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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의 무능과 무력함이 왜 이렇게 좋지!>의 줄거리: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거짓 사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주시려고 의도적으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며 육신을 따라 자랑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결국에 사도 바울의 자랑은 의도와는 다르게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는 역방향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실제로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약함이 너무 좋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나의 무능과 무력함이 왜 이렇게 좋지!
(고린도후서 11:16~33)
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의 무능과 무력함이 왜 이렇게 좋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의 무능과 무력함이 왜 이렇게 좋지!”
본문은 이전과 동일하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거짓 사도와 자신을 비교하며 누가 참사도인가를 설파해 나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사도 바울의 자기자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살펴보았던 10장 17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대로 주 안에서 할 수 있는 자랑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주 안에 들어가면 세상에 대해서 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자랑으로 느껴진다면 주님 바깥으로 나와 있음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곧 믿음이 중단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했던 사도 바울이 의도적으로 어리석음을 자처하면서 육신을 따라 자랑을 하겠다고 공언합니다.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육신으로 가지고 있고, 육신으로 만나고 있고, 육신으로 관계된 일들을 자랑하는 것처럼 자신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마음이 예수님 바깥에 머물면서 육신을 따라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참사도인 사도 바울의 말은 의심하고 거짓 사도들의 말은 잘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인들의 수준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육신을 따라 자랑하기를 시도해 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라는 바는 어떻게 하든지 고린도 교인들이 진정한 사도와 거짓 사도를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일깨워주고자 그들의 수준에 맞추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육체를 따라 자랑한다면 얼마든지 이러이러한 일을 자랑할 수 있노라고 언급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20절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바깥에서 얼마나 어리석은 형국을 드러냈는지 잘 드러납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헬라문화권 아래에서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 정작 믿음에 관해서는 거짓 사도들의 말을 의심도 없이 따랐습니다. 거짓 사도들이 와서 자신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고 뺨을 치듯이 굴욕적으로 대하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다만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도움과 진정한 해가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도움을 주는 자들을 오히려 원수 취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이 답답했던 나머지 ‘거짓 사도들이 육체를 따라서 자랑을 했다고 하니 나도 한 번 해보겠다. 그렇게 하더라도 나는 그들보다 모자람이 없다.’라는 심정으로 본문을 기록한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스스로를 모든 민족 중에 뛰어난 히브리인이자 이스라엘인이라고 소개하며 혈통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에 더해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도 왕을 배출했던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했다는 것은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언약의 자손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치자면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언약의 자손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육신을 따라 하는 자랑을 똑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23절부터 자랑의 방향이 바뀝니다. 사도 바울은 어리석음을 자처하며 육체를 따라 자랑하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천포로 빠지듯이 자랑의 내용이 바뀌고 맙니다. 23절부터 27절까지를 보면 사역의 여정 중에 끊임없는 고난이 계속되었음을 자랑합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는 말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당해온 고난을 계속해서 언급합니다. 이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이런 말을 늘어놓는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고생담을 늘어놓아서 참 수고가 많았다는 정도의 인사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도권의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주장하기에는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대목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우리 생각에는 이런 고생담과 사도권의 정당성은 무관해 보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일들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사역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변화를 일으켰으며 성공적으로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괄목할만한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자랑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고난을 밝히는데, 따라 읽기도 버거울 정도로 자세하게 열거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자랑거리로 주장하지 못한 이유는 양심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많은 이방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역의 긍정적 모습을 자랑거리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사도 바울이 한 일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요즘 교단에서 목회 세습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목사님들을 보면 말로는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배당을 자녀에게 세습하는 일에 있어서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었던 양심이 목사님들에게는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주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고난과 역경을 당한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으며 자랑하였던 것일까요? 세상의 관점에서 고난과 역경은 자랑거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고난과 역경은 줄어들어야 할 것 같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거짓 사도들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이들은 마음이 예수님 바깥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적인 채움과 만족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안정과 높음, 그리고 많음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6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은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못해서 세상에 속해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가지고, 세상에서 높아지고, 세상에서 안정된 환경을 구축하고 싶어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사도 바울은 단지 많은 고난과 환난을 겪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화목함을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러한 고난과 환난을 견뎌낼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라면 어떻게 그런 고난과 환난을 받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많은 고난과 역경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이야기할 수 있다.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만으로 호흡하는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서 몸이 어떤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감사가 나오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세상 것을 갈급해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피가 철철 흐르도록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서 지하 감옥에 던져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며 찬양하고 감사하였습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늘까지 올라가면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되는 중이기에 기도와 찬양과 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이 마음을 거꾸러뜨리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도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 인해서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보냄 받은 자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괄목할만한 사역의 열매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역이 사도 바울이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 속에서 수많은 역경을 당할 때마다 한 일은 자신의 약함과 무력과 무능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 ‘다른 예수’가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본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됩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이기 때문에 몸이 처한 환경이 어떤 고난과 역경으로 채워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하고 무력하고 무능한 상황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사역이 진행되어 갔습니다.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역경이 주어질 때 몸부림치며 극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몸부림조차 칠 수 없고 판단조차 할 수 없는 무력과 무능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력과 무능을 볼 때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참 사도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참 사도로서 한 일이란 끝없이 다가오는 이 세상의 상황과 일과 사건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의 약함과 무력함과 무능함을 발견하는 것이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처럼 어리석음을 자처하여 육체를 따라 자랑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순수한 혈통의 히브리인이며, 선택받은 이스라엘인이고, 할례받은 언약의 자손임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자랑은 거짓 사도들은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이 수없이 당한 많은 고난의 삶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을 자랑하고, 땅을 향하여는 약함과 무력함과 무능함을 자랑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어떤 상황이 와도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이러한 약함과 무력함과 무능함이 확인되고 고백 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게 됩니다.
한편 우리가 읽지 않은 32~3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레다 왕은 당시에 로마가 다메섹 지방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왕이라 추측됩니다. 이 왕의 신하들이 사도 바울을 잡으려고 모든 출입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실 이 사건은 세상적인 관점에 볼 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굴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는 아직 회심하기 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2절을 보면 이때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는 표현으로부터 아직 사울이었던 사도 바울의 기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회심하여 바울이 됩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이후 바울의 모습은 실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단하던 기세는 사라지고 주의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광주리에 태워져서 성벽의 들창문을 통해 탈출하게 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의 내면은 이단이라고 여겨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의분으로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확신이 넘쳤기에 서슬이 시퍼렇도록 살기등등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이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아레다 왕이 자기를 잡아 죽이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굴욕적인 모습으로 탈출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굴욕적 모습이 그리스도를 만나 살게 되는 출발점이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이렇게 약하고 굴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굴욕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약하고 무능하고 무력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천국을 가진 자의 모습이고,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서 사는 자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면하고 화목함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세상을 사는 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 대해 약하고 무력하고 무능함이 너무나 좋고도 자랑스럽습니다. 물론 천국까지 포함해서 최고의 자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최고의 자랑입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자랑해보라고 한다면 약함과 무력함과 무능함이야말로 자랑거리가 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좋습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약하고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강하고 유력하고 유능하여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업적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나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에 있습니까? 그래서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이것이 분명하다면 약함과 무력함과 무능함이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겨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이 됨으로써 하늘을 포함해서는 하나님을 자랑하며, 땅을 향해서는 약함과 무력함과 무능함을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나의 모습이 가장 귀하게 보이고 가장 큰 자랑거리로 보일 수 있는 마음가짐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