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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너무 황송해서 의심스러운 선택받음>의 줄거리:
내가 과연 조물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양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가 주저가 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을 받은 사실이 못 미더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지나치게 황송해서입니다. 도대체 왜 나 같은 지지리 궁상을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로 선택하시고 그 사랑을 끊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너무 황송해서 의심스러운 선택 받음
(로마서 9:1~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3.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4.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5.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6.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7.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8.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9.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0.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11.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너무 황송해서 의심스러운 선택 받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너무 황송해서 의심스러운 선택받음”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선택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주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주저 없이 말하기에는 선택받음 자체가 너무나 황송하기 때문입니다. 황송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선택받았음의 의미를 모르거나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황송(惶悚)하다는 말은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되나?”라고 자문하는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알면 황송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선민은 이렇게 황송한 마음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 육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혜택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황송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선민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문 9장에서 11장까지를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내용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본문을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사랑의 표현이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나라 사랑이나 민족 사랑을 마땅한 것으로 여겨 우리에게 모범적 사례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진정한 취지가 어디에 있을까요? 본문 3절을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대신에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이 참으로 동족과 나라를 사랑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오해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 이유는 앞서 나온 내용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선민들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고백을 찬양하면서 감탄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입니다. 오늘도 햇빛처럼 공기처럼 와 닿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지전능하심을 속성으로 합니다. 또한 조물주이시자 주권자의 신분에서 주시는 사랑이며,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실 정도로 크신 사랑입니다. 피조물이 감히 택하신 선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8장 38절을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에 이어서 9장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의 이스라엘은 무엇이냐?”라는 충돌과 의문이 생겨납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을 자처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4~5절까지 언급되고 있는 모든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특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임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민을 향하신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선민을 끊어낼 수 없다는 말씀에 충돌되어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2000년의 역사를 지나온 이스라엘은 왜 끊어졌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문제에 답하고자 기록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와 그 내막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결코 동족 유대인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고, 로마서 편지를 받게 되는 대부분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선민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 이 끊어짐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9~11장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11장 20~22절을 보면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선민을 자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질 수 없다고 하였기에 이 말은 모순된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모습을 보니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해놓고 끊어지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나가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2절을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풀어보자면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때에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감이나 앙갚음이나 원한의 감정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 길을 택할 정도로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스라엘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결코 사적인 편견이나 원한이나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나온 말씀임을 분명히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이유는 사도 바울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서가 쓰이던 시점까지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박해했던 자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앞으로 동족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하는 말들이 앙갚음이나 거부감에 의한 것이 아님을 먼저 밝혔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공정함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진리성을 추구하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이야기를 해나갑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선민이 누구냐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스로 선민임을 드러내기가 너무나 황송할 정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선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질 수 없음을 언급하였습니다. 다만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고 이스라엘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선민에 대한 규정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6절 하반부를 보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육체로 아브라함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고 해서 선민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시대에서부터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선민의 개념에 의하자면 유대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유대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받았을 뿐이지 참 선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참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 이유는 선민의 규정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선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민은 어떤 사람일까요? 선민은 약속 안에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약속 안에 들어있는 선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아들들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피를 받아 태어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선민의 자녀계열에서 제외시키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혈통인 이스마엘이 선민에서 제외되었음을 상기시키며 선민은 혈통이 아닌 약속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삭이라는 인물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는 내가 지금 그림 그리고 있는 이삭을 내년 이맘때 낳게 될 것이고, 이 사람이 너의 뒤를 잇는 선민의 조상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삭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선민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있지도 않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삭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누구에게 조언을 받지도 않았으며 아브라함이 원해서 하신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원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혼자 그림을 그리셨고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물론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계획에 없는 존재가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선민의 조상이 되리라는 약속에 의해 태어난 자는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고 태어나게 하신 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선민인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 때문입니다. 이삭의 위치에 그리스도가 계신 셈이고,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가 약속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가 예언되었고 이삭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정됩니다.
유대종교를 신봉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것이지 결코 선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마엘과 같은 처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물려받았음은 틀림없으나 본래부터 하나님에 의해 선민으로 약속된 자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삭처럼 약속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 참 선민이라면 구약의 모든 약속의 총합이시며 최고봉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 아브라함의 혈통이면서 약속 안에 있었던 참 선민은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오백여 형제들도 있었으며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백이십 성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오순절 이후의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과 일곱 집사들도 있었고 박해가 주어지자 안디옥으로 피신하여 교회를 세웠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약속의 자녀로서 참 선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현상을 보고 선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선민이라면 결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절대 끊을 수 없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에게 적용하고 이스라엘에 적용해서 선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선민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이삭 안에 들어있던 자들이 선민이었던 것처럼 약속의 결정체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 안에 들어있어야 될 사람이라고 그림 그리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짐 없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한편 약속 안에 있는 선민은 그 증거를 드러냅니다. 그 내용은 앞선 8장까지의 내용들을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선민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려는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약속 안에 있는 선민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유일한 진리이고 그 과정을 따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선민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전지전능을 속성으로 하시는 사랑, 조물주이시자 주권자의 신분으로 하시는 사랑,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크신 사랑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삭에 이어서 야곱과 에서를 언급하며 선민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13절을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이 11절과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라고 하였고 12절에서는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서 성인이 된 후에 선악간의 행동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을 보시고 선한 사람을 선민으로 결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인 결정으로 선민이 될 사람으로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생물학적인 생모나 생부의 수준이나 상태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함께 모든 선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그 이삭에게서 태어난 첫아들이자 아브라함의 장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밉상이었습니다. 태어나서 한 짓이 하나님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밉상으로 규정하고 계셨습니다. 야곱은 똑같은 이삭의 아들이고 아브라함의 손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태어나 살면서 한 짓을 보면 밉상인 짓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행동만을 보자면 에서가 오히려 남자답고 늠름하며 믿음직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며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는 말씀대로 야곱을 예뻐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태어나서 한 짓을 보면 에서에 비해서 야곱이 훨씬 더 밉상 중의 밉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해 정해놓으셨기에 야곱은 선민이고 에서는 선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선민이냐 아니냐는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태어난 뒤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연쇄살인범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쇄살인범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끝끝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채로 인생을 끝내는 법이 없습니다. 반대로 정직하고 모범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태어나기 전에 선택하지 않으셨고 에서처럼 밉상으로 태어나도록 결정하셨으면 아무리 모범시민으로 살아도 선민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사도 바울은 앞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말하며 복수심이나 앙갚음할 생각이 없음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자면 참 선민은 에서와 야곱의 예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동일하게 아브라함과 이삭의 피를 물려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달랐던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또한 동일하게 리브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났고, 이삭은 정실부인 사라에게서 태어났으니 차이가 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어머니까지 똑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은 예뻐하시기로 결정하셨고 에서는 밉상이 되도록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선민 됨은 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몇 년을 살든지, 무슨 짓을 하고 살든지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거나 결정되지 않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내가 무슨 짓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처럼 나를 예뻐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내가 지금이라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름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없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계시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설령 잘 되지 않을지라도 마음은 아버지를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앞으로 함께 생각해나갈 것입니다. 다만 본문에서 우리가 마음에 간직해야 될 내용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유일한 진리이고 의식과 마음이 가야할 유일한 길임이 믿어진다면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태어나서 온통 밉상 짓만 하고 살았어도 선민이었던 것처럼 나 또한 무슨 짓을 하고 살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 결정하셨다면 선민입니다.
선민이라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선민의 증거는 의식과 마음의 흐름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가야 되는 진리의 길로 받아들임으로써 나타납니다. 자빠지고 넘어지면서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당신의 아들로 그림 그려놓으셨고, 약속의 총체이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떤 행동이나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의 선민이자 아들이 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내 길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지구가 두 쪽이 나도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황송함이 제 입의 고백을 주저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분명하나 저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방면에 지지리 궁상인 저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 앞에서 황송함으로 과분하게 받고 있음을 잊지 않고 오늘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