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사화(甲子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조선 국왕 연산군의 친어머니인 윤씨의 폐비(廢妃)·사사(賜死) 문제로 인해 관련된 훈구파와 사림파가 화를 당한 사건이다.
사림파가 화를 입었다는 뜻의 사화라는 명칭처럼 사림의 피해야 당연히 있었지만, 훈구파도 무사하지는 못해서, 윤필상, 이세좌, 이극균, 성준 등 화를 당한 사람들이 많고, 부관참시를 당한 한명회, 한치형, 정창손, 심회 등도 역시 훈구파이다.
즉, 갑자사화는 연산군 특유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드러내며 사림, 훈구 가릴 것 없이 신하들을 싹 쓸어버린 숙청으로, 연산군 기획, 각본, 주연으로 벌인 친위 쿠데타의 결정체라 할 법한 사건이다. 아울러 갑자사화가 일어난 뒤로 연산군의 타락이 가속되었다.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왕이 사치나 방탕함을 크게 내보이진 않았으며, 소극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신하들도 왕이 비행을 저지른다 싶으면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무오사화로 삼사의 왕권 견제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갑자사화까지 겹치자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사라졌고, 신하들은 왕의 막장정치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갑자사화 때 숙청당한 훈구 대신들은 계유정난으로 인해 일어났던 단종의 폐위, 그리고 단종의 비참한 죽음에 일조했던 자들이기도 했다. 성공한 쿠데타를 했을 뿐, 왕실을 능멸한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연산군의 왕권 극대화 작업의 마무리였던 갑자사화에 휘말려 숙청을 당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자사화의 구체적인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숙의윤씨)의 복위문제였다.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성종은 1479년(성종 10년) 폐비하고 다음해 사사(賜死)하였다. 이 후 왕과 재상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이 임사홍에 의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특지(特旨)의 형식으로 임사홍(任士洪)에 대한 임용과 봉군(封君) 조치가 이루어졌다. 언론 기관인 삼사(三司), 즉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논박에 의해 무오사화 직전 두 차례나 임사홍의 가자(加資)를 빼앗았던 정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상이었다. 이후로는 흔히 궁금(宮禁)으로 일컬어지는 척신 세력이 대간(臺諫)·홍문관의 별다른 논박 없이 등용되었다. 그리고 능상 또는 불경죄를 빌미로 한 신료들의 탄압은 예조 판서 이세좌(李世佐)와 경기관찰사 홍귀달(洪貴達)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예조 판서 이세좌의 불경죄는 양로연(養老宴)에서 왕이 내린 어사주(御賜酒)를 엎질렀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경기관찰사 홍귀달의 불경죄는 연산군이 왕자의 빈(嬪)을 간택할 때 그의 손녀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입궐(入闕)시키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이세좌는 몇 차례 유배지를 옮기다가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담당 승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사(賜死)되었다. 또한 홍귀달은 유배된 뒤 갑자사화의 여파가 계속되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1504년 연산군은 전교(傳敎)를 통해, 지금까지의 중요 정사를 담당해 온 기존의 대신과 새로 재상이 된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서로 비호하면서 붕당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불경한 자에 대한 대간의 논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군주가 고립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능상의 풍조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13일). 주목할 만한 것은 능상의 풍조를 조성한 중심 세력을 신·구 재상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붕당의 형세를 이루고 있다고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래 그와 더불어 정치 운영을 주도해 온 재상들을 이 시기에 이르러 붕당을 형성하여 능상을 조장한 중심 세력으로 간주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붕당 혁파를 위해 또 다른 형태의 사화가 준비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대간이 이세좌 등의 불경을 제대로 논박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곧바로 당시의 대간과 홍문관원에 대한 논죄로 이어졌다. 불경죄를 전제로 한 대간·홍문관원에 대한 논죄였으나, 연산군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논계 여부 자체가 결정되었다. 즉, 삼사의 언론이 연산군의 의도대로 행사되고 있었다. 이러한 능상과 불경 풍조의 혁파 과정이 이른바 갑자사화였다.
갑자사화는 이러한 일련의 정치 상황이 중첩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는 연산군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 문제를 둘러싸고 1504년 3월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 전개 양상은 한편으로 폐비 윤씨에 대한 추숭(追崇)과,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폐위 과정에 관여한 신료들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났다. 즉 연산군은 20년 만에 알게 된 생모의 비극에 대한 원통함을 푼다는 이유로 여기에 관련된 모든 신료들을 논죄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연루자의 범위가 그만큼 넓었고 피화의 실상이 유례없이 참혹하였다.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통해 신료들을 이와 같이 탄압해 갔지만 실제로는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의 전말을 즉위 직후부터 알고 있었다.
사화로 인해 가장 먼저 화를 당한 인물은 폐비·사사 당시의 재상을 비롯한 승지·주서·사관·언서번역자(諺書飜譯者), 성종의 후궁인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이들의 아들인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 폐비 윤씨의 추봉존숭(追封尊崇)을 반대한 언관 등이었다. 언관 권달수(權達手)는 처형하고 이행(李荇)은 유배 하였으며 또한 윤씨 사사에 찬성한 윤필상(尹弼商), 영의정 성준(成俊), 좌의정 이극균(李克均)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이 시기까지 연산군대의 정치 운영에 영향력이 지대했던 훈구 재상들도 사형 하였다.
갑자사화로 화를 당한 범위는 이미 무오사화로 처벌을 받은 인물에까지 확대되었다. 1504년 9월, 김굉필(金宏弼) 등 유배된 무오사화 피화인에게 벌을 더하여 참형(斬刑) 또는 중도부처(中途付處)에 처하였다. 이로 인해 강백진(康伯珍)·김굉필·성중엄(成重淹)·강겸(姜謙)·최부(崔溥)·이원(李黿) 등이 피화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9월 26일).
뒤이어 이미 사망한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어세겸, 심회, 이파,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지고 한치형은 무려 부관능지를 당했다. 이들은 훈구 재상들을 거의 망라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헌왕후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가 광주 이씨라는 이유로 이극균 등 광주 이씨들도 상당수 쓸려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대신 성준도 폐비와 관련된 익명서를 바쳤다는 게 발각되어 목이 날아갔고 집안이 박살났다.
이외에 홍귀달,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이원, 신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위,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들은 대다수가 사림이었다.
이미 죽은 대신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남은 가족들도 대부분 사사당하는 피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더불어 죽은 대신들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도 처벌받아 이장곤, 이윤검 등이 처벌받았고 이극균과의 친분이 있다 하여 유자광과 임사홍도 참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둘은 왕의 명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 귀양길을 정말로 떠날 뻔했지만 왕이 명령을 거두고 넘어갔다.
여기에 이세좌 등 이미 벌을 받고 자진하거나 사사된 이들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능지하거나, 아예 뼛가루로 갈아버린 다음 바람에 날려버렸다고 한다. 특히 왕이 '갑자 6간신'이라 명한 이세좌, 윤필상, 성준, 이극균, 한치형, 남효온의 집은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물을 채워 연못으로 만들거나 일부 대신들에게 분배하였다.
무오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약 51명이었고 그 중 6명만 처형됐지만,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은 무오사화 때보다 약 4배가 넘는 239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122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관참시, 부관능지를 당했다고 한다. 갑자사화 때 처벌받은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사후 처형을 당한 것이다.
이 갑자사화 때는 사림파보다 훈구파들이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머릿수로만 따지면 삼사를 주도한 사림파가 더 많긴 한데 질적인 피해로 따지면 훈구파들이 입은 타격이 더 컸다. 갑자사화 후반기에 무오사화의 생존자들을 죄다 죽이라고 해서 사림의 희생이 커졌고 훈구 대신들이 전부 왕에 의해 사사당하고 가문도 멸문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말 사육신 사건 때보다도 훨씬 더 처참하고 잔혹했으며 농담이 아니고 8촌까지 싸그리 말살당한 집안도 있다.
이와 같이 갑자사화와 관련된 신료의 처벌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폐비 윤씨의 원통함을 갚는다고 하여 피화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고 피화인도 무오사화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를 계기로 신·구 재상을 축출하여 명실상부한 연산군의 친위 체제가 구축되었다. 군신 권력 관계의 파탄을 통해 극단적인 폭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갑자사화 이후 무엇보다도 『경국대전』 체제의 개정과 변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변통이라기보다는 변칙적인 법 운용이었다. 연산군은 한 시대의 제도는 시의(時宜)에 맞추어 고쳐야 한다는 적극적인 체제 변통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입장이 갑자사화 이후 정치 운영의 기본 전제가 되면서 무엇보다 언관의 언론 기능을 대대적으로 축소했다.
마침내 연산군은 사림파와 훈구파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전무후무한 절대 권력을 거머쥐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왕이 그 절대 권력을 쥐게 되자 해야 될 나랏일은 안 하고 사치와 향락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본인이 해야할 업무는 내팽개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내정은 피폐해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연산군 본인도 중종반정이라는 파멸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 갑자사화의 의령남씨 선조
- 남효온(南孝溫) :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0세
- 남충세(南忠世) : 충경공 직제학공 감찰공파 10세
- 남곤(南袞) : 사천백공 사간공파 7세
<참고문헌>
의령남씨 족보
나무위키- 갑자사화
위키실록 사전-남효온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사마방목(司馬榜目)
금릉집(金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