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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전을 헐라
본문<요2:12~25>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이 세 파트로 나누어진다. 12절과, 13절~22절, 그리고 23~25절까지다.
우선 첫 번째 파트인 12절을 보자. 12절은 별 내용도 없는 것 같은데 기록이 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냥 의미 없이 기록된 게 있을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아마도 어느 구절을 보고, 이건 없어도 되는데, 이게 왜 기록되어 있지?라고 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 가려져 있을 뿐이지 의미 없이 기록된 건 없다. 오히려 너무도 크고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안보이니 가볍게 여겨지는 경우일 것이다. 12절이 그와 같다. 이건 그냥 지나쳐도 아무 상관없는 구절일 것 같아 보이는 부분이지만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창1장의 6일 창조와 요한복음에서 6동안의 주님의 사역의 흐름을 비교하면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은 같은 내용을 말씀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특히 창1장의 6째 날에 ㅎ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내용은 요한복음의 6째날에 가나 혼인잔치에서 주님이 좋은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과 일치시키고 있다.
6개의 빈 돌항아리는 헛된 유대교의 종교의식과 율법행위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온전한 혼인이 되지 못하여 파행으로 끝나지만, 주님의 십자가 피로 주어지는 참된 구원이야말로 참 행복을 주는 온전한 혼인이라는 메시지가 좋은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으로 비유된 것으로, 바로 그 혼인이 예수님과 아내된 교회의 혼인을 예표하는 모형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렇듯 ㅎ님의 궁극적인 구원이란 ㅎ님과 사람의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12절은 역시 창세기의 7째날의 내용과 부합한 것일 것이다. <창2:1~3> 읽고,
2장 1절의 천지는 새하늘과 새땅이다. (이미 1장에서 처음 하늘, 처음 땅이 만들어 졌으니까) 그리고 만물은 삼라만상 물질이 아니라 사람을 뜻한다. 원어로 쩨바(만군)이다. ㅎ님의 군대, 군사가 창조된 것이다(참조: 겔37장 에스겔 골짜기 마른 뼈들이 ㅎ님의 생기가 들어가니 ㅎ님의 큰 군대가 됨/ㅎ님의 백성을 군대라고 표현함.-가나안 족속과 싸우는 자들. 여호수아는 군대장관-즉 예수가 군대장관, 성도는 군사들)
이 날이 7째 날이다. 7(세바)의 의미는 맹세, 언약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ㅎ님의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ㅎ님의 자녀로의 창조가 끝났다. 그래서 이 날에 안식하는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7째 날인 토요일이라든지 일요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ㅎ님의 언약이신 IX안에서의 안식을 말한다.
고후5.17절( IX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새것이 되었도다/새하늘과 새 땅..)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창조되었나?(IX 십자가 대속과 성령의 사역으로- 이 창조의 과정을 여섯날로 표현함) -여기에 인간의 힘과 노력은 전혀 가미되지 않았다. ㅎ님 홀로 하신 것이다.
(중점 체크) 성도의 구원은 3째날인가? 6째 날인가? 아니면 다른 날이 또 있나?
롬6장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세례받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2천년 전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주님 홀로 겪으신 일이 아니었다. 우리를 껴안고 같이 죽고 같이 장사되고 같이 부활 했다. 그래서 고전 10장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 세례를 받았는데, 모세에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즉 모세가 껴안고 홍해라는 죽음을 통과하여 광야로 나오는 부활을 한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말이다(모세:IX의 모형, 예표)
=> 이처럼 성도의 구원은 이미 주님의 부활 때에 성취된 것이다(3째날에)
그러나 이것을 언제 알게 되는가? 성령이 내게 오셔야 알게 된다. 아하, 2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이 죽고 부활 하실 때, 나도 같이 죽고 부활 했구나를 알게 됨(이게 6째 날임)
그런데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 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이게 믿어지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점차 성경을 통해 ㅎ님에 대한 진리지식이 더해질 때 어느 날 믿어진다. 이 때가 바로 거듭나는 때이다. 그러므로 아직 안 믿어진다고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실 더 근원적인 것은 창세전부터 ㅎ님의 택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행13장에서는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라고 한다. 이들에게 복음이 들려질 때 결국은 믿게 되는 것이니, 이미 창세전부터 구원이 확정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말이다. 이게 성도의 놀라운 신분이다. 택함받은 자는 아무리 예수 믿지 않으려 해도 안된다. 지옥가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ㅎ님의 자녀는 ㅎ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내가 야곱은 사랑~,에서는 미워~/선악을 행함전)
주와 함께 부활한 자를 엡2장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이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사단의 권세를 따라 살던 진노의 자식이었지만, 주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고~’ 이게 새로운 피조물의 위치이다. 비록 몸은 역사에 살고 있지만 묵시 속에서는 하늘에 있는 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다. 그 어떤 것도 IX안에 있는 ㅎ님의 사랑에서 성도를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게 7째 날에 있는 우리의 신분이며 영적인 위치이다. 이것을 본문 12절에서는 가버나움이라고 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집’이라는 말이다.- 즉 ㅎ님나라 천국을 상징한다.
12절 읽고( 그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이것은 가나의 혼인잔치, 즉 그리스도의 피로 한 영이 된 교회(혼인으로 묘사함)가 하늘에 앉혀진 것을 의미한다. 하늘은 영원한 안식과 평강의 상태인 천국을 비유한다. 이것을 가버나음이라고 표현했다(받을 분만 받으시라).
그래서 계21장에서 어린양의 신부인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고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고(기록). 이처럼 진정한 위로는 장차 천국에서 이루어지겠지만 역사 속에서는 IX안에 있는 것이 참 안식이고 평강이다. 이를 가버나움이라고 표현했다. 위로가 넘치는 ㅎ님 나라에 이미 진입해 있다는 말이다.(주님도,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면 ㅎ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 말씀하심)
12절에서 말하는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누구인가? IX의 십자가 피로 낳아진 새로운 가족이다. 하늘의 백성들이다. 주님도 ㅎ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모친이고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다. 여기서 ㅎ님 뜻대로 행한다는 말은 IX를 믿는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갈4장에서도 아브라함의 두 아내 하갈과 사라는 비유로서, 하갈은 율법 종교의 터전인 땅의 예루살렘이고 사라는 하늘의 예루살렘 성인 자유자요 우리 어머니라고 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하늘에 앉혀졌음을 재삼 밝히는 말씀이다.
이렇게 12절까지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피로 구원을 성취하시는 IX의 사역을 압축하여 미리 보여주시는 청사진과 같다(이것을 창1장의 7날의 창조로, 그리고 요한복음의 7날로 표현한 것이다) 7을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ㅎ님의 언약의 완성을 뜻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의 현장으로 가셔야 하기에 가버나움에 여러 날 계시지 아니했다고 부연한 것이다.(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개념이다.)
이처럼 6일 창조와 7일 안식으로 보여주는 성도의 구원은 오직 IX에 의해 이루어져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행한 그 어떤 공로도 첨가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고 나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야 이해가 연결된다. 그러나 종교와 율법으로 ㅎ님을 섬기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ㅎ님을 섬김으로 구원을 얻고 복을 받으려고 몸부림친다.
그렇기에 주님은 시작부터 이같은 사람의 행함이 중심이 된 율법종교 체계를 부정하고 깨뜨리는 사역을 하시는 장면이 이어진다. <요2:13~17>절까지 우선 읽고,
오늘 본문 2번째 파트는 주님에 의한 성전정화 사건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성전 정화 사건이 두 번 있었다.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주간에 한 번 더 성전정화 하는 일을 하셨다. 예수님의 사역 시작과 끝이 모두 성전 정화 사건이었다는 것인데, 그만큼 성전의 본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 예수님께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이라 말할 수 있다. 신앙생활의 모든 것이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 믿느냐?는 질문보다는 교회 다니느냐? 그리고 어느 교회 다니느냐?는 질문만이 존재한다.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이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천년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 역시 동일했다. 성전중심의 신앙생활이 유대인들에게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관이 과연 성경적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러한 신앙관을 철저히 부정하셨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보자.))
13절을 보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라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3대 큰 명절이 있다. 봄 절기(유월절), 여름~(맥추절, 혹은 오순절), 가을~(초막절)이다. 이 3절기에는 유대인의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은 세상 어디에 있든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이 절기를 지켜야 했다(신16:16-17). 그 중에서도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다.
주님이 성전 안에 들어갔을 때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보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노끈을 구해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들을 내쫓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다. 이를 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가장 놀랐던 자들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분이 죽으려고 환장하셨나?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성전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높이 받드는 성역이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토록 분노하셨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 쫓으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외치셨다. 예수님은 성전인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분노하신 것이다. 즉 성전을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목사직을 생계의 수단인 직업으로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시,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장사하는 자들이 가득했던 것은 그들의 종교적 필요에 의해서였다. 제물을 드릴 때 율법을 따라 반드시 흠이 없는 제물로 드려야 했다(레1:2-3, 3:1, 4:3). 결국 먼 타지에서 오는 사람들이나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흠 없는 제물을 파는 일은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20세 이상 남자는 유대 화폐인 ‘세겔’로 성전세를 내야 했기 때문에(출30:13), 부정한 로마 화폐를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등장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이 일들이 자연스럽게 제사장들에게 막대한 수입원의 수단이 되었다. 돈이 개입되는 순간 본질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돈의 힘 앞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돈이 신이고 하나님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드는 인파는 대략 100반명~150만명이고 이때 드려진 양의 수가 25만 마리나 되었다고 한다. 제사장들에게 유월절 절기는 한몫 챙길 수 있는 날이었다.
그 결과 제사장들과 짐승을 파는 상인들, 환전상의 카르텔이 형성되었고 성전에서 파는 제물이 몇 배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같은 현상이 매 절기 때마다 벌어진 것이다. 이같이 유월절은 제사장들이 한몫을 챙기는 년 중 행사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들에게 성전은 장사하는 기업이었다.(오늘날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도..대박치는 날)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배우는 곳이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종교 행사로 가득할 뿐이다. 설교시간은 길어야 20분 안팍이고 나머지는 종교 의식과 문화 행사로 변질되었다. 설교가 짧을수록 인기 있는 목사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고, 그마저 짧은 설교의 내용은 ‘착한 사람되자, 좋은 사람되자’라는 윤리 도덕적 교훈으로 도배된다. 십자가지신 예수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진리가 실종된 설교와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래서 큰 성 바벨론이라고 성경은 고발한다. 거기는 벧엘(성전)이 아니라 벧아웬 음녀교회요 사단의 교회라는 말이다.
초대교회 모습을 행20:7-9에서 엿볼 수 있다. 바울이 말씀을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했다. 이때 유두고라는 한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잠에 빠졌다. 바울은 강론을 중단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 유두고가 창가에서 그만 떨어져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세상에 뺏긴 것을 창문에 걸터앉았다고 묘사한 것이고, 그러면 필히 사망에 이르다는 메시지이다. 아뭏든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짧게 할 수가 없다. 설교들을 때에 계속 마음이 세상에 가 있거나, 길어진다고 투정을 부리는 자는 처음부터 교회에 오지를 말아야 한다. ㅎ님은 그런 자들이 오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선악과를 따 먹고 피조물의 자리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기 영광, 자기 행복을 구하는 삶을 선택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정해진 육신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저주의 세계인 지옥으로 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끔찍한 저주 아래 놓여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 계획을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계시해 주신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주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성전 제사이다.
성전은 죄인들이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곳이다. 죄사함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자신이 준비한 흠 없는 어린 양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그 양에 전가한 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 양을 죽여야 했다. 그 어린 양의 피를 제사장이 받아 제단에 뿌림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ㅎ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성전 관리를 맡기신 이유는 IX의 모형인 짐승의 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돈벌이에 눈이 멀어 유월절 절기를 종교행사, 문화 행사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성전을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실종되어 버렸다.
오직 흠 없는 어린 양을 비싼 값에 팔아 자신들의 수익을 채우고 있는 제사장들의 욕심의 악취만만 가득할 뿐이었다. 죄인들을 자기 아들의 피로 속죄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향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채찍이 등장했던 것이다.
(렘7장 4절에서도) 예레미아 선지자가 성전문을 막아서면서 외친다.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 ~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전 약 500년 전에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때 이미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수님처럼 바른 말 하다가 핍박을 받고 죽임 당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율법종교를 부수고 파귀하고 넘어지게 하고 복음을 새로 건축한다고 말한다.
(렘1:9-10)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한국 교회는 헌금을 많이 드리기로 유명하다(120여개?). 이렇게 많은 헌금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헌금이 자기 의를 쌓고 복을 받는 신령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목사들이 이것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통로가 헌금이라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헌금이 복 받는 수단이라는 것을 틈틈이 설교한다. 이러한 목사들이 예수님 당시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 놓은 제사장들과 같은 부류들이다.
오늘날 목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교회성장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구호이다. 성경에도 없는 교리를 만들어 스스로 목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목회는 ㅎ님과 상관없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장사 기술일 뿐이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러 모아 교회에 정착하게 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복음을 팔아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이다. 오늘날 목사들에게 교인은 돈으로 보일 뿐이다. 교회부흥, 교회성장이라는 명목으로 교인들에게 돈을 거두는 것을 보면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십일조, 주일 헌금, 건축 헌금, 장학 헌금, 선교 헌금, 구제 헌금, 차량구입헌금, 결혼헌금, 장례헌금, 입학헌금, 졸업헌금, 취업헌금, 심방헌금, 성령체험헌금, 일천번제헌금, 출산헌금, 생일헌금…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는 것이 한국 교회이다. 평생 이렇게 헌금한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 교회에서 태어나 그 교회에서 결혼하고 그 교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목회의 본질은 장사이다. 이를 흔히 마켓팅이라고 말한다. 목회의 기술은 세상 기업의 마켓팅 기법과 학문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목회는 수익과 성장을 추구하는 장사와 본질을 같이 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복 개념이고 상급 개념이다. 구원은 예수 믿으면 받는 것이지만, 상급은 행한대로 받는다고 부추긴다. 그래서 복과 상급에 목마른 신자들을 꼬드겨서 온갖 경쟁구도를 만들어 목사의 종으로 부려먹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이미 복을 받은 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이다. 복과 상급은 천국 백성되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이다. 복을 팔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주님의 채찍뿐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종교인들이 열심히 복을 구하며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복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들이 비진리인 것을 성령을 통해 알게 되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다. 결국 성도는 ㅎ님의 긍휼과 은혜를 아는 자들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이다.
17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채찍을 들고 성전을 뒤집고 있는 예수를 본 제자들에게 예수의 모습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삼킴을 당하는 모습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한 교회와 목사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들이다.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진리를 사수하는 일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ㅎ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불의와 타협할 수가 없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들이 2천년 교회사에 등장한 적이 있다. 500년 전 천하를 호령하던 천주교에 맞서 복음을 붙들고 일어났던 종교 개혁자들이다. 이들은 천년 동안 가려져 있던 복음의 실체에 눈이 열렸던 자들이다. 복음에 눈이 열리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자들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기존 종교체제에 의해 미움을 받고 순교를 당해야 했다.
사도 바울이 복음에 눈이 열렸을 때 그도 역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삼킴을 당하는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복음을 알기 전에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복음에 눈이 열리게 되자, 그는 기존 종교체제인 유대교의 실체를 폭로하는 싸움이 그의 주업이 되었다. 이를 통해 거짓 종교체제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택한 양들이 복음을 알게 되어 유대교에서 나오게 되고,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고난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했던 것이다.
우리들도 복음에 눈이 열리게 될 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삼키움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 교회를 진리 위에 세우고자 하는 선한 싸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힘과 세력을 갖고 있는 기존 종교세력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다(벧전2:21). 이 길이 복음에 부름 받은 교회가 가야 할 길이다(계20장-첫째부활/ㅎ님 말씀과 IX의 증거로 목베임 받은 순교자). 복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일이다. 성경공부는 결코 지식을 알아가는 재미난 일이 아니다. 선한 싸움으로의 부르심이고, 고난이 예정된길이다.
<2:18-22절>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러한 일을 지켜본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표적을 요구한다(18절). 즉 예수에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신적 권위를 보여달라고 한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안에 다시 일으키리라”라고 답하신다(19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안에 일으키겠는거냐? 라고 반박한다. 예수를 정신 나간 자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21절).
성전은 죄 문제가 해결되는 곳이다. 즉 예수의 육체가 성전이라는 말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요14: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께 온다는 것은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예수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말은, 예수 말고는 어느 누구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던 성전의 실체가 그들의 눈 앞에 등장한 것인데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실체로 오신 예수를 알아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러한 은혜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끝까지 성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참 성전인 예수를 밀어내고 그림자 성전을 붙든 결과 그들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채, 그저 종교행위만 열심히 행하다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성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로 하신 것처럼, 예배당을 성전으로 여기며 교회성장을 위하여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은 “이 성전을 헐라”는 동일한 말씀이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을 기뻐하실 뿐이다. 즉 ㅎ님의 관심은 자신의 아들 한분뿐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3번째 파트 23~25절 읽고,
주님이 모든 사람을 아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인간의 정체성이 죄인이라는 말이다. 죄인은 마귀에게 부속된 죄의 종들이다. 겉으로 사람이 보기에 고상하고 반듯하고 선한 일을 한다 해도 결국은 자기사랑에서 출발한 탐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성경은 이런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말한다(롬6:17 …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의 종된 인간은 자기 사랑의 노예로 살아간다. 예수님이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셨던 이유 역시 ‘자기 사랑’을 위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자들의 믿음이 이러한 자기 사랑에 기인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이 선물로 부어주신 믿음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기 사랑에서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눈만 뜨면 자기 사랑, 자기 행복을 위해 내 몸을 불태우고 있다. 이러한 탐심에서 유발된 자기믿음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신앙행위와 열심, 선행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내 생각, 내 계획 모두가 언제나 악임을 알아야한다.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찬송하며 봉사하며 십일조 드리며 신앙생활 하는 것 모두 악임을 알아야 한다. 탐심에서 비롯된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죄를 향한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우리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서는 죄만 나오는, 죄로 죽은 자임을 깨닫고 자신은 ㅎ님의 은혜 아니면 살수 없음을 고백하며, 오직 ㅎ님의 은혜와 긍휼을 소망하는 자들을 ㅎ님은 찾으시는 것이다.
사람의 속에 무엇이 가득한 지 보는 눈이 열릴 때, 내 자랑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고백만 나오게 된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고 영생얻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주님은 이들을 위해 죽으셨고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사 ㅎ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오늘 우리가 세속화된 기독교인 큰 성 바벨론에서 빠져나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 은혜의 복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ㅎ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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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