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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갈라디아서 5장 2-12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에 대하여 저주를 선언합니다. 이때 다른 복음이란 믿음과 함께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지만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의 내력을 설명하면서 참되고 바른 복음이란 무엇인가 할 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강조합니다(갈2:16).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는 말까지 합니다(갈2:21). 의와 구원을 위해 율법의 행위가 주장된다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고자 한다면 결국 누구도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조차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갈3:1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지만 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그런 가르침을 배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으로 오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그리고 이런 내용은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9-11)는 책망으로 이어집니다. 즉 율법에 속한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것은 율법 아래에서 나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합니다. 물론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할 때 모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말씀에서(갈5:6,13-14) 우리는 여전히 율법에 대한 순종의 의무가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율법의 어떤 것도 우리의 의와 구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의식법도 그렇고, 도덕법도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의식법이든, 도덕법이든 우리의 의와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와 저주를 확증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고 할 때의 자유는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고 있는 의식법에 대한 것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문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언급하지만 할례를 행하는 문제 등 거짓 교사들은 의식법을 지켜야지만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 바울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좀 더 직접적으로 할례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는데, 할례를 행하는 것 자체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다고 할 때, 그 이유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갈2:3-4). 그러니까 디도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은 이유는 거짓 형제들, 거짓 교사들 때문인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들은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지만 의와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할례가 의의 조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디도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는데, 거짓 교사들의 주장처럼 할례가 의의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한 것인데(행16:3), 이는 덕의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진리를 위한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할례라는 문제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할례를 행한 것뿐입니다. 만약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할 때 누군가 그것이 의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말했다면, 바울은 결코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여기서는 할례를 말하고 있지만, 할례를 비롯하여 구약의 모든 의식 준수를 집약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할례와 같은 그런 의식 준수가 그들로 하여금 의롭게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믿음으로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율법의 행위로써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런 믿음과 함께 의식 준수를 말합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가 다만 구원의 절반밖에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완성은 의식 준수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2-4) 즉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는데,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닌 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율법의 마침이라도 되는 것처럼 율법으로 자기 의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와 구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런 점에서 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고 말씀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에 다른 것이 더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에 율법의 행위 혹은 행위 공로를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칼빈이 표현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구원의 절반만 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 자체가 아무런 유익이 없도록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그러니까 거짓 교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시금 증언하고자 하는 것은 의와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만큼 너희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도 언급했지만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레위기 18장 5절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 살지만, 그런 측면에서 율법의 모든 준수는 생명을 약속하고 있지만, 누구도 율법 전체를 온전히 혹은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런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분이 누구시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하신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을 뿐입니다. 때문에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의 결국은 무엇인가? 4절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거짓 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함께 율법의 행위를 말합니다. 믿음과 함께 할례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쪽만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와 구원에 있어서 반쪽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을 말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은혜라고 말할 때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는 이상 의의 전가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반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갈라디아서의 배경이 되는 거짓 교사들처럼 믿음과 함께 율법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 전체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행위의 공덕을 혼잡시키는 경향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절반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째로 다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저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보적인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그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함께 행위의 공로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행위의 공로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지 않았다고 말할지라도,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지라도 행위의 공로를 말하고 있는 이상 그들 스스로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가톨릭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의와 구원을 말한다면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성경을 많이 읽는다든가, 기도를 많이 한다든가, 아니면 선을 행하는데 열심을 가진다든가 하는 것들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을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공로의 성격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은밀한 공로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참되고 바른 복음이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서두에서도 말한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거기에 있습니다(갈2:16).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고, 구약의 어떤 절기들을 지켜야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의와 구원은 오직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우리의 의의 출발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배우면서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러한 선물을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것임을 아는 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바른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질 뿐이라고 말한 뒤, 5절과 6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합니다. 비교하자면 2절에서 4절은 거짓 교사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5절과 6절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너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즉 너희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할 자들이고, 그 결과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참된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만 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인가 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소위 믿음조차 우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철저히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임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복음을 듣고 믿기로 하면 그러한 믿음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계시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 대신 그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도 피조 된 것이지만, 거기에 자유라는 말까지 붙여 우리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 결과 어떤 경우에도 우리 신앙의 출발은 성령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마치 우리가 선택한 것인 줄 착각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할 때 그러한 믿음의 시작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것을 철저히 거절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할 때는 의의 완성까지 내다본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분까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입니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성령께서 믿음을 일으켜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도 율법의 행위, 할례 등과 같은 것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습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의와 구원에 뭔가를 이바지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할례라고 해서 우리의 의와 구원에 뭔가를 저해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구약 시대 할례조차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구약 시대에 할례 자체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할례를 대체한 신약의 성례인 세례도 가치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한때 할례는 구약의 성례로 은혜언약의 표징으로 주어졌습니다(창17:11). 그 표를 통해 인간의 모든 방식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고,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로는 그러한 할례가 구약의 모든 의식법 안에서 폐지되었습니다. 한때 가치 있었던 것이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가 무할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만은 변하지 않는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라고 말할 때 시작부터 완성까지 성령께서 믿음을 일으켜 이끌어 가시는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논지는 율법의 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공로가 되는 것을 철저히 거절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란 무엇인가 할 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안에 율법에 대한 순종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저들은 이것을 공로로 여깁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때 의식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 의식법을 지키는 것이 의와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질 뿐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의식법이 폐지됩니다. 그래서 할례와 무할례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것이 아무런 효력이 없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도덕법에 있어서는 순종의 열매를 요구하신다는 겁니다. 이때 순종이 의에 이바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 안에 우리로 하여금 의와 완성을 보장한다고 할 때 마땅한 열매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선지서들을 보면 사랑의 열매가 없다는 것으로 책망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러한 열매를 맺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러한 열매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없는데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의 주제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7절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런 야고보서에 대하여, 그리고 오늘 본문 6절 후반부와 관련해 가톨릭에서는 여전히 행위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 구절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즉 저들은 믿음이 사랑에 의해서 역사하는 것이라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이 믿음만으로는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본문이지만 바울이 갈리디아서를 통해 표현한 말로 하자면 하나는 다른 복음을, 다른 하나는 바른 복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본문에 대하여 분별하고 바른 해석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별과 바른 해석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모순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지금 갈라디아서 전체 논지를 통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의롭게 하는 믿음에 대하여 말할 때 그 믿음은 결코 열매 없는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믿음과 함께 행위 공로를 말하고자 하는가? 인간의 본성이 인간 스스로를 높이기 위한 것이 주된 것이기도 하지만, 도덕적 방종이나 영적 나태로 흐를 수 있다는 식의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본성을 감추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이런 면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잘못된 이해 때문이거나 잘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만큼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며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은 한결같이 너희에게 주신 믿음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만 말하지 않고, 그 믿음은 열매를 수반한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할 만큼 참된 믿음은 행함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써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모든 일이 5절과 6절의 표현으로 하자면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의 행위라고 할 만한 것이 거기에 있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근거해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책망을 하게 됩니다. 7절에서 9절입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1:6)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통하여 바른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바울 이후 갈라디아 지역으로 온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바른 복음에서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너희가 처음에는 달음질을 잘 하였다고 말합니다. 바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른 복음 안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공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너희를 누가 막았습니다. 잘 달려가고 있는 그 길을 막아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도록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갈1:7)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이 있지만 복음의 내용을 변경시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안에 인간의 공로를 더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분명 저들도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가톨릭 역시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 말하지만,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 시험한 마귀의 거짓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막기 위해 먹고 마실 것, 세상의 물질과 권력도 주고자 하지만, 때로는 말씀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으로 거짓을 일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말씀 자체는 진리이지만, 그러한 진리의 말씀으로 거짓된 쪽으로 이끌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파가 있고, 교파에 따라 그들의 교리들이 있다고 할 때 교리의 일치가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한 것처럼 마귀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기 위해 말씀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말씀의 분별이 중요합니다. 그만큼 말씀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 말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달음질을 잘 하다가 넘어지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혼자만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까지, 그래서 교회 전체가 넘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진리에 있어서 왜곡되거나 타락하게 되는 것은 교회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명칭 자체는 있을지라도 주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어떤 교리를 배우는가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가 어떤 가르침을 가르치느냐가 중요하고, 그 교단의 교리도 중요합니다. 물론 교단의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할 때 그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교단의 가르침을 가르치는가?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학은 건전한 교단에서 배웠지만 지교회를 섬긴다고 할 때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교단과 상관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총회를 통해 거짓된 가르침에 대하여 분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함께 지교회 목사들은 참된 가르침을 위하여 애써야 하는데, 성도들도 분별력을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 목사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목사만의 잘못으로 말씀하지 않고, 지금 사도 바울이 책망하는 것처럼 성도 역시 책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 사역자나 말씀 사역자로부터 배우는 성도나 우리는 주의 몸 된 교회가 진리 위에서만 세워지기를 애써야 합니다. 거기에 거짓된 가르침이 들어오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적은 양의 누룩도 들어오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지상의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전투하는 교회라고 하지만, 그런 성격 때문에 거짓에 대하여 방관해도 되는 것처럼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다른 복음에 대하여 저주를 선언한 것처럼 진리가 아닌 거짓된 가르침 가운데는 늘 저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켜야 할 것은 오로지 진리의 순수함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0절에서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책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갈1:6)에서 돌아올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다른 복음에서 돌아서서 참되고 바른 복음으로 돌아올 것에 대한 기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듣는 자들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주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확신하되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불신자에서 신자로 부르시는 것, 하나님의 선물의 역사입니다. 신자로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성인으로 자라나는 것,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의 역사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복음에서 이탈하게 되었을 때 다시금 바른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하실 때 자신의 말씀으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효력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말씀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듣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선물의 역사가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사역자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왜곡되게 전하거나 거짓되게 전한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부터 말한 것처럼 저주 외에 없습니다. 전하는 자만이 아니라 전한 것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가르침 아래 있기를 좋아하는 모든 자가 그렇습니다. 본문 자체는 전하는 자에 한해 말하면서 듣는 자들의 편을 들고 있지만, 거짓된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인다고 할 때 그들은 예외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굉장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바울은 할례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함께 할례라는 의식을 지켜야 한다,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면 지금까지 결코 유대인들에게서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은 이유는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할례라는 의식, 율법의 행위라는 모든 공로주의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십자가의 걸림돌’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할례라는 유대인의 의식을 전하고 율법의 행위를 전했다면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저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전함에 있어 할례라는 의식, 율법의 행위라는 모든 공로주의를 거절하자 그들은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고전1:23)라고 전하기도 하는데, 왜 그들이 십자가에 대하여,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리끼는가? 할례라는 의식, 율법의 행위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할례와 같은 구약의 의식법은 폐지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율법의 행위로는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것을 걸러내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대조되는 것이 지금 할례라는 의식이요, 율법의 행위입니다. 한 때 하나님은 할례라는 의식을 통해 구약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그것을 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붙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지혜일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라고 할 때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무능력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에 대한 찬사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십자가만을 전했다고 할 때 저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은 무(無)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18-21)
결국 바울이 박해를 받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붙들고 있는 할례라는 의식, 율법의 행위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저들은 여전히 할례라는 의식, 율법의 행위를 붙들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요, 너희를 흔들어 혼랍스럽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베어버리라고 권합니다. 할례라는 단어 자체가 베어내다, 잘라내다는 의미가 있는데, 할례라는 의식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너희는 베어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9절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말한 바 있는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주의 몸 된 교회로 하여금 매우 치명적입니다. 얼마나 치명적인가? 저주가 선포될 정도로 치명적입니다(갈1:8-9). 구원에서 이탈할 수 있을 만큼 치명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과한 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합당한 자세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것처럼 말씀 사역자들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2)는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주의 몸 된 교회가 진리에 있어 위협을 받을 때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구원보다 훨씬 탁월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황홀케 하여 그 영광만을 사랑하며 거기에만이 온갖 열정을 쏟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만을 진지하게 바라는 신자들은 이 세상과 인간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무엇을 하든지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보다 차라리 온 세계가 멸망당하는 편이 낫다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과는 모순된 것처럼 무자비하다는 비난은 받지 않는다.”(성서원 번역 수정)
여러분, 진정한 이웃 사랑은 진리를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할 때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모든 불의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거기에 진정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실천될 수 있는 겁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할 때 사랑을 말하면 진리에 합당하지 않는 내용조차 품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리를 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율법의 행위라는 공로가 없습니다. 오직 은혜일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