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하지만, 빛만 가지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명암의 조화, 그 어느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사진가의 색깔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설교도 그렇다.
성경의 문자만 가지고 설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신학도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성경과 인문학과 삶의 그 어느 절묘한 지점에서 나온다.
나는 그것을 '그늘'이라고 한다.
"저 설교에는 그늘이 없어!"라는 말은 설교자에 대한 모독인데,
사실 그런 설교에 익숙해진 이들은 '그늘 있는 설교'를 싫어한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를 읽다가 말에 대한 글을 읽었다.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말.
말의 잎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
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 있지 않은 말을
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박노해)
나는 이 글을 차용해서 이런 글을 썼다.
뿌리에 그늘이 없는 설교
잎새에 눈물이 없는 설교
꽃잎에 향기가 없는 설교
열매에 사랑이 없는 설교
그런 설교를 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김민수)
오늘 새벽예배에서는 누가복음 7장을 묵상했다.
사람들은(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세례요한과 예수를 배척하던 이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과 가죽 옷을 입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자 '귀신 들렸다!'고 하더니만,
예수가 제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어울러 틈만 나면 먹고 마시니 '마구 먹어대는 자!'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어차피, 그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반대할 구실만 찾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누리던 권력(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고 싶은 대로 들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 형틀로 보내는데 성공을 할 것이다.
자신들의 '편향확증'을 진리수호라 착각하며.
그러나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는(눅 7:35) 시간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