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여백있는 추상화
김철교(시인, 평론가)
평론을 쓰다 보면 정기간행물에 원고를 보내기 전, 시인에게 글을 먼저 건네어 양해를 구하곤 한다. 요즘 저작권 문제가 있어 조심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끔 시인들은 "나는 그런 의도로 시를 쓰지 않았다"라며 자신의 창작 의도를 들려준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의 설명이 나의 읽기와 다를지라도, 그 또한 온전히 이해가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쉬운 시라도 한 폭의 추상화와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견고하게 만든다. 한 편의 시에서 읽는 이가 저마다의 다양한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시가 아닐까.
요즘 어려운 시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다. 그러나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쉽게 쓰려고 노력할수록 혹여나 글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는 저마다의 함정을 품고 있다. 쉬운 시는 자칫 깊이 없는 말장난이나 뻔한 교훈을 주는 대중가요 가사처럼 평범해질 위험이 있다. 물론 대중가요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어려운 시는 시인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는 불친절한 은유와 파편화된 단어들을 나열해 두고,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독자의 수준 문제로 돌리는 오만에 빠질 위험이 있다.
쉬운 시는 겉보기엔 쉬워도 그 안에 묵직한 울림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부재하다면 그것은 시인의 태만이다. 어려운 시는 읽기에는 까다롭고 불친절할지라도, 독자가 치열하게 분석하고 들어갔을 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미학적 보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사기에 가깝다.
쓰는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자부할지라도, 독자의 눈에 그렇게 비칠까 늘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는 본질적으로 한 폭의 추상화다. 풍경화나 초상화 같은 구상화가 눈앞의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듯, 뉴스나 설명문 같은 일상 언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반면 추상화는 대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지워버리고 선과 색, 질감만을 남겨 그 대상이 주었던 감정이나 본질을 표현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건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다. 단어들을 일상적인 맥락에서 떼어내어 파편화하고 낯설게 배치함으로써, 마치 추상화의 강렬한 붓터치처럼 말 뒤에 숨은 거대한 느낌과 흔적을 직관적으로 던진다.
추상화를 미술관에서 보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것을 읽어내듯, 시 또한 정답을 없애고 독자의 해석으로 완성된다. 어떤 이는 붉은 물감에서 열정을 보고, 어떤 이는 상처를 본다. 화가는 ‘이것의 정답은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형태 즉, 고정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의 삶과 경험이 그 빈 공간에 스며들어 매번 다른 그림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시를 단순히 색과 선의 자유로운 운동만을 뜻하는 서구적 추상화로만 규정하기엔 조금은 부족하다. 추상화가 시의 ‘열린 의미’를 보여준다면, 동양화는 시의 ‘여백과 침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가 종이 위에 배열된 시어들의 간격, 행과 연의 나눔,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을 통해 이야기할 때, 이 빈 공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안개, 물, 하늘, 그리고 무한한 사유가 고여 있는 침묵의 숨결이 된다. 그러므로 시는 단지 언어의 추상화가 아니라, 여백과 침묵을 품은 추상화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