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침례교의 정체성과 정신을 망각하고 타교단과 병합하려고 했던 일련의 사건은 한국 침례교의 기원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부족한 데서 온 것인지 모른다. 한국 침례교의 시작은 말콤 C. 펜윅 선교사의 내한으로부터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펜윅 선교사는 1889년 12월 8일, 독립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래서 당시 그가 어느 교파의 신분으로 왔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 추측을 낳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신앙이 어머니를 따라 장로교단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머니의 신앙이 그 자녀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분명 펜윅 선교사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 펜윅 선교사의 집에서 묶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목사인 매킨토쉬에게서도 많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펜윅 선교사는 만 16세 되던 해, 정든 가족을 떠나 온타리오 주의 시범농장에서 독립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기술농사와 원예에 대한 실물교육을 몸에 익혔고, 정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학교와 성가대 그리고 각종 위원회에 참석하여 많은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때 그가 출석한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속한 교회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다음 단계로 그는 철물상 도매업에 종사했다. 40여 명을 관리하면서 지점 판매장의 경영인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또 그는 북서부 개척지에서 3년간 농지를 개척하는가 하면, 법률사무소에서 실제적인 법을 배웠고, 상점을 운영하면서 회계법과 금융의 원리를 터득했다. 밤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집회에 참석하면서 평신도 전도자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했다.
펜윅 선교사에게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오대호 연안의 나이아가라 부근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였다. 그 사경회에서 펜윅 선교사는 주강사 가운데 하나였던 보스턴의 클라랜돈가 침례교회의 고든 목사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펜윅 선교사의 신앙과 신학노선을 추적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는 세계선교사로서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펜윅 선교사는 그것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다. “주여, 주님이 아시다시피 저는 다만 장사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 저는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고, 목사도 아닙니다. 신학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예배에서 펜윅 선교사는 인도에서 선교하던 윌더 형제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 형제는 사막에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다. “만일 당신이 훌륭한 유리병에 물을 담아 유리잔에 부어 갈증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준다면 그는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낡고 녹슨 찌그러진 깡통밖에 없어서 그 안에 물을 담아 준다 하더라도 그는 그 물을 마시고 살아날 것입니다.” 이 한편의 예화는 펜윅 선교사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다짐했다. 비록 녹슬고 찌그러진 깡통이라도 생명을 구할 물을 나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펜윅 선교사는 1889년 7월 한국으로 가라는 강한 부르심을 받았다. 친구인 헤론 박사(Dr. J. W. Heron)의 부인이 한국에서 복음을 증거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데 곧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다.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 문제를 놓고 날마다 기도했다. 펜윅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윌더 형제가 한 말이 또 생각났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노를 한참 저었지만 배는 여전히 기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은 배 뒤편으로 돌아가 배가 아직도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수고가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칼로 밧줄을 끊고 다시 노를 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펜윅 선교사가 한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펜윅 선교사는 본국을 떠나기 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다.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나는 너의 목자가 되어 한국의 산과 계곡으로 너를 인도하리라.” 그 뒤 펜윅 선교사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교단으로부터도 선교후원을 받지 않고 독립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선교사로서 자격이 부족해서였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비록 그가 특정 교단의 선교적 후원은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신앙노선이 침례교적이라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한국에 와서 성경을 번역할 때, “침례”라는 단어를 그토록 고수했던 일이나, 이후에 공주와 강경에서 선교하던 침례교의 엘라씽 선교부가 48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사역하고 있던 펜윅 선교사에게 사역지를 인계한 것이나, 펜윅 선교사가 1893년부터 1896년까지 본국으로 귀국하여 신학공부와 선교 문제를 재정비할 때도 침례교 목사인 고든 박사를 찾아갔던 일 등은 펜윅 선교사의 신앙노선을 말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이미 펜윅 선교사를 침례교 목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고 보면, 비록 그가 독립선교사로 들어와 교단 명칭을 침례교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침례교 선교사로서 인정되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를 한국 침례교의 원조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