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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성명 | 세례명 | 출생연도 | 출신지(거주지) | 순교지(순교형식) |
1 | 원시보 | 야고보 | 1730 | 충청홍주 | 청주병영(장사) |
2 | 배관겸 | 프란치스코 | 충청당진 | 청주병영(장사) | |
3 | 이국승 | 바오로 | 1772 | 충청음성 | 충청공주 |
4 | 김사집 | 프란치스코 | 1744 | 충청덕산 | 청주장터(장사) |
5 | 이성례 | 마리아 | 1801 | 충청홍주 | 서울당고개 |
6 | 오반지 | 바오로 | 1813 | 충청진천 | 청주읍청당(교수) |
7 | 김원중 | 스테파노 | 충청진천 | 공주감영 | |
8 | 장 | 토마스 | 1815 | 경기수원 | 청주장기대(참수) |
9 | 송 | 베네딕토 | 1798 | 충청충주 | 서울 |
10 | 송 | 베드로 | 1821 | 충청충주 | 서울 |
11 | 이 | 안나 | 1841 | 경기인천 | 서울 |
12 | 박 | 프란치스코 | 1835 | 충청청주 | 경기죽산 |
13 | 오 | 마르가리타 | 충청청주 | 경기죽산 |
☞ 순례길 안내도
-읍성 순례길-
(2015년 9월 5 일 청주읍성 큰 잔 치중 줄다리기 한 장면)
지난해 (2004년) 청주 읍성 훼손 100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성돌찾기운동을 벌여 찾아낸 650개와 새 석재로 청주 읍성 서문 성벽 일부를 복원했지만, 복원된 성벽은 전체 둘레 1640m 중 35m에 불과하다.
무너진 청주 읍성 안팎에 박해 시대 순교 터와 신앙 증거 터가 즐비하다. 이들 순교 터와 증거터 관할 본당인 청주 서운동성당을 출발해 청주 읍성 4대문, 곧 남문(청남문)과 서문(청추문), 북문(현무문), 동문(벽인문)을 돌아 서운동성당으로 돌아오는 4㎞ 구간 순례길 을 만든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❶서운동 예수성심성당 ∙ 출발 - 마침기도장소
예수성심 청주 순교자 순례길 의 출발지요 종착점!
1933년 6월 상당구 중알로 62번길 (현, 가톨릭청소년센터)에서 청주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되고 1963년 7월 25일 현재의 위치에 새 성당을 건립 봉헌함과 동시에 이곳으로 이전 되었던 곳 성당으로 들어섰다.
청주 순교 복자 5위의 복자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성모자상을 중심으로 하단 왼쪽에 무지개에 둘러싸인 오반지(바오로, 1813∼1866)를 시작으로 원시보(야고보, 1730∼1799)와 배관겸(프라니스코, ?∼1800), 장 토마스(1815∼1866), 김사집(프란치스코, 1744∼1802) 등이 등장한다. 한윤희(가타리나) 작가의 작품으로, 순교 신앙의 얼이 물씬 전해온다.
순교자의 믿음 성가와 함께 순례자의 기도 바치고 묵주의 기도를
하면서 진영 순교 터로 향하여 걸었다
❷옛 진영 순교 터(청주제일교회) ∙ 복자 오반지 바오로 등의 순교 터
청주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육거리 시장 한복판에 순교 터가 있다.
번화한 시장을 지나자마자 마치 신기루처럼 옛 청주진영 순교 터, 현재의 청주 제일교회가 나타났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지정 제6호 유적 교회로도 지정된 제일교회는 조선 말기 청주 영장의 관사 터로, 복자 오반지(바오로), 하느님의 종 김준기(안드레아), 전 야고보의 순교터이자 최용운(암브로시오)의 신앙 증거터다. 흔적이라곤 교회 기념비에 “천주교인들의 순교 터”라는 기록이 한 줄 남아 있을 뿐 이다.
◆청주 남문 밖에서 목 졸려 치명한 순교자 오 바오로의 묘
1859~1860년의 경신박해 및 1866년 이후로 계속된 병인박해는 이들 교우 촌에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동시에 충청북도 분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진천 출신으로는 오반지(吳盤
池, 1813~1866, 바오로)가 있다.
충청도 진천 반지 마을(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의 오반지 바오로는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 담을 쌓았고, 혼인한 뒤에도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날려 버렸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여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지장골에서 청주 병영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배 바오로와 함께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이겨 내며 신앙을 증거한 뒤,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사형 집행을 관장하던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기 위해 종이를 갖다 주자,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은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1866년 3월 27일(음 2월 11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오반지 바오로가 옥중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해 천주교를 봉행합니다."
- 관아에서 문초 중에 원시보 야고보 답변-
병인박해 때 진천 새울 출신의 하느님의 종 김준기(안드레아) 청주 금봉 출신의 전 야고보도 1866년 11월 3일과 1867년에 각각 이 곳에서 순교, 보은 멍에목 출신 하느님의 종 최용운(암브로시오) 회장은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한 뒤 1868년 4월 이후 참수형 순교 하였다.
❸옛 남석교 장터 (육거리 시장)∙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 순교 터
교회를 나와 다시 시장으로 들어서니 금방 옛 남석교 장터다.
조선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다리로는 가장 길다는 80m 길이의
남석교는 이미 오래 전에 지하에 매몰돼 순교 터는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복자 김사집은 이 장터에서 곤장 80대를 맞고 순교했다.
212년 전의 그 날을 상상해본다.
한겨울 혹한이 휘몰아치는 장터에 끌려 나온 김사집은 이미 해미에서 치도곤 90대를 맞아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구경꾼들이 모여든 장터로 끌려 나와 재차 곤장을 맞는다.
한 대, 두 대 곤장 횟수가 늘어갈수록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 향한 마음만은 철석같다.
이제 그 증거의 기억은 남석교만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 김사집 프란치스코
1744년 충청도 덕산 출신으로 과거 공부를 하던 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교리 공부와 기도, 독서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가난
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고 덕산과 해미 관아에서 치도곤 90대
를 맞은 채 다시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때가 1802년 1월 25일 (음력 1081년 12월 22일) 장터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5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신, 망, 애 (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
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았다고 한다.
"천주님과 성모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 옥중에서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자녀에게 보낸 편지-
❻ 옛 충청 병영터( 청주중앙공원 순교자 현양비)
∙복자 원시보 야고보와 배관겸 프란치스코 순교 터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의 신앙 증거터
순교 원의로 가득했던 원시보는 울면서 따라오는 부인과 자식, 벗들을 뿌리치고 1799년 4월 17일 갖은 혹형을 다 당하다가 순교함으로써 청주의 첫 순교자가 됐다.
이어 배관겸도 ‘온몸의 살이 헤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나는’ 고통을 영웅적 인내로 참아내고 1800년 1월 7일 형리들의 매질을 당하다 순교의 화관을 썼다.
이를 기려 청주교구는 신유박해 200주년 이듬해인 2002년에 망선 루가 바라다 보이는 길목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그 순교의 기억은 이제 날마다 현양비를 찾아 기도를 바치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신앙적 삶을 잇는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되살아 마음속에만 간직한 채 남문 터와 충청병영 우물터를 지나니 얼마 가지 않아 옛 충청병영, 현 중앙공원 보인다. 서울 탑골공원과 똑같이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앙공원 내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충북 유형문화재 15호)은 병영 누각인 망선 루는 변함없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바로 그 곁에 척화비가 세워져 있다. 역사가 얼마나 냉엄한지, 역사 변화의 진폭이 얼마나 큰지는 1871년 천주교와 양 왜를 배척하고자 세웠던 척화비가 석교동 노상 하수구 뚜껑으로 쓰이다 1976년에 발견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복자 원시보 야고보
1799년 4월 초. 청주 병영에 늙은 수인이 끌려왔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병영에 이송된 원시보(야고보, 1730~99)였다.
그 역시 회유를 받았다. 배교한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렇지만 끈질긴 회유와 위협에도 그는 순교를 하겠다는 원의를 굽히지 않았다. "내가 하느님을 위해 순교자로 죽기를 갈망한 지 9년이나 됩니다."이 말에 관장은 몇 날 며칠을 때렸다.
회초리는 약과였고 몽둥이와 곤장, 주뢰질 등 갖은 혹형이 가해졌다.
늙은 육신으로 그가 참고 견뎠을 고통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아전과 백성들은 그가 1000대가 넘게 맞았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온갖 형벌을 굳게 견디던 그는 그해 4월 17일 순교의 화관을 쓴다. 그가 죽은 뒤 시신 위로 놀라운 광채가 나타났고, 이 광채를 보고자 많은 외교인들이 모여 든다. 이 때 50여 가족이 입교했다고 전해진다.
◆배관겸 프란치스코 청주 병영에서 순교한 배관겸은 내포지역인 충청도 당진 진목 출신이다. 지금의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 리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마자 교리를 배워 입교한 그는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됐으나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해 석방된다.
이후 고향을 떠난 그는 서산 두름바위로 이주해 열성으로 교리를 실천한다. 그러다가 몇몇 신자들과 함께 면천 양제마을(현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옮겨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다. 드디어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한 주 신부가 이듬해부터 지방 신앙공동체 순방에 나선다.
이 소식을 접한 배관겸은 1798년 교우들과 함께 면천 양제마을에 강당을 마련한다. 하지만 그 때는 정사박해가 전국을 휩쓸던 때였다. 강당이 마련되자마자 그는 그해 10월 3일 밀고로 붙잡힌다.
홍주 진영으로 압송된 배관겸은 곧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관장은 그에게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가져다 바치라"로 강요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에 홍주 관장은 공주 감사의 명에 따라 1799년 배관겸을 청주 병영으로 보냈다. 당시 청주 병영에서의 고문은 혹독했다.
사료엔 "그의 온 살점은 너덜너덜하게 떨어졌고, 그의 뼈는 온 몸에서 튀어나왔다"고 전해질 정도다. 그런데도 그는 용기와 항구 심으로 시련을 감당했으며, 이듬해 1800년 1월 감옥 안에서 숨을 거뒀다. '배교의 죄를 순교로 씻은' 것이다.함께 체포돼 갇혀 있던 그의 아들 배청모(아우구스티노)는 아버지 장례를 허락받아 장사를 지낸 뒤 도피,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는 일을 하다가 다시 체포돼 1829년 6월 26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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