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남 미카엘 신부님께서 사제서품식에서 들은 주교님의 강론말씀을 적어서 청소년분과 회의때 보여주신 내용 공유드립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고 떠나는 신부님의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아멘)
오늘 우리는 다섯 분의 젊은이들이 부제와 사제로 서품되는 감격스럽고 거룩한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젊은이들이 하느님 앞에서 온 존재를 걸고 기쁘게 "네,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고 제자의 길을 떠나도록, 함께 기도해주십시오.
다른 미사와 다르게 서품 미사에는 제가 늘 목이 잠깁니다. 원 목소리가 원래 좋은 건 아시지요? (웃음) 저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고 편파적인 사랑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이 사랑이 오늘만큼은 이 앞에 있는 후보자들에게 쏟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서품되는 분들 앞에서 강론을 한다는 것이, 제가 사제직에서 직면하는 바를 건너뛰고 어떤 교과서적인 것을 말할 수 없기에, 늘 목이 잠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힘들고 때로는 정신 차리지 못하는 시간에 제 서품식 영상을 되돌려봅니다. 그때 제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있었는지, 어떻게 부르심에 응답했는지를 되새기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노력해봅니다. '너는 어떻게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느냐.' 이 질문이 저의 오늘입니다.
후보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대략, 이분들이 사제직을 준비하며 걸어온 긴 시간을 돌아보면서, 오늘은 마침내 그 부르심이 서품으로 완성, 완결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많은 부르심의 이야기들은 다른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저는 먼저 사무엘 예언자의 부르심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1사무 3,10)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자, 소년 사무엘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1사무 3,4-5 참조)하고 스승 엘리에게 달려가기를 반복합니다. 마침내 스승은 다시 부름을 듣게 되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1사무 3,9) 대답하라고 알려줍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소리를 구별할 줄 모르는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아직 그분의 부르심은 꿈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련하고 확실치도 않았습니다. 달려가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이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스승을 통해 알게 됩니다.
여기 계신 이분들의 부름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홀로 응답하고 달려가기를 반복하며, 기대와 실망의 수많은 날들을 견디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사무엘의 스승 엘리처럼,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대답하라고 가르쳐줍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이제 하느님 앞에 서도록, 여러분을 온전한 하느님의 부르심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은 늘 흔들리기 일쑤입니다.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사제 직무로 불림받으며, 우리가 혼신을 다해 토해내는 "네,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요한 세례자의 소리처럼 흩어져버리지 않을까, 우리는 염려합니다.
부르심 앞에 서 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떠올려봅니다. 이사야는 주님을 뵙고 한탄하며 외칩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이사 6.5) 하고 절망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하고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사제직 앞에 선 우리들의 적나라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는 입술이 더러운, 마음속 생각이 불결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아는 우리들의 지식과 지혜가, 하느님이라는 참 진리에 온전히 가 닿을 수 없는 이들이기에. 하느님의 일에 합당한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참조). 마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내면에서 조용히 속삭이던 말씀처럼, '나는 너를 원한다'(Volo ut sis).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두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우리가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38) 하고 말합니다. 그리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 이 부르심은 대단히 특별합니다. 제자됨의 필수라 여겨지는 자격들, 언변이나 지식이나 출신은 물론, 그것을 수행할 영웅적이고 경이로운 믿음과 용기가 전제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마련한 것은 그저 그분의 인격과 삶에 함께 하고픈 희망과 원의 뿐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머물고 싶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동고동락하는 우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시작이었고, 마침이었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 어디나, 사랑과 우정으로 함께하는 여정. 그것이 그들의 부르심이었고 거기서 주님은 그들을 성장시키시고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들은 마침내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하고 벅차게 그 감격을 토로하며,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습니다.'(요한 1.39 참조) 하며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후보자 여러분, 주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가 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머물고 싶은 원의 하나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긴 시간 어떻게 그분과 함께 머물 수 있는지를 수련하였습니다. 이제 그분이 머무시는 곳으로, 그분이 계신 곳으로, 그분께서 가시는 곳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이 어둡고 혼탁한 세상에 주님께서 머무는 곳이 어딜까요. '주님, 묵고 계신 데가 어딥니까', 하고 외치면 '와서 보시오.'(요한 1.39 참조) 주님 대답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의 부름은 시작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훗날,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습니다.'라고 선명하게 우리의 부르심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길을 떠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이분들이 기쁘게 부르심에 응답하고 떠나도록 이들의 여정에 기도로 함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