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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하나님이 보시는 선과 악(두 종류의 선과 악)
본문<롬2:6~11>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선과 악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노선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가늠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선악 기준과 인간이 말하는 선악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까짓 나무 열매가 무엇이길래 먹으면 죽는다는 것일까요? 아무리 소중해도 열매하나 먹는다는 게 죽어야 할 죄가 됩니까? 여기에는 단순히 불순종했으니 죽어야 돼, 그런 의미가 아니라 깊은 내막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아담은 먹었고 그런 아담을 보시고 하나님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창3:22).’라고 하시면서 이런 자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악과를 먹었더니 하나님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중 하나’가 되었다는 뜻은, 다른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피조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 아래에서 은혜를 양식으로 먹고 사는 자여야 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이 선이고 또 하나님의 일하심(의)이 선이기에 하나님 이외의 것은 모두 악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을 떠나서 인간 자기들의 선악 기준을 따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른 선악의 기준을 가진 세계를 구축하고 인간이 거기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기 방식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됩니다. 즉 윤리 도덕을 기반한 행함의 좋고 나쁨이 선과 악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인간의 선악의 기준에 따라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의로운 사람 불의한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의 어떠함을 빠지고 모두 사람의 윤리 도덕적 잣대가 기준이 된 행함에 따라 선악적 판단이 따라 붙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에게 베풀고 나누는 자는 좋은 사람 선한 사람으로 규정 되고, 또한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면 의인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악은 정반대가 되겠지요. 남에게 해를 끼치면 나쁜 사람 못된 자가 됩니다. 또한 사회적 규범을 무시하고 질서를 깨드리는 짓을 하면 역시 악인이요 불의한 자가 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려지는 평가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는 선악관 입니다. 오직 인간 끼리 세운 상식과 이성적 기준으로 만들어진 보편적 윤리와 도덕으로 선과 악이 분리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영생에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한 의인이라도 혹은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선을 쌓았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악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죄인들이 만든 선으로 자신의 죄를 없이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 행한 선도 악이고 악도 악일뿐입니다.
왜일까요? 죄인은 탐심의 존재입니다. 비록 남에게 선을 베풀어도 알고 보면 인간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합니다. 사람이 행하는 선행의 이면에는 사람들의 좋은 평판과 박수갈채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빌미로 명예와 자랑과 영광을 취하려는 속셈으로 하는 것이지요. 만의 하나 그런 게 없다손 치더라도 자기만족으로 뿌듯함을 얻습니다. 결국 위선과 가식적 존재라는 말입니다(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ㅎ님의 선이 아님을 알라는 말).
이런 것을 떠나 종교적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불자들이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지어는 원수 같은 자기 시모에게도 선을 베풀기를 마치 친모에게 하듯 하기도 합니다.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공덕을 쌓아 극락이라는 자신의 구원을 담보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역시 위선이고 탐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런 인간들의 선을 일체 부인하십니다. 전혀 인정하지를 않는다니까요. 비단 이방인들이나 다른 종교인들 속셈은 말할 필요도 없고,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까 아예 고전 13장에서 인간의 선과 의를 기각시키시는 선언을 하십니다.
<고전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성경의 모든 비밀한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헛된 일이고, 심지어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를 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허사랍니다. 아니 재산을 다 풀어 구제하고 자신의 몸을 대신 불 소시개로 내준다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랍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이 사랑을 인격화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IX)입니다. 네 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있냐? 없으면 별의별 짓을 다해도 허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재물을 다 퍼주고 몸까지 불 소시개로 내어 준다는 사랑을 한다 해도 이것은 인간의 선과 의일 뿐이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들이 왜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사람이 행하는 선의 한계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죄를 용서 받거나 깨끗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봅니다.
다시 6절부터 11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6절에서 ‘행한 대로’ 보응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단순히 문자로만 읽으면 ‘행한 대로’ 그러면 사람의 행함에 방점을 두게 되고 자연히 윤리 도덕으로 흐르게 될 수가 있기에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앞뒤 문맥을 따라 읽지 않고 보면 자칫 미궁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부분은 잠시 후에 다시 보겠지만 여기서 ‘행한 대로’란 사람의 실천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노선을 따를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7절과 8절, 9절에서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선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불의를 따를 것인가, 7절의 그 불의를 8절에서는 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서두에서 살펴 본대로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인간의 선과 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선과 악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의로 삼으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IX를 믿는 것이 선이고 믿지 않는 것이 악(죄)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종교적 열심과 정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힘쓰고 애쓰는 것들을 불의라고 합니다. 이미 1장 18절에서 배운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사람의 의가 불의라는 것이지요. 이 불의가 진리(복음)을 막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마5:20절을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산상수훈(마5~7장)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산상수훈을 공부할 때에 언급했습니다만, 산상수훈은 성경의 압축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구원은 율법 행함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함축하여 제시하는 게 산상수훈입니다.
지금 산상수훈 앞부분에서 주님이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주님도 결론부터 집고 이어가겠다는 본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두 의가 등장하잖아요. 제자들이 추구해야할 의가 있고, 바리새인들의 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인간이 행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 높은 수준의 의를 뜻합니다. 그들은 율법지킴과 경건한 삶을 목숨처럼 여기며 살았고 게다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산 자들입니다. 눅18장에서 잘 나타내고 있듯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으며 불의, 토색,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경건을 위해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나요? 일 년에 한 끼 금식도 어려울 걸요? 또한 명목상 십일조가 아니라 소득의 십일조를 과연 드려 봤어요?
아마도 거의 없을 듯합니다. 소득이 많으면 많아서 그대로 내기가 아깝고, 소득이 적으면 살기도 빠듯해서 이것저것 핑계대기에 바쁩니다. 이래저래 소득의 십일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게다가 어떤 윤리 도덕적 죄도 멀리하며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발꿈치도 못 따라 갑니다. 바리새인을 함부로 비난하면 어리석은 짓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고 하네요? 한마디로 인간이 만드는 의가 아무리 크고 높아도 그 의로는 천국에 못 간다는 일침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의가 왜 헛된 일인지 쭉 설명해 가는 내용이 산상수훈입니다. 그 내용을 제가 귀에 딱지가 안도록 설명했습니다만, 뭡니까?
‘모세의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했지만, 너희가 오해한 게 있는데 내가 다시 바르게 말할 게,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이고, 여자를 보고 흑심만 품어도 간음이야, 게다가 오른 눈이 범죄 하면 빼버려야 하고 오른 손이 범죄 하면 잘라 버려야 지옥을 면하는데 너희는 그러지 못하잖아, 그러고도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고 까불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악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으로 판단치 않으시고 마음의 생각까지 헤아리십니다. 속의 마음은 온갖 악독과 탐심으로 가득해도 겉의 행함은 얼마든지 아름답게 포장할 수가 있지요.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모두 지옥이 마땅한 저주의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보시기 때문인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모두가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거지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가 속은 자기 사랑의 탐심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이웃을 사랑하고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치도 않을 뿐더러 설사 행한다고 해도, 선과 의로 인정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마치 가시나무에서 포도열매를 구하는 것과 매일반이라는 뜻입니다. 죄인에게서는 결코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과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결론이 마7장으로 끝나는데, 두 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선(아가도스)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데,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답니다(원전). 아니 나무가 선한 나무도 있고 못된 나무가 있나요? 어떤 사람을 뜻하는 비유겠지요?
<마7:17~20> 17 이와 같이 좋은(아가도스:선)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사프로스)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선한 나무란 자신에게서는 죄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오신 십자가 예수를 믿는 자를 뜻합니다. 그 열매란 복음으로 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기쁨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의 대표가 세리요 창기요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못된 나무란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사람의 행함에 가치를 두고 종교적 열심과 윤리 도덕적 반듯함을 자신의 의로 내세우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들의 열매는 자기 업적이지요. 종교적 업적, 윤리 도덕적 업적입니다. 그것들을 행할 때마다 얼마나 대견스럽고 뿌듯하겠어요. 하나 둘씩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다 보시고 보상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이지요. 이런 자들의 대표가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에,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등장합니다.
<마7:21~23> 봉독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인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나이다,’ 하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십니다.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에 던져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롬2;6절의 그 행위대로 보응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고 있잖아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허사라는 것이지요. 큰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병도 고치고 선교도 하는 업적을 자랑스럽게 내밀지만 주님께 거절당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오직 하나입니다. 너희 인간들의 죄를 어떻게 해결할 건데, 죄가 해결되어야 나와 화목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텐데, 그 주홍 같은 붉은 죄를 무슨 수로 깨끗하게 할 건데? 그것들의 너희의 수고와 열심으로 해결될 것 같으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의를 상징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는 사람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이신 IX의 십자가 피 공로를 믿는 의입니다. 즉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 피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사람의 죄가 깨끗케 되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차원의 의가 바로 십자가 의입니다. 이것을 롬3:21절에서 증거 합니다.
<롬3:21~22>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다시 산상수훈으로 결말에 가서 행한다는 말을 살펴봅니다. 성경에서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실천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노선을 따른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입니다.
<마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중략..)
‘24절~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여기서도 문자를 보고 행한다는 말에 붙잡히면 실천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아요. 문맥을 모르는 소경들이지요. 예로서 마5장에서 주님은 오른 빰을 맞으면 왼 빰도 돌려대고 속옷을 원하면 겉옷까지 벗어 주라고 하십니다. 누가 빰을 맞았는데 다른 빰도 돌려줄까요? 주님이 십자가로 실현하신 것입니다(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입을 열지 않음). 옷도 속옷과 겉옷을 다 주시지 않았습니까?(우리가 로마 군병들)
이런 주님의 행하심인 복음을 전하라는 뜻인데 이것을 자신이 실천하겠다고 덤비면 행함으로 의를 쌓는 저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인도의 간디가 이 산상수훈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시도한 것이 무저항 운동이었습니다. 진리를 세상 것으로 바꿔치기해서 써먹은 것이지요. 슈바이쳐 박사나 마더 테레사도 그 장본인들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위대한 삶을 실천한 홍익인간의 표본이지만 영생과는 전혀 무관한 뻘짓거리를 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말은 인간 자신은 도저히 율법대로 행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요6:27절 이하를 보면,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이것이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바, 행함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 복음을 믿는 행함이 뭐라?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26절처럼 주님의 이 같은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아니하면 즉 복음을 안 믿으면 모래 위에 집짓는 어리석은 사람이랍니다. 그 결국은 심판과 멸망일 분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행한다는 용어가 나오면 무턱대고 실천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모두 소경들입니다. 앞뒤 문맥을 따라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지를 파악하지 않고 무조건 실천하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너무도 하나님을 가볍게 보는 것이지요.
<마23: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2절의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아주 심각한 내용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면서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유는 그들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서 가르치고 정죄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들의 위선 행위를 본받지 말고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는 것 같지만 죄가 하나도 없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알게 됩니다. 뭐지요? 자신이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발견케 해서 죄를 깨닫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잖아요(갈3:24). 율법을 통해 죄인임이 드러나서 마침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다면 율법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을 모두 지킨 것이 됩니다(역설).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하에서도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십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해주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되어 우리의 마음이 쉼을 얻어 평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율법의 숨은 뜻을 모르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으니,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상대적 준수에 안주).
마23장 13절은 이같이 복음을 막고 율법 행함을 가르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천국 문을 막고 저희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고 질타를 하십니다. 또한 15절은 교인 하나를 어렵게 얻으면 배나 지옥 자식 되게 한답니다. 배나 지옥 자신이 뭘까요?
즉 사람의 행함을 가치로 여겨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면 사람의 열심과 정성이 마치 좋은 신앙, 훌륭한 믿음으로 여겨져 교만케 되니까 더 이상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형국이니 일반인들보다 전도가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자기들도 복음을 안다,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을 닫습니다. 다른 복음,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를 믿는데 모르는 거지요.
용어는 같은데 전혀 다른 하나님이고 다른 예수님입니다. 북조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고 섬겼지만 마음으로는 바알과 앗세라를 섬겼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복주는 신이었다고요. 성경에서의 진리의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여타 종교에서 섬기는 세상 복 주는 신을 하나님으로 여겨 섬긴 것이지요.
엘리야의 갈멜산 영적 전투가 누가 참 하나님인가의 싸움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는 자신뿐이었고 바알의 제사장450명, 앗세라 제사장400명, 850대 1의 싸움이었지요.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예전에 조용기 목사가 동국대학교 승가원에서 내로라하는 중들이 초빙해서 설교를 했는데, 승려들이 듣고 큰 은혜를 받았다고 칭찬을 했답니다.
기독교는 타력 구원을 모토로 삼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아무 일도 안 했는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구원을 준다는 복음이 핵심 교리이지요. 불교는 정반대입니다. 인간의 열심과 정성으로 해탈을 이루고 열반에 들어간다는 자력구원이 모토이지요. 그래서 사람이 정진(도)을 하여 부처가 되자는 게 그들의 교리입니다.
그렇게 기독교와 불교는 정반대의 상극이기 때문에 조목사가 바른 복음을 그들에게 전했다면 그들은 분기탱천하여 싸움이 일어나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들이 감복을 했다는 것은 조목사가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사람의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취지로 설교했다는 거지요. 명백한 이단 아닌가요? 아시다시피 조 목사는 대표적인 기복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를 주장하던 이단입니다.
조목사의 삼중축복(영혼의 복, 범사의 복, 건강의 복) 교리가 유행처럼 번져 나갔잖아요? 그런데 그 목사를 따라 하려고 흉내 내는 목사들이 한국에 즐비하답니다. 공짜라면 양재 물도 삼킨다는 말이 있는데, 목사들은 부흥이라면 이단도 불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라면 이단도 삼단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목사라면 그 휘하의 신도들은 누구의 새끼들일까요?(계17장의 큰 음녀교회).
전도서 7장16절 이하에서는 ‘지나치게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치게 악인도 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과 악인은 일반 세상이 갖고 있는 선악관에서의 의인과 악인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것인데 인간 자신이 뭔가 경건을 추구하거나 말씀을 잘 지켜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는 온갖 행함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긍휼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무시하고 인간 자신이 의를 만들어 인정받겠다고 나름대로 목표를 설정해서 종교적 열심이나 윤리 도덕적 반듯함을 통해 의를 이루려고 한다면 그 결과가 패망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대목과 상충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말씀대로 실천하고 반듯한 삶을 이루어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인은 거듭나도 죄인일 뿐입니다. 본성을 변하지도 바꾸어지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고 하는데, 매일 발전해서 성화를 이루자고 한다면 불교의 석가모니 제자이지 예수님 제자겠어요?
그러면서 지나치게 의인도 말고 지나치게 악인도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면 이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높이고 칭송하는 게 경외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행하심을 알게 될 때 감사가 터져 나오는데 그것이 경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말할 때에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모두 관념이고 지식에 불과한 허상일 뿐입니다. 내가 긍휼을 입었다는 말 앞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나는 도저히 긍휼을 받지 못한 자인데 긍휼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사랑도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저히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인데,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인데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주와 멸망의 존재를 오직 하나님의 희생으로 형성된 의가 바탕이 되어 긍휼을 입고 사랑을 받고 구원된 존재가 되었음을 알 때에, 나의 행함을 어떻게 내놓습니까? 그저 배설물이지요. 오직 하나님의 행하심만을 높이고 자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경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의 심정과 동시에 내게 베푸신 망극하신 사랑에 압도되어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이 경외입니다. 이런 개념을 갖고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6절~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은, 어느 노선을 따르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나타난 IX의 십자가 복음을 의로 붙잡느냐, 아니면 인간의 행함을 의로 붙잡느냐로 보응하신다는 말입니다. 긍휼을 믿으면 영생으로 하시고 행함을 붙잡으면 멸망이지요.
‘7절~선을 행한다는 뜻은 실천적 개념이 아니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선인 복음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누가 믿는다고요? 지난주에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누구의 것입니까? 죄에 대한 절망으로 인간 자신이 저주의 존재인 것을 아는 자가 복음을 붙잡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기 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일이 있겠네요. 하나님의 안배와 간섭으로 육신이 후패케 되는 일이 선행되겠지요. 한마디로 실패자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승승장구 일취월장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먹혀들지 않지요. 그래서 사면초가의 형국을 조성하시고 항복시켜서 오직 예수 십자가만 소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참고~선을 행하여’라고 단서가 붙잖아요. 참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조성하신바, 옛 사람이 깨뜨려지는 고난의 세월이지 인간 자신이 스스로 인고의 시간을 갖는 고행이나 수행을 뜻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험악한 세월을 겪게 하신 야곱처럼 어쩔 수 없이 걸어간 좌절과 실패의 시간들을 함축해서 ‘참고(인내하여)’ 라고 붙인 것입니다.
고전1:26절 이하를 보면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 합니다. 부르심은 곧 구원을 말하는데, 구원받은 너희의 꼬라지를 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하나같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는 자들인데 긍휼로 부르심을 입어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실패자들로 만들어 복음을 믿게 하시는 겁니다.
7절에서 이어지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는 말도 역시 우리가 그런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는 뜻이 아니라 IX안에서 거저로 주어지는 영광과 존귀를 말합니다.
<고전1:30~31>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8절~당을 지어 불의를 좇는다고 합니다. 불의에는 자연스럽게 많은 무리들이 모여든다는 말입니다. 사망의 문은 넓어 많은 사람이 그리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사람을 미혹하는 달콤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니 인간이 정성을 드리고 잘하면 복주는 신으로 여기게 되니 유유상종하는 무리들이 모여들어서 당을 짓게 된다는 뜻입니다.
‘9절~악을 행하는 자들이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고 인간의 행함을 가치로 삼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없이 복음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지요.
‘10절~ 7절 말씀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예수님의 행하심인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답니다. 사람의 출신 성분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주어지는 복입니다. 갈3:28절에서도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11절~ 외모로 사람을 취급하지 않으신답니다.
외모로~란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행함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 말씀입니까? 만일 행함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면 그 지체가 지옥이지요. 유대인들처럼 날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행함이라는 숙제에 치여 안식과 평강이 없는 어둠만 있을 뿐인데, 하나님은 사람의 행함을 일체 거절하시고 오직 예수님의 행함만을 의로 여겨주시니 얼마나 기쁘고 다행입니까?
갈2:16을 읽고 마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아멘~,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