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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인생은 드라마, 삼위 하나님은 현실>의 줄거리 :
믿음은 믿는 것 때문에 말하고 행동하는 현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마주하여 말하고 행동할 때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말하고 행동하려니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사실이자 현실로 느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느끼는 상태가 저주받음입니다. 십자가는 저주받은 나를 죽이는 사건이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천국이 나의 지금의 현실이 되게 합니다.
내 인생은 드라마, 삼위 하나님은 현실
(히브리서 11:4~16)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내 인생은 드라마, 삼위 하나님은 현실’이라는 제목의 비유와 내용들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반복해서 나눈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러한 점을 좀 더 강조하여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합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믿음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염두에 둔 믿음을 말하자면 ‘예수님 십자가로 현실 뒤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현실을 삽니다. 그리고 인생의 내용인 생각과 말과 행동은 현실에 반응하여 나타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여기는 것은 저주받은 상태의 특징입니다. 저주받은 상태에서 빠져나와 살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삼는 것 자체가 저주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저주받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만 현실이 되도록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여기고 있는 나의 죽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여기는 것은 저주받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삼위 하나님과 천국만을 현실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땅의 상황을 현실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거나 글을 쓸 때도 지금 실제 상황을 현실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곧 마음이 가닿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상황이란 사실이지만 마음이 가닿지 않는다면 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현실이란 마음이 가닿았느냐 닿지 않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몸이 마주하는 이 땅의 상황을 현실로 여길 때 마음은 매이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건강이 안 좋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은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면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현실은 삼위 하나님과 천국입니다. 건강이 안 좋은 상황은 사실이지만 내 인생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 상황에 지나지 않습니다. TV에 나오는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이 아픈 것처럼 건강이 안 좋다는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건강이 좋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의 스토리 전개상 건강이 좋을 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취직을 못 하고 혹은 취직을 하고도 오랫동안 승진을 못하고 있습니다. 취직이 돼도 안 돼도, 승진을 해도 못 해도, 이것은 마음으로 좋아하거나 싫어할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마음이 가닿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취직이나 승진은 내 마음이 가닿아야 할 현실이 아니라 내 인생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 중의 한 스토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현실이 아닙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삼위 하나님과 천국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장사가 안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인생 드라마가 진행되는 중에 나타나는 스토리 전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로부터 저주에 빠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저주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인생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저주에 빠진 상황입니다. 몸으로 살고 있는 인생 드라마 속에서 전개되는 상황에 마음이 몰입된 것입니다. 드라마의 스토리와 같은 인생의 전개 상황을 현실로 삼는다면 전개 방향을 따라 울고불고 죽네 사네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이 들어가게 된 것이 문제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현실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은 사실이었으나 스데반 집사님에게 이 상황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인생 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을 뿐입니다. 마음이 참여하고 마음이 몰입되는 사실만이 현실이 됩니다.
드라마 전개 상황에 마음을 몰입해서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드라마에 비유할 수 있는 이유는 주어진 모든 구간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장사가 안 되어도 스토리 전개 상황에 마음을 몰입해서 울고불고할 일이 아닙니다. 장사가 안 돼는 스토리 전개 상황에서 감독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일에 주력할 수 있으면 됩니다.
마음이 인생 드라마를 현실로 여기는 것이 저주인 이유는 믿음의 의미를 알 때 분명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라는 표현들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라는 의미를 알 때 이후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파헤치지 않아도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곧 ‘현실을 바꿈으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삼던 상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그러했고, 에녹이 그러했고, 노아가 그러했으며,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를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저주의 상황에서 빠져나와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주는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삼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전개 상황에 불과한 일들에 마음이 가닿아서 몰입하면 현실로 여기게 됩니다. 아무리 사실이고 실제 상황이라도 내 마음을 투입하지 않으면 현실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상황에 마음을 몰입하는 것이 저주인 이유는 사람의 창조목적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전개될 때 눈에 보이는 것들에 몰입되면 안 될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우주에 비하면 지구는 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다시 지구에 비하면 나는 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러한 티끌과 같은 삶을 담기 위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구조차 티끌로 여겨지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 들일 장소로 지어진 곳이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 들일 수 있는 마음에 육체를 통해 진행되는 내 인생 드라마의 상황을 담고 몰입해 들어간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키가 173cm에 몸무게가 88kg입니다. 이런 거구를 각 면의 길이가 1cm인 작은 상자 안에 쭈그러뜨려서 넣는다고 해보겠습니다. 내 마음이 장사가 안 되는 실제 상황에 몰입하고,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 몰입한다면 바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쭈그러뜨려져서 압박받고 있는 상태가 저주받음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상자를 깨뜨리고 나와서 하늘에 계시는 삼위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을 모셔 들일 마음이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의 실제 상황에 투입되어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안 벌려서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할 마음에 돈이 안 벌린다는 실제 상황을 1cm 상자 안으로 쭈그러뜨려서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 돌에 맞아 죽어도 마음을 몰입시키지 않으면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삶이 내게 고통을 주는 이유는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에 보이는 상황들에 대해 죽지 못하고, 인생 드라마의 전개 상황에 대해 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커다란 마음을 인생 전개의 상황마다 1cm 상자 안에 쭈그러뜨려서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몸이 만나는 상황 자체는 고통의 원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이 땅을 떠나 아버지께로 갔다면 골로새서 3장 1~2절의 말씀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과 같은 일이 이루어졌다면 이 세상일은 우리의 마음에 고통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는 몸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소개한 믿음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쉽게 말해 믿음의 기본 정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조들의 믿음을 갖게 되는 기본 바탕을 보여줍니다.
아벨은 양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저주받음 속에 빠져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여기는 상태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벨은 이러한 상태를 부인합니다. ‘이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마음이 닿아서 현실로 느끼지 않고,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느끼는 나는 죽어야 한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양을 죽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세상 것들을 현실로 느끼는 자신이 죽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감에서 제외시키는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벨의 제사 정신은 뒤에 언급되는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와 다윗과 모든 선지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벨의 제사 정신은 바로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을 현실로 여기고 마음이 투입되고 있는 상태가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 때 주님과 함께 부활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안에서 내 마음은 보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과 천국만을 현실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현실에 맞추어진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만 23절 이하에서는 모세에 대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굽의 영화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저주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정신으로만 구약의 선조들도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대 속에서 만났던 것이고,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기억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라는 표현에는 ‘아벨의 제사 정신으로 예표 되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현실을 바꿈으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어서 5절을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에녹은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처소인 하늘로 옮기신 인물입니다. 이 에녹의 이야기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삼은 사람들을 당신의 처소로 옮기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곧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면 십자가 주님과 연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연합했다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삼는 나는 죽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현실로 삼게 됩니다.
또 7절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로 현실을 뒤집는 일입니다. 현실을 뒤집으면 노아처럼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여기서 노아가 세상을 정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너희들은 죄인이다!’라고 외쳤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은 공통 된 하나의 방식으로 살았지만, 노아만은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노아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현실을 뒤집은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과 천국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모두 혼자 삽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나와 동일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배우자도 내가 아니고, 자녀도 내가 아니며, 부모도 형제자매도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나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지 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나 이외에도 노아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홀로 하나님과 살아갑니다.
물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부분은 서로 하나님하고만 살라는 권면의 상태까지가 교제의 한계입니다. 누구도 하나님과 둘이 사는 과정 자체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은 각자가 하나님과 신혼부부와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삶에 개입한다는 것은 신혼부부의 침실에 뛰어드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삼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약해지지 않도록 서로 돕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당신의 유일한 현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유일한 현실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만 몰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현실인 상태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삽시다.’라고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을 현실로 삼으면서도 우리의 삶의 모양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삼는 것은 동일하나 내가 배우자에게 해야 할 말과 다른 사람이 배우자에게 해야 할 말은 다를 수 있습니다. 노아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홀로 산 사람이었고 우리 또한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 살면 안 됩니다.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도 안 됩니다. 내 인생의 드라마는 오직 감독이신 하나님과 둘이서 결정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나는 감독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일만 할 수 있으면 된다니 참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만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의 믿음이 함께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할 때 두 개의 관심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시즌1과 시즌2의 말씀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접할 때 아브라함의 생애라는 드라마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아브라함 자신의 관심이 늘 엇갈리고 있었음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복이 근원이 되리라’는 인생의 드라마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 순간 아브라함의 관심은 땅에서 진행될 인생 드라마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엇갈리는 관심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브라함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로 일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본문 11절을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창세기 본문을 보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집니다. 창세기 18장 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사라가 하나님 앞에서 웃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웃은 자는 사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5장 3절을 보면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17장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모습은 무척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불경하게 여기시거나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이 장면에 대해 아브라함과 사라가 우리처럼 믿음이 나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조롱하듯이 웃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은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말씀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아직 한번도 내 인생 드라마를 현실로 여기는 저주의 상태를 떠나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껴본 적이 없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하나님이 앞에 나타나셔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럴 때 관심이 꽂혀야 할 대상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지구 안에서도 티끌에 불과한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관심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자식으로 인해 너는 만복의 근원이자 만인의 아버지가 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멘!’이라고 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설령 80살, 100살 먹은 노인일지라도 하나님이 복을 약속하시는데 싫다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멘!’을 외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 보는 것처럼 마주하는 것입니다.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내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대상은 결코 내 인생일 수 없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앞에 두고 내 인생에 관심을 두면서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믿음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 따위의 인생이 하나님을 이기고 관심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내 인생의 드라마에 마음이 몰입하여 현실로 느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저주받은 상태를 고정시키고 하나님도 대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인생에 대한 약속을 해주시는데도 어떻게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 속에 빠진 상태에서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앞에 나타나서 내 인생을 이야기하십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앞에 나타나셨는데 하나님을 놔두고 내 인생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의 인생 드라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감독과 작가와 배우가 드라마의 한 장면에 대해 의논하는 모습에 빗대어 보겠습니다.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낳는 스토리를 진행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드라마의 주연 배우인 아브라함과 사라가 ‘감독님이 하시겠다고 하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굳이 100세 되고 90세 된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건 어색하지 않나요? 굳이 대를 이어야 한다면 엘리에셀이라는 충직한 종도 있고, 이집트 출신의 여종인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는 편이 좀 자연스럽지 않을까요?’라고 의견을 내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은 실제로 이에 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한 것이 아니라 100살 되고 90살 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상황 자체가 어색하고 우스웠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인생이라는 드라마조차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의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들의 인생은 하나님이라는 감독의 작품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느냐, 아이를 낳아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복의 근원으로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는 드라마 스토리의 전개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복이 근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기 인생에서 일어날 일은 하나님 자신에 비하면 ‘그따위’ 일에 불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보가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앞에 나타나셨는데 그 하나님을 관심하지 않고 자기 인생 드라마 따위에 관심을 둘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준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현실로 여기는 저주받은 상태를 고집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하시고 100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었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원형 그대로의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현실을 뒤집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유일한 관심사로 여기며 마음을 다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후손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현실로 여겨지는 모든 상황에서 현실 뒤집기를 시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느끼는 저주받은 상태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는 믿음을 드러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