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의 꽃, 피어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을 닮은 서울의 밀롱가. 붉고 푸른 조명 아래, 격정적인 아르헨티나 탱고 선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뜨거운 춤에 몰입하는 동안, 한쪽 벽에는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벽의 꽃'이라 불렀다.
그녀는 늘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젊고 가녀린 몸매. 그 몸매를 감싸는 것은 언제나 심플한 검은색 드레스. 그리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새하얀 마스크. 그녀는 결코 플로어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추는 커플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가끔 용기 있는 남자들이 다가와 까베(춤 신청)를 던졌지만,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조용한 거절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밀롱가의 풍경 일부가 되었고, 아무도 그녀가 춤을 출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익숙한 얼굴들이 춤을 추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들어섰다. 훤칠한 키에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30대 남자. 그의 시선은 망설임 없이 '벽의 꽃'에게 향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조용히 까베를 신청했다. 모두가 그녀의 고개를 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롱가 안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음악이 바뀌고, 웅장한 아반도네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가 마스크를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예상대로 아름다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차분하고 깊은, 그러나 춤에 대한 열망이 스파크처럼 튀는 눈빛.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고 플로어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첫 발걸음. 완벽했다. 그녀의 몸은 마치 악기에 맞춰진 현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남자의 리드를 읽어내는 감각, 음악을 해석하는 섬세함, 그리고 공간을 압도하는 존재감까지. 그녀의 푸른 드레스 자락이 선회할 때마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 펼쳐졌다. 강렬한 피겨와 절제된 우아함이 번갈아 나타났다. 그야말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정수였다. 플로어의 모든 춤꾼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의 춤에 홀린 듯 시선을 고정했다.
한 곡이 끝나자, 밀롱가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터져 나오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그녀는 아르헨티나 탱고 마스터에게 사사받은 15년 경력의 탱고 댄서였다. '벽의 꽃'은 더 이상 숨겨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날 밤, 가장 화려하게 피어난 밀롱가의 여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