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위원회가 인도해 준 진실의 증언
KBS의 협력과 더불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를 통해 두 분 생존자뿐만 아니라 다른 한 명의 생존자 증언을 청취할 수 있도록 섭외해준 것은 전은옥 씨('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기념관' 객원연구원)와 이대수 씨('한일100년 평화시민네트워크' 운영위원장)였습니다. 이 세 명의 생존자는 이미 조사위원회에서 조사가 완료되어 지원금을 받고 있었는데, 이분들 진술청취를 위해 협력해 주신 조사위원회에는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월 2일에는 조사위원회에서 허광무, 정혜경 두 선생님과 재회할 수 있어서 감개무량하였습니다. 두 분이 나가사키를 방문하여 섬과 오지의 탄광터를 조사하던 때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세 분 생존자들은 강제연행 경위부터 시작하여, 하시마에서의 강제노동과 해방 전후 사정까지 솔직하고 진지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일부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목포하고 정읍에서 수영 꽤나 하는 사람들이 통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려 했다. 그런데 도중에 지쳐버려서 잡히거나 육지에 당도하여 잡히거나 했는데, 고무 튜브로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매질을 당했다.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우리들 눈앞에서 지독하게 고문을 당했다. 67호동이 있던 당시 빈터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대략 11명 정도였는데 투옥이 되었던 모양인지 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생사의 기로에 세워져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었으며, 형무소에 갇혀있던 것과 매한가지였다.”(최장섭 씨)
“숙소는 9층짜리 건물의 제일 아래층으로 늘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며, 파도가 심하게 쳐서 제방을 넘어버리면 숙소까지 바닷물이 치고들어와 자는 사이에 다다미 위에 있던 옷가지들이 젖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쌀은 절반도 들어 있지 않았고 주로 콩깻묵을 섞은 밥이었다. 그것도 양이 모자라서 늘 배가 고팠다. 회사가 운영하는 식당은 정해진 식사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술집이나 일반식당에 갈 수도 없었다. 월급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상, 박준구 씨)
“하루 2교대 12시간 노동이었다. 낮에는 어떡하든 하는데, 밤에는 졸려서 다치는 사람도 많았다. 나도 손가락을 부상당해 지금도 이처럼 똑바로 펼 수가 없다.” “인생의 낙이 자유 아닌가. 자유가 하나도 없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징역같은 생활을 강요당하던 섬에 누가 남고 싶어 하겠는가. 회사는 우리를 귀국시킬 준비도 하나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야미배'를 타고 귀국했던 것이다. 거지 모양을 해 갖고는…”(이상, 전영식 씨)
그리고 세 사람 모두 원폭 후 나가사키 시가지의 청소작업을 명령받아 입시(入市)하였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저희들로서는 처음 듣는 전혀 새로운 사실로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장도 건물도 힘없이 무너져 있었다. 주재소도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홀랑 타버린 인간의 시체가 무수히 있었다. 말 시체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목격하였다. 시체를 잘못하여 밟기라도 하면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서지는 상태였다.”(박준구 씨)
최장섭 씨는 나가사키 초빙을 흔쾌히 허락해 주시어 나가사키 시민앞에서 그리고 하시마 현지에서 증언해 주셨습니다(금년 2월). 지금까지 서정우 씨 증언밖에 알지 못했던 저희들은 이번 세 명의 증언으로 더욱 확실해진 하시마의 진상을 반드시 신간에 기록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