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한정에서 근처 고산정 및 제월대로 향했다 차로 3~4km, 산책길로는 2~3km이다
홍명희 문학비가 처음을 맞는다
괴산읍에 홍범식 고가가 있어서이겠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있는 이 고가는 역사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1888∼1968)의 생가이기도 하다.
홍명희는 호는 벽초(碧初)·가인(假人:또는 可人)·백옥석(白玉石). 아버지 범식(範植)과 어머니 윤씨 사이의 4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도쿄[東京] 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 입학하여 이광수·최남선 등과 사귀었는데, 이후 이들은 '조선 3재(三才)'로 불렸다. 한일합병 때 금산군수였던 아버지가 자결한 뒤 귀국하여 민족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정치투쟁이나 무장투쟁이 아니라 신간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활동과 문필활동을 선택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8·15해방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남한 출신의 중간파 인사로서 민족통일전선의 상징으로서 중용되었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소설인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처음에는 〈임거정전〉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1928년 〈조선일보〉에 처음 연재한 이래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가 미완의 상태로 머물고 말았다. 홍명희가 한국전쟁시 북으로 월북해 북한에서 활동한 이력으로 남한에서 그의 가치를 아직도 폄하하고 있어서 아직도 그의 행적은 미묘하다
홍명희 문학비가 있는 주차장 맞은편엔 제월대 비석이 우뚝 서 있다
이곳에는 이 제월대 외에 고산9경이 있다
고산 9경은 괴산읍에서 수안보로 가는 19번 국도를 따라 4㎞쯤 가면 속리산에서 발원해 남한강의 상류와 합쳐지는 달천 양측 기슭에 있는 9개의 명승지이다.
고산은 넓은 들판 가운데 솟은 산으로 달천이 태극 모양으로 감싸며 흐르고 있다. 고산정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멀리는 속리산에서 발원한 푸른 물이 정자 밑을 돌아 흐르고 남으로는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말을 탄 수천의 군사가 진을 친 듯하다.
조선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로 온 유근이 이곳에 만송정과 고산정사를 지은 뒤, 광해군 때 혼탁한 정치를 피해 이곳에 은거할 무렵 고산 9경을 정하였다고 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편찬한 서경 유근 선조는 인주 오전 선조의 장인이자 동사공 오정위의 외조이다
제1경은 만송정, 제2경은 황니판, 제3경은 관어대, 제4경은 은병암, 제5경은 제월대, 제6경은 창벽, 제7경은 영객령, 제8경은 영화담, 제9경은 고산정사이다.
제1경 고산정은 조선 선조 때의 명현 서경 유근이 충청 관찰사로 있을 때인 1596년에 창건하였으며 만송정이라 하였다. 광해군 때 어지러운 정치를 피해 고향에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고산정이라 개칭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서경 유근 선조의 편액들이 많이 남아 있다
유근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회부(晦夫), 호는 서경(西坰)·고산. 아버지는 영문(營門)이며, 진사 광문(光門)에게 입양되었다. 15세에 황정욱(黃廷彧)에게서 배웠다. 안산에 가면 청문당이 있는데 청문당 주인 유경종의 종5대조이다
1574년 사가독서를 했으며, 1587년 이조정랑으로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다시 장원했다.
이해 일본의 승려 겐소[玄蘇]가 사신으로 오자, 왕명으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문장과 재능을 발휘하여 겐소 등이 탄복했다.
1591년 왕세자 책봉문제로 좌의정 정철(鄭澈)이 화를 당할 때 그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화를 면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서 의주로 갈 때 임금을 호종했고, 좌승지·예조참판을 거쳐 5도병마부체찰사가 되었다.
1597년 명나라가 산둥[山東]으로부터 경강(京江)까지 군량을 운반하게 되자,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운량검찰사(運粮檢察使)가 되어 책임을 완수했다. 1601년 예조판서가 되어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1604년 난중에 임금을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대제학·좌찬성이 되었다. 광해군 때 대북파가 국정을 장악하자 사직하고 괴산에 은거했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시골로 피했다는 죄로 관작이 삭탈되었다. 1619년 복관되었으나 일체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자,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화에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通津)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괴산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경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이 고산정엔 선조 때 명나라 학자 주지번이 썼다는 ‘은병’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78년 10월 27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숙종조에 편찬된 괴산군읍지에 고산정사가 1695(숙종 21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했으며, 이후의 기록에 고산정사의 재건과 관련된 언급이 없어 지금 고산정이라 부르는 건물은 만송정을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단층 정자로 마룻바닥을 따라 평난간을 둘렀다.
처마 밑에는 이원이 쓴 孤山亭 현판이 걸려 있다. 안에는 명나라 사신이었던 주지번이 1606년(선조 39)에 쓴 호산승집, 웅화가 1609년(광해군 1)에 쓴 고산정사기 등의 편액이 있다. 고산정사기는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제3경 관어대는 영화담 위에 있으며 바위 절벽 아래서 내려다보면 한가롭게 놀고 있는 물고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속을 떠난 신선처럼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제8경 영화담은 고산정 아래로 속리산으로부터 흐르는 푸른 물이 여울 소리를 내며 유유히 흘러와 정자 밑에서 머물러 못을 이루는 곳이다. 푸른 연못처럼 평온하고 많은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봄에 진달래꽃이 피면 꽃 그림자가 물에 비쳐서 산 그림을 펼쳐 놓은 것처럼 아름다우며 봄부터 가을까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4경 은병암은 제월대에서 강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푸른 강물이 S자로 크게 굽이치는 절벽과 절벽에 연이은 큰 바위들이 강물에 반쯤 드리워져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 바위를 은병암이라 한다.
저 멀리 은병암 앞으로 데크길이 생겨 다음 봄엔 괴강변 벚꽃길 따라 은병암까지 산책해야겠다
다시 고산정에서 내려와 제월대가 보이는 쪽으로 향했다
제5경 제월대는 고산정이 있는 부분의 절벽 부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강줄기 양편에 흩어진 일련의 경승지를 통칭한다.
맑은 냇물이 발 아래로 굽어보이는 벼랑 위에 고산정이 세워져 있고 정자 동남에는 제월대(霽月臺)라 이름한 암반이 있어서 정자 남쪽에 전개된 야산의 수려한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고산정사기 유래는 인조 때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올 때 유근이 원접사(遠接使)로 나가 시문(詩文)의 교류가 두터워 태화가 「고산정사기(孤山精舍記)」를 지어 보내니 지금까지 명문(名文)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현판에 새겨 정자 안에 걸어놓았다.
그 밖에도 사부사(謝副使)가 지어 보낸 「만송정팔경시(萬松亭八景詩)」가 있는데, 만송정팔경은 일명 고산팔경(孤山八景)이라고도 하며, 만송정을 비롯하여 영객령(迎客嶺)·제월대·관어대(觀魚臺)·영화담(映花潭)·황니파(黃泥坡)·창벽(蒼壁)·은병령(隱屛嶺)의 여덟가지 경관을 일컫는다.
「호산승집(湖山勝集)」의 현판은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제월대는 달천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바로 아래쪽의 달천은 여름철 유원지로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유근이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만송정과 고산정사를 짓고 광해군 때 낙향하여 이곳에 은거한 이유가 있는 아름다운 장소이다
지금은 달래강 1코스 산책코스로 이어져 있고 데크길로 잘 연결하여 더욱 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번엔 벚꽃이 지어 아쉬웠지만 다음 봄철에 다시한번 방문하면 더 아름다운 달래강 둘레길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