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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습니까? / 2022년 5월 29일 주일 예배
본문 / 고린도전서 10:23-11:1
얼마 전에 김선영 목사님의 설교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께 영광’이라는 말씀을 단톡방에 올렸었죠. 그 목사님이 간증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정말 몰라서 못 믿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을 알면서도 안 믿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은 몰라서 안 믿었습니까? 알면서도 죽어라 안 믿고 순종하지 않은 것처럼 교회에는 하나님을 뻔히 알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즉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하나님은 어디에 계세요? 묻자 나는 네 코 앞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로 코앞에 계신 분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물으면 바로 네 코앞에 계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네 코앞에서 네 코의 호흡을 주관하고 있어 네 호흡을 거두시면 바로 죽는다고 말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3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하늘과 바다 끝에 계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 계시다고 합니까?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모세도 하나님은 너희들 코앞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은 자들에게는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마음의 중심,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과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십니까? 하나님을 전혀 안 믿다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천국과 지옥을 체험한 김수용 할아버지나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김선영 목사님이나 이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중에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가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예수님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과 재물 즉 하나님과 세상을 두 주인으로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흰옷이 아니라 세상을 함께 섬기는 회색 옷을 입고 검은 옷을 입은 불신자들 함께 넓은 길,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든 애굽에서 섬기는 신이든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중간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를 택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신앙의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거기는 지옥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아숭배자들입니다. 이 자아숭배자들은 평생을 교회에 들락거려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나도 구원은 받겠지 착각하며 말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교회가 즉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이것을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과 세상 그 중간지대에서 회색 옷을 입고 자신을 숭배하며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교회에서 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받을 자들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구원의 길에 대해서만 선포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구원을 받는 십자가의 복음은 교회에서 수도 없이 들었다는 것을 변명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있는 진실한 믿음이 있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구원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의 중심과 주인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생각도 없이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과 삶의 주인의 자리에 있습니까? 물을 때 아멘하면 안 됩니다. 나에게 열매가 있나 확인해야 합니다.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숙제를 내면 일일이 검사를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인기 좋은 선생님입니다. 단체로 물어보는 겁니다. 숙제 다들 했어요? 그러면 큰소리로 예라고 대답합니다. 오히려 안 한 사람들이 대답은 잘합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그 마음에는 즉 삶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 삶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과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삶의 근거와 기준을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선포합니다.
내가 정말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 와 닿지 않는다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는지 보면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죽든지 살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뜻과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여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자기 마음의 중심과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모시고 사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저 성주산에도 분명히 산삼은 있을 겁니다. 잡초는 널려 있습니다. 더덕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많아도 하나님의 뜻과 영광과 기쁨을 구하는 사람은 희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뜻을 전혀 구하지 않습니다. 아예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교회도 자기 기쁨과 만족을 위해 선택하고 그것이 안 되면 수시로 바꾸는 겁니다. 내가 어떤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기뻐하실까 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며 뻔뻔하게 주인이라고 부르지만 전혀 인정은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자기가 주인인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 기준은 육신의 감정과 생각에서 나오는 자신의 만족과 기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에 다니며 종교적인 행위는 늘어나도 인격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건 세상이건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과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는 거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이 누구인지 뻔히 다 아는 시골에서는 그 장로, 권사, 집사 때문에 교회에 안 다니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살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살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믿음 있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삶은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어떻게 속입니까? 사람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속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내 마음의 주인으로 계시면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과 기쁨은 내 마음에서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해야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내 안에서 내가 너무 강합니다. 어떤 때는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내 감정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이라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밀어붙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와 혈기의 감정이 올라오면 뒷골이 뻐근해집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대적하고 육신의 속한 내가 일어나니 평안과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신앙생활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자신과 싸우는 것이 미치도록 고통스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뻔히 알지만 그것을 내 감정과 생각이 대적하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그저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헌금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은 바로 내 자신과 싸워야 얻어집니다. 나를 미워하고 내 감정을 짓밟고 내 인격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그 사람의 기쁨과 유익을 즉 그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구하는 것이기에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는 내가 죽는 고통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13년 전에 교회를 개척할 할 때에 그곳은 교회에 있던 자리였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면서 목사님이 보증금도 받지 못 하고 갔다는 겁니다. 그 건물에서 우리가 사용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을 본적도 없지만 안쓰러웠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디로 이사했는지 찾아 큰돈은 아니지만 이경아 집사님과 50만원을 드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바로 옆에서 찬송 소리가 나는 겁니다. 저는 처음에는 선교단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감리교회였습니다. 저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 했습니다. 참 나는 별일을 다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지금 하나님의 교회 건물을 매입하려고 했을 때 그 근처에 좋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가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사이에 도로도 있고 건물로 가려 서로 보이지도 않지만 말씀드렸더니 자기네 교회와 가깝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않고 철회하였습니다. 저는 목사들이 야비하고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래도 모른 체하고 지나갔지만 이 시대의 목사들은 가까이 와서 지갑을 뒤지고 옷을 벗기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가는 자들입니다. 저는 그때 내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떠나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올 것이라 것도 알았습니다. 그 건물에 투자한 것도 고스란히 차지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먼저 감리사나 목사님이나 사정을 말하고 형식적이라도 양해를 구하면 아마 환영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목회자의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 치욕스러웠습니다. 나는 교회에 있을 때에는 교인들에게 까이고 교회를 나와서는 목회자들에게 짓밟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레기 취급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디에서나 다 까이는 것 같습니다. 그때 자존심이 짓밟히는 괴로운 마음으로 그래도 내가 먼저 찾아가서 인사해야지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아닙니까? 제가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축하 화분을 사다주라 했는데 왜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아쉽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당하며 살아야 돼! 왜 까여도 말 한마디도 못하는 바보인가? 저도 속이 시원하게 내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들을 다 꺼내놓고 반격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뭐가 옳고 그른지 말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입을 벙어리로 만들 때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교회에서 고난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옳은 것은 말이 없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도 억울해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무 변명도 안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치욕을 앞에 두시고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치욕을 당하고 죽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제 믿음은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얼굴은 생각해야 된다고 봅니다. 내가 당할 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그래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죽을 힘을 다해 그래도 돌아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내가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오해를 받을 때 사실이 뭔지 변명하는 것이 죄는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 오해까지도 주님이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인내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덕을 세우고 하나님은 영광과 기쁨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겠습니까만 잘 안 되도 살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내가 예수님을 본받은 것처럼 너희들은 나를 본받으라고 선포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고 나를 버려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영광을 돌리시고 기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기쁨과 만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죽고 내 안에 아버지가 사시는 그 십자가의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나를 못을 박고 예수님을 내 마음과 인생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과 내 정신으로 되겠습니까?
며칠 전에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그날은 말씀이 마음이 청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마음이 걸리는 것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제가 이 교회로 이사를 왔을 때 옥상을 청소하였는데 20년 넘게 쌓인 먼지가 흙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것을 몇 통을 거두었는데 버릴 데가 마땅치 않아 옆 건물의 뒤쪽에 흙이 쌓여 있길 레 그곳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엘림타운에 살 때에 작은 화분을 두 개를 만들기 위해 화단에서 흙은 퍼온 것도 걸리는 겁니다. 내 행동이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남의 유익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회개하고 화분의 흙은 쏟아서 다시 갖다놓고 제거 버린 흙도 그 이상으로 다 치웠습니다. 운전하고 가다 휴지가 없어서 도로에 침을 뱉은 것도 회개가 되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교회 앞에 도토리만한 돌이 있기에 무심코 발로 건너편 차려다 빗맞았습니다. 바로 양심에 왜 네가 원치 않고 유익이 없는 것을 네 이웃에 떠 넘기냐는 겁니다. 손으로 주워서 교회 화단 쪽에 버렸습니다.
내 만족과 유익을 위해서 했던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 생각이나 하십니까? 교회에 오는 것도 그저 내 만족과 기쁨이 되어야 오는 것 아닙니까?
어떤 인간은 자기보다 교회에 늦게 온 사람이 먼저 권사가 되었다고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중에 권사를 주었더니 빈정 상해서 그래도 안 다닌다는 겁니다. 한심하고 불쌍한 인간들이 교회에는 얼마나 많을까요? 하나님의 뜻과 영광과 기쁨은 공상과학영화 같은 일인 겁니다. 어림도 없는 겁니다.
자기 유익과 만족이 없으면 교회를 바꾸고 내 기쁨이 없으면 예배도 안 드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헌금도 십일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남의 유익과 기쁨을 구하겠습니까?
다솜이 다애 같이 어린아이도 우리 하나님을 얼마든지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말입니다. 믿음이 방언을 하고 헌금을 해야 믿음입니까? 다윗은 시편 131장에서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말씀합니다.
우리가 기억은 안 나지만 다 엄마 젖을 먹고 그 품안에서 평온하게 잠을 자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말씀의 젖을 먹고 즉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솜이 다애가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먼저 무릎 꿇고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지난 밤에 잘 자게 해주셔서 하나님 감사해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해주세요. 기도하면 하나님은 빙긋 웃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잘 때도 하나님 주님 품 안에서 잘 자게 해주시고 꿈에서 예수님 만나게 해주세요. 기도하면 분명히 언젠가는 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어르신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려줘도 꿈쩍도 안 하는 겁니다. 아마 저 아이들은 한 번 순종하면 끝까지 할 겁니다. 늙은 무당은 전도도 안 된다고 하더니 정말 여러분들이 늙은 무당 같이 된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지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이 굳어진 묵은 신자들은 자기 유익과 만족만을 찾습니다. 자기 말만 듣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내 사전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마음과 기쁨을 생각하며 믿어보세요. 송구영신 예배에 나눠드린 것을 수시로 읽고 억지로라도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인숙 권사님은 아주 가난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그 와중에도 노숙자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어느 날 한 전도사님을 찾아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내가 장례를 위해 준비한 돈이 있는데 그걸 갖다 주라고 하셨다며 주는 겁니다.
전도사님도 가난한 분이 장례를 위해 준비한 돈을 주니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폐암으로 소천을 하셨습니다. 장례식장에 노숙자들이 찾아와 가는 길을 배웅하고 한 여학생은 대성통곡을 하는 겁니다. 이 권사님이 오갈 데 없는 어려운 아이를 돌봐준 겁니다.
이 권사님이 장례를 지켜 본 그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이 일을 수십 년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를 보았지만 이 분처럼 아름다운 장례는 보지 못했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다간 그 가난한 성도의 장례를 하나님도 기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나도 하나님을 한 번 웃게 해 드려야지 하는 것이 소원이 아닙니까?
십자가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뜻을 찾고 영광을 구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천국에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