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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맛과 멋이 숨쉬는 전주로의 여행>
▣ 전북 전주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민족성은 퇴락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점점 스러져간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서리치며 아늑하고 포근한 고샅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역사의 뒤안길을 걷고 싶은 때문이다.
▣전주한지박물관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2가 180
1997년 '한솔종이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다가 2001년 '팬아시아종이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2007년 현재의 이름인 전주한지박물관으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전주한지박물관은 한지공예품, 한지 제작도구, 고문서, 고서적 등 한지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해마다 한지의 색다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특별전을 열고 있다. 1998년 부채전을 개최한 것을 비롯해 선비정신전, 연전, 아시아 종이인형전, 우리 세시풍속전, 닥종이 인형전, 한지 의상전 등 다양한 특별전이 개최된 바 있다. 전주한지박물관은 기획전시관, 한지제품실, 한지재현관을 갖추고 있다. 기획전시관에서는 연 4~6회 내외의 특별기획전을 통해 한지의 다양한 모습을 관람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한지제품실에서는 문필용으로 사용된 한지뿐만 아니라 한지를 사용해서 만든 다양한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다. 한지재현관에서는 설치된 모형물을 통해 한지 제작과정에 있다
천년의 종이, 한지(韓紙)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함께 살아 숨 쉬어 왔다. 한지 한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닥나무를 삶아 일일이 껍질을 벗겨 티를 고르고 종이의 틀을 갖추는 '뜨는' 작업을 한다. 무려 아흔아홉 번의 손을 거친 후 백 번째에 비로소 한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해 '백지(百紙)'라고도 한다. 이런 까다로운 제작과정과 오랜 정성으로 만들어진 '천년의 종이'는 두껍고 단단하며, 광택이 나고 수명이 길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움과 탄력을 지녀 우리 민족의 강인하고 순결한 정신과도 닮아있다. 한동안 양지나 화선지에 그 자리를 내주고 명백을 잃었던 우리 종이가 현재 한국의 전통문화를 대표하고, 천년 이상 보존이 가능한 대표적인 중성지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으면서 화려한 비상을 꿈꾸고 있다. 또한 강한 내구성과 보존성 등으로 세계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한지의 우수성을 담은 여러 현대공예작품과 첨단산업소재로 응용된 한지의 모습을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최근 한지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한지의 내구성과 보존성, 통풍성, 흡수성, 보온성 등이 널리 알려지고, 한지를 현대인의 생활방식에 맞게 재가공하여 만들어진 제품들이 속속 등장한 결과이다. 다양한 특성과 새로운 변화로 다시 관심받기 시작한 한지를 이제 정부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한스타일 6개 분야 중 하나로 선정하여 국가적으로 "한지의 세계화"를 지원하고 있다. 국민적인 관심과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아름다운 우리 종이 한지가 사계의 주목을 받으며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 한스타일 : 전통문화 콘텐츠의 생활화, 산업화, 세계화를 통하여 고용 및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국가이미지를 고양하기 위해 우리문화의 원류로서 대표성과 상징성을 띄며, 생활화, 산업화, 세계화가 가능한 한글, 한식, 한복, 한지, 한옥, 한국음악(국악) 등의 전통문화를 브랜드화하는 것을 말한다.
▣ 덕진공원...전주시 덕진구 권삼득로 390 <구(지번)덕진구 덕진동1가 1314-4
정식 명칭은 덕진공원이지만 전주사람들은 아직도 덕진연못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덕진공원은 고려시대부터 조성된 연못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전주의 대표적인 도시공원으로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축조된 연못이다. 연못축조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온다. 첫째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901년경 도성인 전주의 방위를 위하여 늪을 만들었고, 자연현상에 의해 늪이 점차 연못으로 변했다는 설과, 둘째는 동국여지승람에 덕진지(德津池)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유추해석해서 관개용이 아닌 풍수지리설에 연유해서 축조된 것이라는 설이다. 즉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는 전주가 북방이 공허하여 지기(地氣)가 얕다는 이유로 가련산과 건지산 사이를 제방으로 저수함으로써 지맥이 흐르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덕진연못이 공원화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전주의 유지였던 박기순이 사설공원을 설치할 목적으로 1917년 7월부터 30년간 임대 허가를 받아 관리해오다가, 1929년 전주시에 기부, 1938년 5월 공립공원으로 개장한 것이다.
덕진공원 경내에는 남쪽으로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연못과 북쪽의 보트장을 동서로 가로지른 현수교가 놓여있고, 여름철이면 활짝 핀 연꽃이 일대 장관을 이루어서 전주팔경 중 하나로 손꼽혀 왔을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또한 덕진연못의 물맞이도 유명했다. 단오날이면 새벽부터 아낙네들이 모여들어 창포물에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하며 건강을 빌기도 했다. 연못주위로는 잘 조성된 산책길이 있고, 취향정 옆에 500여 석을 갖춘 야외공연장을 마련하여 공연이 수시로 열려 입장객들에게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봄부터 가을까지는 하루 4차례씩 음악분수가 가동되고, 연꽃 향기와 함께 판소리와 댄스 등 각종 공연도 펼쳐져 덕진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주의 정취를 듬뿍 안겨주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 맛집 고궁....전주시 덕진구 송천중앙로 33 <지번 덕진구 덕진동2가 168-9
▣전주역사박물관 :전주시 완산구 쑥고개로 259<지번 완산구 효자동2가 892-2
전북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지역사(地域史) 박물관. 전주시가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여 그 문화적 특질과 우수성을 부각시키고 '전주학(全州學)'을 정립하기 위하여 설립한 박물관. 2002년 5월 24일 개관. 박물관은 지하 2층·지상 5층 규모. 지하 2층에는 수장고가 있고, 지하 1층에는 녹두관이 있다. 지상 1층의 전주역사실Ⅰ에는 구석기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전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상설 전시되고, 2층에는 개인 소장자와 문중에서 기증·기탁한 유물들을 상설 전시. 3층은 전주의 역사 문화와 관련하여 주제별로 기획·전시하는 공간. 4층에는 동학농민혁명실, 5층에는 조선시대 전주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상설 전시하는 전주역사실Ⅱ가 있다.
◉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열린「완산칠봉과 완산동 사람들」특별전은【완산동 (完山洞)】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의 남쪽에 위치한 동. 남쪽에는 완산칠봉 등의 산지가 있으며 북쪽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그 중간지대에는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완산동에서 평화동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용머리고개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에는 "완산은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고,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 지명은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임을 보여 준다.조선 시대에 부남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1914년 부남면의 곤지리·은송리 일부와 부서면의 오계리 일부를 합병하여 완산정으로 칭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완산동으로 개칭하였으며 1957년에 동·중·서 완산동과 남화산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행정구역의 변경을 거쳐 2005년에 다시 완산동으로 통합되었다.
▣국립전주박물관 :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893번지
백제문화권 지역인 전북권 지역 유물을 적절히 보존·전시할 공간이 부족한 점을 감안하여 기존의 전주시립박물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시켰다. 198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0년 10월 26일 총 2만 평의 대지 위에 건물 연건평 2,429평의 지상 2층, 지하 1층의 새로운 국립박물관을 개관하였다. 1963년 10월 15일에 개관했던 기존의 박물관은 40평 규모의 진열실에 보물 제278호인 고려시대의 법화경절본사본, 보물 제420호 고려시대의 은사상감오동향로를 비롯하여 청자·백자·분청·철제·동제 유물 등 각종 향토문화재들을 수집·전시해왔다. 이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청동기·석기에 관한 연구 및 자료의 수집, 백제고분의 발굴 및 토기 자료의 전시, 남원 초촌리 고분 발굴조사, 남원 월산리 고분 발굴조사, 고창 아산지구 지석묘 발굴조사 등의 주요사업을 시행했다.
▣ 한벽당..........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15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써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으며, 그 서쪽 일대는 자만동 또는 주류동이라 불리었다. 한벽당은 우리고장 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쉴새 없이 찾았던 곳으로서 제영한 시가 많이 전해 오고 있으며, <<호남읍지>>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김진상 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의 시문이 담겨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살 필 수 있다. 한벽당이라 처음 불리게 된 연대는 확실치는 않으나, 당초에는 월당루로 불린 것 같은데 한벽이란 어귀는 벽옥한류란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서 후세 사람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 한벽 4경, 철길에 잘린 기운.
光風霽月 鳶飛魚躍
“따스한 햇볕에 바람 맑고, 밤 드니 비 개인 달이로다.
하늘가 소리개 떠서 돌고, 햇물에 뛰노는 고기로다.”
한벽당을 세운 월당 최담은 71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구계(九溪) 위 오목대 남쪽에 집을 짓고 이 여덟 글자를 새겨 도의(道義)를 향한 마음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그 뒤 한벽당은 월당의 자손들에 의해 대대로 보수를 해 오다가 1684년에 당시 관찰사였던 이사명이 한벽당에 이어 9동의 작은 층각을 세웠다고 한다. 1733년(영조 9)에는 전주판관 윤성필이 사재를 털어 보수했으며, 1897년에 후손들이 출연하여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당이 처음 세운 한벽당은 정확하게 1동의 건물과 ‘요월대(邀月臺)’이라 불리는 동편에 있는 조그마한 누각뿐이다.
가장 오래된 한벽당의 모습은 1911년의 것이다(왼쪽사진). 1912년 일본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전북일일신문사가 발행한 금란부라는 책에 실린 한벽당의 모습은 서쪽으로 이어진 제방을 제외하면 조선 초 월당이 세웠을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지금과는 달리 요월대는 보이지 않고, 한벽당 1채의 건물뿐이다. 그리고 사진 속 제방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2층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전주향교 앞에 이전 복원한 만화루(萬花樓)이다. 복원되기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무이한 만화루의 모습이다.
가운데사진를 보면 한벽당 동쪽에 조그마한 건물이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현재 요월대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요월대라 불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사진으로나마 추정해 본다면, 보이지 않던 길이 왼쪽사진에는 나타나고 있다. 한벽당의 동쪽에서 한벽당과 요월대 사이로 오르는 길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원래 한벽당에 오르는 길은 현재 오모가리집에서 올라가는 서쪽 길 뿐이었다하니 한번쯤 한벽당엘 가본 사람이라면 한벽당의 동쪽으로 치명자산에 이르는 길이 원래는 중바위 자락에서 바로 전주천으로 이어지는 풍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동쪽에서 한벽당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 길이 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라선 철도가 놓이게 되면서 제방이 만들어지게 되고 한벽굴이 뚫리었기 때문이다.
월당이 낙향해서 도의(道義)를 세우기 위해 힘쓰려 했던 한벽당의 정기가 잘리게 된 것은 바로 사진오른쪽에 보이는 전라선의 설치다. 사진오른쪽을 보면 철로가 놓여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막 터널 공사를 끝낸 뒤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전라선 철길은 이리 역에서 삼례, 덕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에 있던 전주역으로 지나 전 영생고자리를 자르고 오목대-이목대-한벽굴을 지나 중바위 서쪽아래를 타고 색장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전라선을 놓는다는 미명 아래 전주 초입부터 건지산에서 가련산(법원 뒷산)으로 흐르는 지맥을 잇기 위해 쌓은 덕진제(德津堤)의 기운을 잘라 놓더니 간납대에 이르러서 전주의 정신이 깃든 자만동, 옥류동, 한벽당의 정기를 일본도로 단칼에 잘라 놓은 듯 끊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전주에는 호랑이 기운을 가진 승암산과 용의 기운을 가진 용두봉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그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서 호랑이의 기운은 전라선의 철길로 끊어버리고, 용두봉의 기운은 경목선(국도 1호선)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그 지맥을 깍아 내려 용머리 고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말을 한낱 풍수가의 일언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왠지 서글픈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철길이 놓이고 기차가 운행될 때 자만동 부근에 이르면 자꾸 기차가 멈추었다고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런 현상에 일본인들은 부랴부랴 발산에서 오목대에 이르는 다리를 놓았고, 그 이후로는 기차가 멈추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후 1931년 10월에 전주-남원간의 철도가 개통되어 일제시대 요월대에 세워졌던 건물은 1912년에서 1920년대 사이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벽당 동쪽에 세워진 이 건물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서져 버렸다고 한다.
오른족사진에 있는 요월대는 새롭게 복원된 것이다. 이 요월대의 사진과 앞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건물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요월대(邀月臺)란 달을 맞이하는 곳이라는데 달이 떠오르는 동쪽이 아닌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요월대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 오목대· 이목대....전북 전주시 완산구 자만동2길 5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에서 태조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오목대이며, 오목대와 연결되어 있는 구름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이목대가 나온다.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의 이곳에서 야연(野宴)을 베풀었다는 곳이다. 여기에서 이성계는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 즉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쳤다. 그러자 이를 모를 리 없는 종사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현재만경대에는 그 시가 새겨져 있다. 오목대와 이목대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 전주 경기전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내신문 내의 신로 및 향로의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의 문화재 가치가 인정된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어진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후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됐다. 경기전에는 두 개의 숨은 문화코드가 있는데, 하나는 경기전 정문 밖 도로가에 있는 하마비요, 또 하나는 진전의 거북이 이야기이다.
진전에는 거북이가 붙어 있는데, 경기전을 완성한 목공이 그 영원함을 위해 지붕에 암수 두 마리의 거북이를 올려놓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북이가 물에서 살고 진전이 목조건축인 점에서 화재막이용 거북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기전에서 보이는 앞산 승암산이 화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경기전은 주변 경관이 수려해 역사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 전주 경기전 하마비........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70
경기전 하마비(慶基殿 下馬碑)는 임진왜란 후 경기전이 중건되던 광해군6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철종7년에 중각(重刻)되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단지 하마(下馬)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여서 조형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 전동성당......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전동성당은 소박하고 아담하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에 처형당한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건립됐다. 1907년부터 1914년에 걸쳐 세워진 전동성당은 순교지를 보존하고 있는 신앙의 요람으로서 처형지인 풍남문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순교지를 알리는 머릿돌과 순교자 권상연과 윤지충, 유중철·이순이 동정 부부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곡선미를 최대로 살린 로마네스크 및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동양에서 제일가는 성당건물 중의 하나이다
◉ 최명희문학관....전주시 완산구 최명희길 29 <지번 완산구 풍남동3가 67-5
최명희(1948~1998)는 자신의 원고지에 피와 땀과 눈물을 적시며 혼신을 다했다.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혼불’이다. 작가 최명희는 진정으로 자신을 찾으면서 조상들의 삶을 조명하려고 했으며, 마치 그의 임무는 민족혼과 한국의 삶과 의식을 복원하며 혼불을 붙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단절된 오늘의 역사인식이 답답하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았어도 역사와 문학을 중시했다. 인문학이 사람살이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 전주 한옥마을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전주한옥마을은 가장 한국적인 문화를 찾아볼 수 있는 천년전주의 랜드마크다. 전주한옥마을에 오면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 지금 어느 시대에 있는지를 착각할 정도로 고풍스럽다. 700여채의 한옥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은 전주 풍남동 일대에 자리한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촌으로, 전국 유일의 도시 한옥군이다. 경기전, 오목대, 향교 등 중요 문화재와 문화시설이 산재한 전주한옥마을은 전주만의 독특한 문화공간이다.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옛 선비들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전주한옥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