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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2
창세기 1장 26-28절 [4장 2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4장은 창조에 대한 고백입니다. 전체 두 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1항은 모든 만물에 대한 창조를 고백합니다. 창조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첫 진술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그러면서 이후 창조의 대략을 설명하는데, 창세기 1장 자체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그의 영원한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창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있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없었고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과 거기 속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6일 동안 창조하시기를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창조하신 모든 만물은 적어도 6일 창조 동안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 악이라고는 전혀 있지 않는 매우 선한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런 만물 창조 안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 천사도 포함되지만, 모든 만물을 지으신 후 사람을 창조하신 것도 포함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2항에서 인간 창조에 대하여 고백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창1:26, 골3:10, 엡4:24)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창2:7, 전12:7, 눅23:43, 마10:28)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창1:27).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롬2:14,15) 그것을 이룰 능력을 지니게 하셨으나(전7:29), 범죄의 가능성 아래, 변화에 종속된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놔두셨습니다(창3:6, 전7:29).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이 법 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창2:17, 3:8-11,23). 그것을 그들이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행복했었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졌었습니다(창1:26,28).
2항은 이번 주와 다음 주까지 해서 살펴보겠는데, 먼저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1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과 거기 속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여기에는 사람도 들어가 있지만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늦게, 가장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창조의 질서로 처음 3일은 배경을, 다음 3일은 배경에 있게 하시는 것들을 만드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질서 가운데 배경으로 있는 것들은 무엇을 위한 것으로 있느냐 할 때 배경에 있게 하신 것들을 위해 지으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04편에 보면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시104:16-18)고 말씀하십니다. 새들을 위해 나무를 지으셨고, 산양을 위해 높은 산을 만드셨으며, 너구리의 피난처로 바위를 만드셨습니다. 같은 원리로 앞서 지은 모든 것들은 누구를 위하여 있게 하신 것들인가? 결국 사람을 위하여 있게 하신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 자체로 모든 만물의 으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신 내용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신앙고백서 맨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에서 우리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처음부터 하나님은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땅의 짐승을 다스리도록 할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27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게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피조물들에 대하여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 받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으뜸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비록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사람이지만,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는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자신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주에 다시금 살피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특별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창2:17). 모든 것을 허락하시지만 이것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명령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색하신 분이시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허락하시면서 한 가지만 금하셨다고 할 때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인색한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는 내용으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앞서 만드신 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실 때 만물의 으뜸은 분명 사람이지만, 그 사람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금지령을 통해 확인시키시는 겁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무엇보다 만물의 으뜸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고,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높여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나 소요리문답의 첫 문항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과 관련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강론한 내용을 일부 가지고 와서 설명하고자 하는데, 일단 오늘 본문인 창세기 1장 2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 할 때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사람을 만들 때 사용하신 재료는 땅의 흙입니다. 이것이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4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여섯 째날 땅에 있는 것들을 만드실 때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는 단지 인간만 땅의 흙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땅에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땅의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창세기 2장 19절에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는 표현도 나오는데, 사람만 땅의 흙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인간의 독특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난 뒤 생기, 다시 말해 호흡 혹은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는 거기에 인간의 독특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땅에서 난 다른 생물들도 살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라고 말씀하시자 각종 생물들이 창조되었고, 거기에 분명 생명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독특성은 단지 생명력만 가졌다는 게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즉 사람은 땅의 흙으로 육신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에 의해 영혼이 형성되어 하나의 인격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맨 처음 지은 사람이 남자입니다. 왜냐하면 이후 내용 속에서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대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1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18-23)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2장에서 기록되고 있는 겁니다. 맨 먼저 남자를 창조하시고 난 뒤 에덴 동산에 두시고 거기서 남자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한 금지령입니다(창2:16-17). 그리고 난 뒤 흙으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남자의 갈빗대를 하나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는데, 이 일이 분명 하루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시간적인 순서로 보자면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지음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한 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자를 지으실 때 남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고 하여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은 여자가 남자만을 위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돕는 배필로 지었다는 것은 남자 하나로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여자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으로도 성립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2장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와 여자, 둘이지만 그들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된다는 의미이지, 한쪽을 위해서만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창조의 순서 혹은 질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지만, 그 순서 혹은 질서에 있어서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질서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가 순종한 것처럼 남자들 역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들도 그런 남자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11절 이하 14절입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오늘날 남녀평등을 외치는 사회 속에서 볼 때 여성 쪽에서 그다지 좋아할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는 무엇인가? 거룩한 집회로 모였을 때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공적 모임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창조의 순서만이 아니라 타락의 순서를 통해서도 말하는데, 여자가 먼저 죄에 빠졌기 때문에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여자 목사 안수는 분명히 불법입니다. 여자 목사만이 아니라 여자 장로도 그렇습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11장 11절과 12절도 보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창조의 질서는 남자가 먼저이고 여자가 이후입니다. 그러나 여자로부터 자녀가 출생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납니다. 즉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긴 하지만, 돕는 배필, 다시 말해 한쪽만을 위한 돕는 배필이 아니라 서로가 돕는 배필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연합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 안에서 그런 연합을 해야 하는가? ‘주 안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한편도 다른 상대방 없이는 발전해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를 담고서 골로새서 3장에서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3:18-19)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이것에 대하여 에베소서 5장에서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 된 교회의 관계로 알리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드리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5:22-33)
신앙고백서는 이런 사람이, 즉 남자와 여자가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육체와 함께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도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독특성은 어디 있는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영혼은 이성적입니다. 또한 이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물론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릴 때 멸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때 멸한다는 것은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다는 것이지, 한번 창조하신 영혼을 죽여 소멸시킨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서 12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물론 흙으로 돌아간 육체는 마지막 날 다시금 부활하게 되지만, 육체가 흙으로 돌아갈 때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멸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지만, 가장 분명한 차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데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1항에서 고백한 것처럼 ‘존재와 완전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가장 순순한 영’이십니다.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볼 수 없으며, 인간의 몸이나 지체들이나 성정들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적어도 흙으로 만드신 우리 육체와 관련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영혼이 사람 전부는 아니지만, 영혼과 관련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이 불합리하지는 않다.” 즉 인간이라고 할 때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영혼만 가지고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앞에서 말한 원칙, 즉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종류의 생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 본성의 탁월함 전체에까지 미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인간성의 탁월성이요, 처음 받았던 순전함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영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이 불합리하지는 않지만, 거기에만 머물기보다는 인간 본성의 탁월함, 그리고 그 탁월함은 전인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들에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 육체 자체에도, 그 섬광의 얼마가 반짝이지 않는 곳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주어질 때 사람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이 세우는, 달리 말하면 그를 범상한 것과 분리시키는 무언의 대조가 근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1559, 1권 15장 3)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다른 피조물들보다 뛰어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기능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결코 ‘형상’에 대한 완전한 정의가 주어졌다고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1559, 1권 15장 4)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보편적으로 언급되는 구절로 설명하는데, 골로새서 3장 10절과 에베소서 4장 24절이 그것입니다.
신앙고백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이 두 구절로 설명합니다. 먼저 골로새서 3장 10절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죄로 인하여 타락했다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되는데, 본래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난 뒤에는 이 지식을 잃어버린 자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새 사람을 입게 되면 이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런 지식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4장 24절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3절에서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는 말을 하는데, 골로새서 3장 10절처럼 새 사람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난 뒤에는 이런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로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는데, 여기서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새 사람이 되었지만 완성된 모습으로 있지 않기 때문에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하라는 그런 측면인 겁니다.
여러분, 신앙고백서를 보면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식과 의, 거룩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식, 의, 거룩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지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지식과 더불어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 그리고 다른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는 지식을 주셨고,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와를 만드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을 그의 앞으로 이끄셨는데,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창2:19). 그만큼 다른 피조물을 아는 지식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 하와를 그의 갈빗대로 만드시고 그 앞에 두셨는데, 하와를 보자마자 어떻게 표현합니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창2:23). 자신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부류 그러나 자신은 남자인 반면 여자라는 구별된 존재로서의 지식도 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아담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려야 할 자임을 알게 하셨고, 또한 하와와의 관계 속에서는 자신이 머리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는 남자가 머리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의와 거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모든 만물을 만드셨고, 그렇게 만드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죄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그들은 죄의 영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태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구와 성향은 언제나 의로움과 올바름으로 있었고, 그 마음과 의지 역시 거룩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셨을 때 얼마든지 그것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의지의 자유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다만 처음 창조될 때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상태로 만드셨기 때문에 변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처음 창조될 때에는 의와 거룩함을 가지고 있는 그런 상태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열매들을 맺으며 그 열매로 기뻐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란 지식, 의, 거룩과 같은 속성들이 나타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만 있는 탁월성입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이런 지식과 의와 거룩과 같은 것이 있습니까? 천사의 경우 타락하지 않은 자들에 한해서 지식, 의, 거룩과 관련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들이 아니란 것입니다. 능력 면에서 있어서는 인간보다 뛰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지 않았으며, 우리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도 못 합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1장 14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이란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 인간은 지식과 의와 거룩에 있어서 탁월함을 나타내는 존재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타락하기 이전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과 의와 거룩을 원의(original righteousness)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아담의 첫 범죄를 논할 때, 창조 당시의 순수한 의를 상실했거나 그 의가 결핍되었다고 종종 말하기도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가지고 있었던 지식과 의와 거룩을 ‘원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성경의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를 ‘원의’라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처음 창조된 인간은 지식에 있어서도, 의에 있어서도, 거룩에 있어서도 탁월함을 나타내는 존재로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입니다. 그러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해서 그리스도 없는 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는 할 수 있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이하 정지수 목사의 대요리문답 해설 25 참고). 왜냐하면 아담을 포함한 어떤 택자도 그리스도 없는 의와 거룩, 구원을 가질 수 없도록 작정하셨고(고전1:30),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치 아니하는 모든 것은 다 정죄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롬14:23b). 따라서 타락 이전 지식과 의와 거룩에 있어 탁월함을 나타내는 존재로 있었다 할지라도 타락 이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지식과 의와 거룩과 비교할 수 있는 탁월함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타락 이전에도 순수하다고 말하지만 그 순수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순수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의의 순수성이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순수성보다 오히려 타락에도 물들지 않는 순수성으로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골로새서 3장 10절, 에베소서 4장 24절로 말하고 있지만,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것이라고 할 때 타락 이전,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을 때의 아담의 상태가 이 구절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가 여겨집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신학자들의 견해를 뒤엎자는 게 아니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처음 창조될 때의 아담의 상태를 그리스도 안에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택자로서 타락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는 것은 맞지만, 구속 받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타락하기 이전에도 지식, 의, 거룩의 탁월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인용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식, 의, 거룩은 아니라는 점에서 정확한 인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원의’라는 용어 자체도 그리스도 없는 의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더불어 소요리문답 강론에서도 말씀을 드린 바가 있지만, 가톨릭 측에서 원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역사신학, 제19장 3). 즉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자신의 도덕성의 확언적 자질로서 원의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원의가 그에게 자연적이지 않고 초자연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주장을 했는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분함으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타락과 함께 상실하게 되었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타락함에도 불구하고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초자연적인 은사는 상실할 수 있고 다시금 취해질 수도 있지만, 그래서 자신의 도덕적 성격의 단호한 자질로서 지금은 의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합당한 자연적 능력들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초자연적 은혜들이 없어도 아담이 기원적으로 부여 받은 자연적 도덕적 능력들을 가졌기에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초자연적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의미에서 원의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고자 하셨다고 할 때 그리스도 없는 의를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든 것을 주지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요15:5). 그런 점에서 맨 처음 아담의 상태에 대하여 ‘원의’라고 말할 때 작정의 내용은 무시하고 타락하지 않았으면 그것 자체로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일부를 선택하셨고, 그 일부에 대하여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어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굳이 지식과 의와 거룩에 대하여 ‘원의’라는 말을 붙이기보다는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있었다, 그때는 죄가 없었다는 정도의 성경 진술만을 남겨두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