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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4월 20일 (일요일) * [부활절]
* [새재사랑산악회-제140차 산행] ♣ 전남 강진 주작산-덕룡봉 종주 (전야 11:30 출발)
* [산행 코스] 오소재(전남 해남군 삼산면)→ 291봉→ 412봉→ 421봉→ 작천소령→ 덕룡봉(437봉)→ 425봉→ 묘삼거리→ 436봉→ 서봉(433m)→ 동봉(420m)→ 암봉, 암봉, 암봉→ 그리고 289봉→ 또 암봉, 암봉→ 소석문(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강진 ‘화경식당’] 만덕산 다산초당 ㅣ 강진 다산유적지 ㅣ 영랑생가 :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18번 국도-강진으로 가는 길] — 만덕산(萬德山)을 바라보며, 다산(茶山)을 생각한다
☆… 오후 3시 30분, 모든 대원들이 무사히 하산을 완료했다. 우리의 ‘초록버스’는 강진읍으로 향했다. 때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읍내의 한정식집 ‘화경식당’에 예약을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차창으로, 도암(석문리)에서 강진읍으로 가는 18번 도로의 오른쪽에 만덕산(萬德山, 409m)이 보인다. 아, 만덕산!!
☆… 강진만 바다가 내려다보는 그 만덕산 남쪽 기슭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적거(謫居)인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고, 우리나라 최대의 동백나무 숲으로 이름난 백련사(白蓮寺)가 있다. 강진(康津)은 곳곳에 200여 년 전 대학자인 다산 선생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귀양살이라는 정치적 탄압에도 의연한 마음으로 오직 학문을 탐구하고, 자신을 버린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다산의 인내와 성실, 그리고 용기와 지혜가 방대한 저작(著作)을 통하여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바를 보여주었다. 필자는 몇 차례 다산유적지를 다녀갔지만 오늘 우리 일행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 탐방하지 못했다.
[다산 정약용] —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생활에서 남긴 방대한 저술
▶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년)은, 뛰어난 자질과 높은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대대적인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면서 가문과 주변인물들이 참화를 당했다. 손위 형인 정약종은 참수(斬首)의 극형을 당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帛書)사건’으로 11월에는 이곳 강진으로 옮겨와서 18년 동안 긴 유배생활을 했다. 맏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가서 죽고 말았다. 다산(茶山)은 유배기간 동안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 등 학문정진에 진력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등 모두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다산(茶山)의 사상과 오늘의 현실] — 백성을 하늘로 생각한 대학자
☆… 만덕산을 바라보며, 다산의『목민심서(牧民心書)』의 내용을 떠올리니 문득 꽃 같은 목숨을 앗아간 ‘진도 앞바다 대참사’가 뜨거운 쇳덩이로 가슴을 때렸다. 이번 대참사는, 관료를 비롯한 대한민국 모든 조직의 총체적 부실이 만들어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기심(利己心)과 안일(安逸)의 패악(悖惡)은 수많은 죽음을 불러왔다. 그야말로 정도(正道)가 아닌 편법(便法), 주밀(周密)이 아닌 안일(安逸), 공공(公共)보다는 사심(私心)이 만들어낸 사건이다. 다산(茶山)의 무겁고 뜨거운 한숨소리가 들린다. 맹자(孟子)의 여민동락(與民同樂),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을 이어받은, 철저한 민본주의자인 다산은 백성들을 늘 긍휼(矜恤)히 생각하고, 오직 백성을 위해 선정(善政)의 지혜를 밝혔다. 그것이『목민심서(牧民心書)』이다.
다산초당 옆, 백련사 가는 길목에 있는 천일각 ... 강진만의 구강포 앞바다가 보인다. 다산은 이 정자에 올라 머리를 식혔다.
[강진 사의재(四宜齋)] —반듯한 군자(君子)의 풍모를 견지한 네 가지 다짐!
☆… 강진읍에는 사의재(四宜齋)라는 초가가 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유배 왔을 때, 촌사람들은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대역죄’를 짓고 귀양 온 선비에게 겁을 먹고 앞 다투어 달아날 뿐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 노파의 인정으로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은 다산은,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내면서『경세유표(經世遺表)』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네 가지란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 ‘신중한 행동’을 가리킨다. 누구 하나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던 그 시절, 그는 오히려 “나는 겨를[餘裕]을 얻었구나!”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예학을 연구하고 세상의 경륜을 집필하면서 백성을 생각했다. 온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당하고 형제가 죽거나 유배된 상황에서도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군자다운 평정심을 견지하고자 하는 대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오늘 우리가 식사한 ‘화경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시인 김영랑(金永郞)의 생가] — 아름다운 남도(南道)의 서정이 흐르는…
☆… 그리고 강진(康津)은 1930년대의 시인 김영랑(金永郞)의 고향이다. 영랑은 그 유명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를 남겼다. 그는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동인으로 참가하여 순수서정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며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35년 첫 시집《영랑시집》을 간행했다. 우리가 식사를 한 ‘화경식당’ 앞이 ‘영랑로’이고 그의 ‘생가(生家)’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 그의 대표작「모란이 피기까지는」은 1934년《문학(文學)》지에 발표하였고, 1935년 간행된《영랑시집(永郞詩集)》에 수록되었다. 오늘은 진도 앞바다에 참화를 당한 아까운 생명들을 위하여 영랑의 시를 빌어, 우리의 절절한 마음의 기도로 대신하고자 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1934)
☆… 오월이 아니라 사월(四月)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렸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 우리('나')는 경악과 함께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겨버렸다.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모든 보람이 서운케 무너’지고 말았다. 아아, 그렇게 허무하게 떨어져 버린 ‘모란’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내 한 해’, 살아야 할 인생의 시간까지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듯한 참척(慘慽)의 아픔이었다. 그러니 ‘하냥 섭섭해’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피지도 않은 무구한 꽃망울들이 어둠의 바다에 함몰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 모란은 절망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란과 우리 자신을 위한 믿음과 한없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리고’ 살아야 하며 눈물겹고 절박한 삶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希望)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픔 속에서 다시 피는 꽃, 그것이 ‘찬란한 슬픔의 봄’이다.
[에필로그-마음과 몸이 아픈] — 험난한 산길, 살아있는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
☆…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작산-덕룡봉은 남도의 숨겨진 보석이다. 해발 5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오늘 만난 변화무쌍한 기암연봉은 가히 진경이었다. 어떤 곳은 금강산 만물상의 일부를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여정은 온몸으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아픔이었다. 오늘의 산행은 주작산의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참사의 아픔’과 동행하는 기도의 몸짓이었다. 험난한 산길을 몸으로 견디는 간절한 고행이었다. 12.8km 험난한 암봉, 종주를 다하고 나니 다리는 천 근(千斤)이었고, 온몸에 실린 산의 무게도 천 근(千斤)이었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바다 속에서 죽음을 당한 순정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은 수만 근(數萬斤)이었다.
☆… 진도 앞 바다의 대참사가 산길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 죄 없는 생목숨들을 느닷없이 삼켜버린 그 절망의 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참척(慘慽)의 고통을 겪고 있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한다. 말로 할 수 없는 슬픔과 통한(痛恨)이다. 이유 없이 죽음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린 미성(未成)의 아이들이 너무 아깝고 애틋하다. 오늘 우리의 아픔은 단순히 산에서 짊어지고 내려온 그 피로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을 지키지 못한, 살아있는 자의 슬픔과 부끄러움이었다. 어줍잖은 인간의 부조리가 만들어낸 이 기막힌 아픔을 어디에다 호소할 것인가. 참괴(慙愧)의 언덕에서, 절망(絶望)의 바다에서, 슬픔과 분노(忿怒)의 하늘 아래에서 그냥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뿐이다. 쓸쓸한 허무의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 점심식사 후, 강진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도, 장대한 산의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보다는, 믿음이 무너진 우리 사회의 재생을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올린다. …
☆… 앞서, 오늘 강진에서 모든 대원에게 흔쾌히 푸짐한 한정식 반상을 제공한 남정균 부회장이나, 상경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신 산우에게 따뜻한 고마움을 전한다. 남도의 끝에 위치한 주작산-덕룡봉의 험난한 길, 숙연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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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다시 세워야 할 우리들의 사회적 믿음
* 전우택 연세대 의대 교수·사회정신의학 ㅣ 입력 : 2014.04.25 03:03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우리의 아이들도 가라앉았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믿음들도 함께 가라앉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믿음을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의지하며 살고 있다. 유치원 교사, 소방관, 의사, 군인 등 모든 영역의 사람들은 각자 전문성과 최선을 다하는 정신을 가지고 활동할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이 우리 사회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 중에는 배가 정상적인 운항을 할 수 있는 준비를 선장은 엄격하고 꼼꼼하게 하였을 것이라는 믿음, 만일 불행한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선장과 선원들은 모든 승객을 구조하기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랬기에 단원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안심하고 세월호에 승선하였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너졌다.
우리는 지금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 회사와 선주(船主), 관리 감독기관 등에 대하여 분노하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분노하고 비난하면서도 우리는 불안하다. 세월호에서 벌어진 일들이 사실은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해운업만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있을까? 엄청난 재난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량 제품을 주고받은 원자력업까지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 국가의 보위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짐에도 불량 부품을 끼워넣은 국방 산업까지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
돌이켜 보면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세월호' 선원이고 선장들이다. 한 가정의, 한 동네의, 한 직장과 부서의, 한 기관의 선원이고 선장으로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배의 제대로 된 선원이었고 선장이었던가? 실제로 주어진 일들을 잘못 없이 수행해 낼 수 있는 전문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런 능력을 옳게 최대한 헌신적으로 쏟아부으며 살았던가?
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월호와 세월호의 아이들은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다. 이번에도 또다시 그 소리에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제 '믿음의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하는 대한민국호(號)의 침몰을 나타내는 전조(前兆)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본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리려고 애쓰다 자신들은 죽어간 승무원과 교사들이 있었다. 어둡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쉴 새 없이 뛰어드는 잠수부들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현장으로 달려간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있었다. 밤을 새워 뉴스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저리도 가슴 저려하는 국민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였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새로운 시작이다. 세월호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우리 각자의 새로운 결단에 의하여 서로에 대한 사회적 믿음을 다시 세우게 될 때 비로소 우리 아이들의 죽음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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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 어려운 환경에서도 백성을 생각하는 목민관있었는데
요즈음은 저런 분이 없을까요 우리 국민들의 복이 거기
까지일까요
세세하게 쓰신글을 읽노라니 짠해지는 마음과 감동이 전해져 옵니다
댓글이 짧아 송구함은 왜일까요 마음에 세깁니다 건승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