에도 역사에선 이 사건을 경신대출척이라고 서인들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지만 이는 자세히 알고보면 현재 대한민국 윤정권만큼이나 조작의 명수, 공작의 달인들이 벌였던 소인들의 정치행태였다
대개 모자란 인간들이 주변의 재능있는 사람을 몰아내곤 한다 칠서의 난으로 몰락당한 김제남파 같은 경우도 서자출신 7명 도적같은 놈들이 무슨 힘이 있어 영창대군을 옹립하겠는가? 그러나 그 사건으로 광해군 후반 나라가 개판이 되게 역모사건이 많았고 많은 사림이 죽었다 정철이 죽인 정여립의 난도 마찬가지이고 인성군 사건, 이 경신년 삼복의 역모사건도 마찬가지이다
효종 같은 생각있는 왕이었을 경우엔 그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효종 때에도 본인 의지와는 다르게 형 소현세자를 죽이고 등극한 효종이지만 동생 인평대군 역모사건을 서인들이 만들었어도 전혀 효종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오히려 처벌했다
그러나 숙종은 어려서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들이 많았으니 그 이후 누가 왕권을 잡을까 하는 추측의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까지도 그 험악한 고문과 물고로 원하는 답을 얻고자하는 이들에겐 사실이 되니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그래서 이루어진 역모사건이 조선시대는 많았다 바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반대파의 반인륜적, 비합법적 조작 정치에 의해서 말이다
결국 그들은 그래서 정권유지에 성공하고 조선후기를 그들 조직 마음껏 좌지우지하며 활개쳤으니 그들은 물 만난 물고기 시대였겠지만 그에 희생된 사림들 그리고 백성들은 지옥과 같은 나날이 된 것이 사실 아닌가?
어쨌든 이 묘지의 주인공도 그런 신세로 살다 이곳에 묻혀진 것이다 다행히 할아버지 인평대군을 잘 둔 덕분에...
사실 완천군 이엽도 영조 때 무신난의 후유증으로 고난을 겪다 죽었다 바로 무신난 다음에 일어난 심익연 사건에 의해서 말이다 그 사건으로 역적 종실로 낙인찍혀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인 복평군(복평군은 죄가 없다 나중에 신원된다)으로 인해 삶이 핍박당했는데 더욱 이 나라에서 살아갈 길이 끊기게 된다
다행히 이 사건도 영조 때 그 혐의가 풀리고 복관되긴 하였지만 후대에는 스쳐가는 역사이지만 그 시대에는 한 평생이 깜깜한 암흑천지였을 테니 당대 그 생명이 겪어야했을 삶을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역사사료에서 완천군 이엽의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그 후손 이진복의 사료만 조금 비칠 뿐이다
이진복(李鎭復)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심여(心汝).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이며, 복평군(福平君)이인(? 이연李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완천도정(完川都正) 이엽(李燁)이고, 아버지는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이며, 어머니는 임서(任緖)의 딸이다. 전흥부수(全興副守) 이염(李埝)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영조 3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차지한 다음 전시직부(直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가 급제하자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임금께 아뢰어 그의 증조부인 복평군 인(?연)의 관작(官爵)을 다시 복구시켰다. 복평군은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 허견(許堅) 등의 추대를 받아 역모를 한다는 무고를 받고, 복선군(福善君)·복창군(福昌君)과 함께 역모죄로 유배, 사사되었었다.
1768년 지평을 거쳐, 수찬·장령·부교리·헌납, 돈녕부도정·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87년 황력재자관(皇曆齎咨官)을 거쳐, 다음해 종성부사(鐘城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청나라 사람이 경원개시(慶源開市)로 가는 길에 종성에서 화재로 화물을 모두 태우는 일이 생기자 외국에 수치를 끼쳤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792년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역사적으로 한 인물의 파직당한 사실은 본인 잘못인지 주변 사람들의 인신공격으로 인한건지 판단할 수 있는 역사적 사고력을 기르고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비문 내용으로 보아 이 묘지는 아들인 전은군 이돈의 식과 서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다 위에 어제제문도 있는 것으로보아 복관된 뒤 세운 모양이다 어제가 영조 어제인지 정조 어제인지는 모르겠다
완천군 이엽의 묘소 아래 또 하나의 묘소가 있는데 그 주인은 누구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청룡사를 답사하고 점심식사를 하러 원조할매식당으로 들어가서 몇마디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 완천군의 후손이라는데 이 묘소의 주인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 하였다
묘비가 없으니 묘소 주인공도 알 길이 없다 그만큼 석물은 매장묘에서 중요한데 요즘 이 석물들이 오히려 환경을 해치는 지경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는 없다
요즘(최근 200년의 지구)엔 우리 호모 사피엔스만큼 이 지구에 해악을 끼치는 생명체가 없는 듯 하니 이런 경우에도 왈가왈부하기가 그렇다 다시 산을 내려와 청룡사를 처와 함께 탐방했다 그리고 바우덕이 사당을 돈 뒤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는 할머니집에서 표고버섯전과 비빔밥으로 했다 막걸리 한잔 걸치고 싶었으나 처가 운전을 못하겠다하여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유인촌, 이정섭 등 유명 인물들이 많이 방문했었나 보다 벽면에 홍보사진 및 싸인이 많이 붙어있다
좀 전 거론한대로 이 집 주인장은 완천군의 후손이란다 이제 어머니께서 연로하셔서 평소에 누님이 식당을 맡는데 오늘은 본인이 와 있단다 고등학교 때 기타에 필이 꽂혔었나 한쪽에서 기타를 연주하는데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마을의 오래된 고가인 이해룡 고가 주인장도 이 집의 집안 어른이시란다 어렸을 적 청룡리 저수지가 없었을 때 물이 깨끗해 그 안에서 잡아먹었던 붕어맛이 일품이었단 이야기도 들었다 붕어도 물이 좋으면 훨씬 건강하여 맛도 좋다고...
식사후 마을로 들어서니 오래된 교회도 보인다 현재 사용을 하지 않는지 검불들로 집안이 꽉 들이차 있다
옆엔 이해룡 고가가 있다
이해룡 고가는 서운면 청룡길에 있는 고가로 경기문화재자료 제79호에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의 제일 남쪽 끝인 차령산맥 줄기의 산간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후기 주택이다. 마을은 서운산의 남쪽 계곡에 계곡물을 앞에 두고 약간 경사진 곳에 작은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의 제일 뒷쪽 약간 높은 곳에 집이 놓여 있고 집 뒤로는 경사진 언덕이 시작된다. 2000년에 완전 멸실되었으나, 2006년 11월에 복원하였다.
집은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소위 튼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 앞으로 약간의 빈 터가 있고 집뒤 한 단 높은 대지에는 전에 후원을 꾸민 흔적이 남아 있다.
안채 마루도리에 적힌 상량문에 가경(嘉慶)2년 즉 정조21(1797)년에 집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안채나 사랑채는 처음 지어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안채는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 2칸이 옆으로 이어지고 그 앞으로 부엌 2칸이 이어져 소위 곱은자집을 이루며 대청 좌측에는 건너방 1칸이 있다. 건너방 앞의 툇마루는 대청보다 한 단 높게 꾸미고 그 아래로 방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내었다.
이해룡은 조선 중기 서예가로 자는 해수, 호는 북악(北嶽). 본관은 경주(慶州)란다.
아까 할매집 주인장 말로 집안 이라했으면 전주이씨일텐데 이 정보는 다르네? 나중에 전주이씨에게로 넘어온 것인가? 외가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1588년(선조 21) 사자관(寫字官)으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필적(筆蹟)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는 역관(譯官)으로 일본과의 화의교섭에 힘썼다. 95년 동지중추부사, 1602년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에 이르렀고 경천군(慶川君)에 봉해졌다.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당시의 대가들로부터 한석봉(韓石峰)에 필적하는 명필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금석문으로 사현(沙峴)의 양호묘비(楊鎬墓碑)를 썼다.
사랑채는 건너방과 이어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ㅡ자형을 이룬다. 우측으로 2칸은 방이고 나머지 끝에 1칸이 마루가 되어 이 마루에서 뒤로 간채 건너방이 연결되며 앞에는 툇마루가 방과 마루를 이어준다. 방의 창문은 머름을 댄 띠살창으로 가공이 정교하다. 사랑채 우측으로 중문이 옆으로 이어지면서 행랑채가 되어 집의 앞쪽을 감싸도록 되어 있으나 행랑채 부분은 근래 벽돌조로 개조되었다.
집 뒤 언덕의 후원에는 자연석이 군데군데 놓이고 약간의 평지를 이루어 자연스런 맛을 남기고 있다.
고가에서 나와 먼 산을 보니 문인석이 있는 묘소가 또 있어 가 보았다 주인공 정보를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해 사진만 올린다
제주고씨인데 오래된 비석주인 고익태는 아예 정보가 없고 위의 고한정은 명종 때 인물로 몇 줄 나오는데 동명이인인지 모르겠다
이해룡 고가에서 나오면서 문인석을 보고 산길로 올랐더니 산속에서 이슬을 뒤집어쓴채 우리를 보고 반가워 쫄랑쫄랑 따라다니는 강아지 한마리,
산속에서 하룻밤 굶었으리 생각해 그나마 있는 초코파이를 떼어주고 쫓으니 경계 반 반가움 반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와 떼어놓질 못하겠다
다행히 그 다음 마을길에서 헤어졌다 귀여워도 데려가 키우질 못하니 짐이다 다행히 빨리 어미를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