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도위(東昌都尉)가 나에게 할아버지인 권공(權公)의 묘비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공의 이름을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날 혼조(昏朝) 때 장차 모후(母后)를 폐하고자 하여 폐모론(廢母論)이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시작되어 무오년(1618)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백료들이 한 달이 넘게 정청(庭請)하였는데, 공은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폐주가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적발하여 죄주려고 하자, 공은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스스로 죄받겠다고 청하니,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혼조에서는 끝내 폐기되었다. 계해년(1623)에 반정한 뒤에 한성부 우윤과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표창한 것이다. 그러나 관작은 복구되었으나, 애석하게도 뛰어 올려서 발탁하지 않았다.” 하였다. 나는 공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 데다가 도위가 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왔으니, 명을 짓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공의 휘는 희(憘)이고, 자는 사열(思悅)이다. 안동인(安東人)으로, 신라(新羅)의 후예인 김행(金幸)이 견훤(甄萱)이 나라를 어지럽힐 때를 당하여 고려 태조를 맞이해 도적을 토벌하자, 고려 태조가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고 하면서 권씨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분이 시조(始祖)이다. 증조의 휘는 욱(旭)으로, 사도시 부정(司䆃寺副正)을 지내고 승지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진(振)으로,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상(常)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영의정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안정 나씨(安定羅氏)는 사인(士人) 나운걸(羅云傑)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정미년(1547, 명종2)에 태어났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갑신년(1584)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들어갔다가 곧바로 한림 주서(翰林注書)로 천거되었다. 뒤에 전적(典籍), 감찰(監察), 형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의 낭관, 정언, 지평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임진년(1592)에 종묘서 영(宗廟署令)으로 있던 중 왜구들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침에 따라 상께서 서쪽으로 행행한 탓에 국사가 황급하여 사람들이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공은 열성(列聖)들의 목주(木主)와 어보(御寶)를 받들고, 또 국초 이래의 옛 전장(典章)들을 모은 다음, 이를 가지고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였다. 왜란이 평정된 뒤에 종묘(宗廟)의 전례(典禮)가 모두 예전대로 복구될 수 있었던 것은 공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 있던 자의 뜻을 거슬러 녹훈(錄勳)에 들지는 못하였으므로, 사실을 밝히려고 하는 자가 있자, 공은 극력 저지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장령에 제수되었다. 사간(司諫), 군기시 정(軍器寺正), 종부시 정(宗簿寺正), 헌납, 보덕, 집의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정유년(1597)에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도승지까지 올라갔는데, 은대(銀臺)에 있은 것이 모두 3년이었다. 뒤에 병조와 예조의 참의 등의 직을 역임하고 특명에 의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그 뒤의 관직을 상고해 보면 도승지와 대사간은 각 두 차례 역임하였고, 호조와 형조와 예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윤은 한 번씩 거쳤다. 관찰사로 나간 것은 해서(海西)와 호서(湖西) 두 도였으며, 수령으로 나간 것은 강도(江都)와 금산(錦山)과 광주(廣州) 세 고을이었다.
갑자년(1624, 인조2) 봄에, 임진왜란 때 종묘의 신주를 모시고 간 공으로 특명에 의해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이해 5월 29일에 졸하니, 나이가 78세였다. 호성 공신(扈聖功臣)과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종실(宗室)의 충신인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4대손인 군수 이영서(李榮緖)의 딸인데, 부덕(婦德)이 있어 온 집안의 칭송을 받았다. 공보다 6년 뒤에 졸하였다. 공을 장단(長湍) 삼정리(三井里)에 있는 사향(巳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며, 부인을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네 아들과 세 사위를 두었다. 장남 익중(益中)은 동지중추부사이고, 차남 의중(義中)은 목사(牧使)이고, 삼남 임중(任中)은 부사(府使)이고, 사남 귀중(貴中)은 생원이다. 큰사위 박유공(朴由恭)은 직장(直長)이고, 둘째 사위 안대남(安大楠)은 군수이고, 셋째 사위 이지유(李志裕)는 현감이다.
익중은 두 아들과 여섯 사위를 두었는데, 장남 대유(大有)는 현령이고, 차남 대항(大恒)은 바로 동창위(東昌尉)이다. 첫째 사위 윤종지(尹宗之)는 첨정(僉正)이고, 둘째 사위 김정황(金鼎黃)은 현감이고, 셋째 사위 최여두(崔汝㞳)는 군수이고, 넷째 사위 이홍유(李弘猷)는 현감이고, 다섯째 사위 이유즙(李維楫)은 진사이고, 여섯째 사위 조공원(趙公元)은 유학(幼學)이다. 의중은 네 아들과 네 사위를 두었는데, 장남은 대업(大業)이고, 차남은 대욱(大勖)이고, 삼남은 대후(大後)이고, 사남은 대방(大方)이며, 첫째 사위 홍신도(洪信道)는 진사이고, 둘째 사위 나진(羅袗)은 도사(都事)이고, 셋째 사위 박원부(朴元阜)는 유학이고, 넷째 사위 안진(安縝)은 부사(府使)이다. 임중은 한 아들과 한 사위를 두었는데, 아들은 대년(大年)이고, 사위 송지덕(宋之德)은 생원이다. 귀중은 한 아들과 두 사위를 두었는데, 아들은 대균(大均)이고, 첫째 사위 남궁민(南宮𤇜)은 진사이고, 둘째 사위 이창하(李昌夏)는 유학(幼學)이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300여 명이다.
공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신년 이후로는 오래도록 산반(散班)에 있으면서 두문불출한 채 일을 사절하고는 형인 지사공(知事公) 황(愰), 동생인 판서공 협(悏)과 더불어 한마을에서 살았는데, 그 즐거움이 화락하고 화락하였다. 공은 묘주(廟主)를 호종한 공훈이 있으며, 윤기(倫紀)를 부지한 절개가 있었다. 그런데도 임진년에 녹훈되지 않았으며, 계해년에 초자(超資)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말하였으나, 공만은 가슴속에 담아 두지 않았는바, 공은 참으로 장자(長者)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안동 권씨 성이 처음 시작된 거는 / 權姓之始
고려 태조에게 하사 받아서였네 / 受賜麗祖
창성하고 치성하지 아니했으며 / 不昌不熾
동방에서 웅대하지 아니했던가 / 不雄東土
세대 전해 공의 몸에 이르러서는 / 云至公身
그 햇수가 수백 년은 족히 되었네 / 厥年數百
공에게는 큰 절개가 있었거니와 / 公有大節
세상 온통 혼탁할 때 드러났다네 / 見于世濁
그 단서를 어찌 아니 이을 것이며 / 不繼厥緖
그 명성을 어찌 아니 드러내리오 / 不顯厥聲
공의 사적 자세하게 상고하려면 / 考公之跡
이 비명을 보는 데에 있지 않겠나 / 不在此銘
[주-D001] 동창도위(東昌都尉) : 권대항(權大恒, 1610~1666)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응정(應貞)이며, 권희(權憘)의 손자이다. 선조의 열째 딸인 정화옹주(貞和翁主)와 혼인하여 동창위(東昌尉)에 봉해졌다.[주-D002] 정청(庭請) : 중대한 일에 대하여 세자나 의정(議政)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 계품(啓稟)하고서 하교를 기다리는 일을 말한다.[주-D003] 도당(都堂) : 의정부의 별칭이다.[주-D004] 신라(新羅)의 …… 시조(始祖)이다 :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은 본성이 김씨(金氏)인데, 안동(安東)의 호족(豪族)으로 930년(태조13)에 태조가 견훤(甄萱)과 싸울 적에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길(張吉), 안동 김씨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과 함께 태조를 도와 고창군(古昌郡) 병산(屛山)에서 후백제군과 싸워 크게 이기는 데 공을 세웠다. 고려는 이 전투로 전세에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이에 태조가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여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내림과 동시에 권씨 성을 내리고는 안동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으며, 대상(大相)이라는 관계(官階)를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