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작노트
1
유부초밥을 먹다가 돌조각을 씹었다. 뱉을 수가 없다. 유부 주머니 안에 야채랑 뒤섞인 밥알을 어디서부터 가늠해서 뱉어야 할 지 모르기 때문, 차라리 눈 한 번 질끈 감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삼켜버린다.
내 그간의 삶도 그랬다. 내가 선택했건 끌려갔건 건너올 수 없는 바다 밖으로 돌며 그 때마다 내가 먹어야 했던 밥은 고두밥이었다. 먹고 난 뒤에도 쉽게 소화되지 않는, 그래서 국을 푹푹 들이킬 수 밖에 없는···!
이 번 묶어 본 내 11편 시의 공통점은 마지막 임지로 3년 간 머물렀던 히로시마라는 도시가 내게 던진 화두이다.
제일 가까운 거리의 일본이면서도 아프리카보다도 더 먼 이웃처럼 대립되어가는 최근의 일본정부의 극우중심의 상황 속에서 한국인으로 직접 부딪치고 목격한 내 체험을 토로한 시편들이다.
히로시마는 어떤 곳인가?
34만 인구 중 7만 8천 명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방사능 노출과 화상,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백혈병으로
45년 8월 6일, 그 후로도 5년 간 총 24만 명 이상이 죽어갔다
─ 「8 월 6 일 8시 15분」 부분
세계 최초로 미국이 떨어뜨린 원자탄 투하로 도시 중심부가 완전 잿더미로 변했던 도시이다. 원래는 분지로 여섯 갈래의 강줄기가 바다로 빠져나가며 형성된 삼각주 도시로 내해를 끼고 안으로 숨어들어 지진과 해일과 모든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도시였다. 그만큼 일본제국주의로 영토확장의 꿈을 키울 때, 군함이며 군수물자를 미즈비시 대기업을 통해 만들어내기 최상이었던 도시였으며, 진주만 공격이며 노일전쟁, 청일전쟁의 출발지이기도 한 우익보수가 지금까지 강한 도시이다,
또한 당시 징용으로 끌려왔던 조선인들 만여 명이 억울하게 이 도시에서 까마귀밥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센징이라고 치료는커녕 화장火葬조차 시켜주지 않아
까마귀밥이 된 1만여 명의 한국징용자 사체는
검은 비의 도움으로 강을 따라 히로시마 내해로 빠져나갔다
죽어서나마 동해로, 조국으로, 방향을 틀어 귀향을 서둘렀다
─ 「8월 6일 8시 15분」 부분
나의 시아버님은 피폭자 1세, 징용을 피해 히로시마 제약회사에 파견나갔던 당시 20대 미남자였다. 그러나 출근을 위해 전차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먼저 타겠다는 승객에게 양보를 하고 다음 차를 기다리던 중, 하늘로부터 강한 빛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몇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깨어났다 한다. 그러나 거리는 이미 집도 전신주도 나무도 남아 있지 않는 허허벌판에 불길만 가득 차올라 아비규환이 바로 이렇구나 싶었다 한다.
지금도 평화공원 자료관에 가면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등과 어깨에 문신처럼 옷무늬가 박힌 사람들, 손톱이 길게 빠져나온 사람, 엉덩이 자국만 남은 돌계단, 검은 비와 피와 먼지로 뒤범벅이 된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그 어마어마한 원자폭탄의 파괴력과 잔혹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아버님께 양보를 받고 먼저 전차를 탔던 그 승객과 전차는 공중으로 날아간 뒤였다 하니 운명의 갈림길일 줄 누가 알았으랴. 시내 중심 한복판이었는데도 전차 방음벽 덕분에 빛의 일부만 얼굴로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나신 아버님은 그 후 여러 차례 얼굴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귀 한쪽과 목에는 화상 흉터가 돌아가실 때까지 남아 있었다.
뉴욕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던 젊은 날의 얼굴로 오신 아버님,
60년이나 돼서야 히로시마를 찾아든 남편에게
당신의 청춘, 해결 안 된 숙제를 부탁하시는 것일까
고름은 피가 되는 게 아니라던
몸속의 혹은 잘라내는 게 최선이라던 아버님 말씀,
─ 「8월 6일 꿈」 부분
아버님은 살아생전 말씀하셨다. 당신 피폭 전의 얼굴은 뉴욕과도 바꿀 수 없다고···! 고름이나 종기는 잘라내는 게 최선이라며, 일본으로부터 분명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한이 맺힌 이 말씀이 히로시마에 살면서 밤이면 들리는 기차 바퀴소리를 따라 환청처럼 들렸는지 모른다. 진정한 세계 평화는 원폭 반대에서 시작되며 요즘 같은 팽팽한 한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삼국간의 평화도시 교류가 급선무라는 걸 통감하게 한다. 일본과의 역사해결문제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시민단체간의 교섭과 지속적인 대책이 절실함을 밤마다 들리는 기찻소리를 따라 아버님께서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들려주시는 것은 아닐까, 밀쳐뒀던 아버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민족의 상처를 들깨우는 2012년 8월,
일본은 군사대국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일본이 평화국가가 되지 않는 한
죽어도 눈 감을 수 없다던 시아버님께서
형형한 눈빛으로 날 찾아오셨다
─ 「8월 6일 꿈」 부분
아버님은 반평생을 한국정부는 물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지 않은 한국피폭자협회를 만들었다. 일본정부에 맞서 숱하게 보상문제를 건의, 마침내 보사부 산하 한국피폭자협회를 창립하셨다. 또한 일본인만 받아왔던 건강수첩을 외국인 제1호로 받아 지금까지 한국피폭자 2세에 이르기까지 무상으로 상해를 치료받도록 애쓰셨던 분이었다.
그런 인연의 도시에 2011년, 센다이 지진과 해일이 나기 하루 전날, 일본 히로시마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잊고 싶었던 일제 36년간 핍박과 굴욕의 역사는 여전히 산 역사이고 일본이 독일처럼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진행될 역사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귀담아 듣지 않지만, 나 역시 엄마 무릎을 베고 옛날이야기로 들어넘기던 역사였지만, 재일교포 1세대의 산 증인들이, 일본 사회의 한 일원으로 성장하고 있는 재일교포 3세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으로 이름을 바꾸고 귀화하지 않는 한, 결코 선거권, 참정권을 주지 않으며 모국어인 한국어를 말하지 못하고 주눅들게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가 이럴 수 있겠는가.
일본이 한국 땅에서 분탕질하도록
양반다리 하고 있던 우리네 같다
허우대만 멀쩡해서는
겉핥기로 깔보다가 나라 잃었던 우리네 같다
눈치 없기가 꼭 저 왜가리 같다
─ 「왜가리 같다」 부분
가마우지 떼가 몰려들던 아침, 그날 나는 목격했다. 왜가리 역시 한 시간째 바닷물 따라 밀려드는 물고기 떼를 점잖게 기다리고 있다가 황당해 하는 것을······. 자기 영역으로 몰려든 가마우지 떼를 따라 날지도 못한 채 옛 우리네 양반들처럼 어흠! 어흠~! 침만 삼키며 어이없어 하는 것을······ 제주도나 중국 운남성 리강이나 일본 히로시마 위쪽인 이와쿠니에 가면 가마우지 목을 새끼줄로 묶어 뱃머리에 앉히고 물고기를 뱉어내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노예근성의 가마우지가 얼굴을 바꿔 떼로 몰려드는 장면은 그야말로 게릴라식 공격법이었다. 베트콩한테 미국과 한국 연합군이 다 당한 것도 바로 이런 작전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부끄러운 우리네······ 당파 싸움으로 통솔력을 잃고 우왕좌왕 눈앞의 이기적인 사고에 갇혀 나라없는 설움을 톡톡하게 치루게 했으니······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도 통솔력 부재에 있고 기본원칙을 지키지 않는 안전불감증에 원인이 있으니······ 제발 폼생폼사 왜가리 같지 말기를 바란다.
할아버지는 불법입국자였다
위조여권을 만들어 다른 사람 성을 빌려 살아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결혼을 하고도
우리 집 성은 그래서 권씨였다
할머니가 여든 살이 넘어서야 마지막 유산처럼
돌려놓으신 조씨 성,
─ 「제일교포 3세, 조씨」 부분
시 「재일교포 3세, 조씨」는 실제 이야기이다. 최근 한국피폭자들을 돕고 있는 일본인들의 순수민간 <풀뿌리>모임에 참석했을 때 85세 교민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당신 손주이야기이다. 그날 나는 듣다가 눈물을 훔쳤다. 불법체류자로 겁먹은 채 주눅들어 살아온 그의 가족의 삶이 안타깝기도 했고, 중국 조선족들이 또 이런 방식으로 서울에 들어와 살고 있기 때문. 중국엔 조선족이, 일본엔 재일교포가, 러시아에선 고려인이 여전히 모국인 한국을 향해 해바라기를 하고 있음을 우리 한국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미흡하나마 그래서 나는 시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실정을 대신 탄원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내 땅 내 말이 아닌 채
일본에선 재일교포로 중국에선 조선족으로
러시아에선 고려인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다
통일의 단꿈을 빨다가
꽃잎 사이에 기진해 누워버린
남북분단의 벌꿀이 날개짓하는 비
내 나라 찔레꽃 향이 머리 드는 비
─ 「이국의 비」 부분
일본 땅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어간 윤동주 시인, 우베시 해저탄광으로 끌려와 수몰된 장생탄광수몰자들, 나가사키 군함도 탄광에서 일하다 혹은 탈출을 시도하다 나카사키 원폭투하로 다시 죽어간 우리 징용자들···! 결국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한국 고향으로의 귀환이었을 것이고, 조선족과 고려인들까지 모두 바라는 건 통일된 조국으로 당당하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날일 것이다. 이국의 비가 내게 던진 화두였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맞았던 비는
나라의 존재가 사라진 국민이어서
대상포진처럼 뒤집어쓰는 죄와 벌에
도리없이 무릎 꺾였던 씁쓰레한 비
나가사키 군함도에 수몰된
장생탄광에 수몰된
조선 징용자들이 맞던 비는
남의 바다를 떠돌며
검은 땀과 피에 검은 까마귀를 불러들인 검은 비
─ 「이국의 비」 부분
2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노란 경계선 밖이다.
각자의 위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새들조차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다가가도 늘 일정한 거리 밖이다. 나는 왜가리와 백로, 심지어 까마귀와도 가까워지기 위해 빵조각을 들고 산책을 나간다. 그러나 결코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 그렇지, 저 거리, 저 문지방, 넘어갈 수 없는 너와 나의 한계점······.
도시를 등지기는 마찬가지인데
넌 제 문지방을 넘지 않는구나
서로 학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지만
나도 흰 빛과 날개를 흠모하는데
너는 내 기척에
도도하게 날개를 펴고 날아갈 뿐
─ 「문지방」 부분
새벽산책 때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무리는 오리 떼, 궂은 날이면 잎새 많은 가지에 앉아 꼼짝을 않는 다른 새들에 비하면, 오리들은 부지런한 우리네 어머니 같다. 비 내리거나 눈이 내리는 궂은 날씨도 아랑곳 않고 머리를 물에 박고 열심히 물일을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애정으로 주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초에 새이면서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오히려 사육 당해 뒤뚱거리는 오리 엉덩이를 보며 놀릴 뿐···!
그러나 오리 한 마리가 호수 한가운데로 헤엄치는 걸 가만히 지켜보면, 아름다운 풍경 이전에 그의 목에 어김없이 감기는 하루치 삶을 짊어진 노동자의 푸른 동아줄이 보인다. 찬 물속에 머리를 박고 힘겹게 물길을 쪼개며 나아가는 그의 물밑 빠른 물갈퀴질에서 어머니의 부지런한 노동 모습이 보인다. 내색하지 않고 심지어 가족을 위해 흔적을 지워내며 태연해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족들은 알 리 없을 것이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호수에 빠진 하늘을 끌고 간다
푸른 동아줄을 목에 메고
삼각형으로 물길을 쪼갠다
물살은 재빠르게
부서진 하늘과 흰 구름을 거둬낸다
붉은 잉어가
못 본 척
물밑으로 숨어든다
─ 「완전범죄」 전문
어찌 보면 식물들은 짝사랑의 대가들이다. 모계사회로 자식들을 거느리며 가정을 지키는 건 저 뿌리 내린 식물들일지 모른다.
난을 하나 키워봤다. 이사를 오면서 자리가 바뀌자 며칠은 비실거리더니 이내 창 쪽을 향해 머리를 튼다. 새나 벌이나 나비를 기다리는 것일까, 한 마리쯤 찾아들 날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점점 고개가 바짝 들어올려진다. 한 해를 그렇게 흘려보낸 어느 봄날, 체념한 듯 꽃 한 송이 피어났다. 어둠의 새끼처럼 검은 꽃빛이었다. 그러나 두 날개는 펼쳐진 채였다. 언제고 돌아갈 회귀본능을 간직한 채 어둡게 선 저 무정란의 난꽃!
조국을 떠나보면 안다. 내가 낳은 아이들까지 떨쳐두고 몇 년씩 나와 살다보면 결코 녹녹치 않은 적응기간을 거쳤음에도 뿌리내려지지 않는 갈증을······ 이질감에서 오는 소외를 저 난도 겪어냈음을······.
혼자 사랑하고 혼자 탯줄을 자른다
키스 한 번 나눈 적 없이도
무정란의 사랑을 쌓아간다
인고의 영롱한 수액을 꽃잎마다 매달고
날개를 편 채 숨죽이고 섰다
창 밖 날것들을 향해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섰다
─ 「무정란無精卵 난의 사랑법」 부분
3.
나의 몸은 내 정신보다 앞지를 때가 많다. 분명 웃고 즐겼는데, 내 안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행복한데, 내 몸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궐기를 한다. 그것이 꿈속에서도 반복된다. 아둔하다고 주의를 주는 것인지, 내 안의 천사 보다는 악마가 한결 힘이 센 것인지 꿈속에 나타나 날 울린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소리까지 내며 흐느끼다가 제 소리에 놀라 깬다. 깨어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산동네 골목 밖으로 쫓겨난 이불장처럼” 춥고 외로워 소름이 돋는다. 그러고 보면 나는 히로시마에서 여전히 적응 못하고 스스로 왕따당한 까마귀일지 모른다.
꿈속의 나는 늘 배가 고프다
꿈속의 나는 늘 집을 잃는다
산동네 골목 밖으로 쫓겨난 이불장처럼
비를 맞으며 추위에 떤다
─ 「히로시마 까마귀」 부분
히로시마는 한자로 광도廣島이다. 내겐 섬은 특별한 이미지를 준다. 왜냐면 내 삶의 모습이 섬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이 시는 2006년 중국 칭다오를 떠날 때 쓴 작품이다. 나는 이번에도 다시 섬을 떠나왔기 때문에 이 “시고 단 포도 맛”이 내 삶의 맛이었다고 결론지어 본다.
“숲은 한껏 푸르렀다
담장엔 붉은 들장미가 시들어 갔지만
닫힌 푸른 대문 너머로 포도는 저 혼자 무섭게 익었다
불 꺼진 창 앞에서 그림자 길게 출렁이며
푸르다 못해 남보라 빛 멍으로 영글었다
······ 중략 ······
그는 가고 나도 갔지만
계절 따라
포도는 시고 달게” 익을 것이다
─ 「시고 단 포도」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