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 꿈은 어른이 되어 읍(邑)에서 사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시골마을에 없는 것들이 읍에 있었다. 극장이 있었다(그것도 두 개나). 롤러스케이트장이 있었다. 프라모델 조립을 파는 완구점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1년에 두세 번이나 가볼까 하는 특별한 곳, 어릴 때 그 읍은 진영읍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읍은 건너뛰고) 몇 십만이 사는 시에서 하숙밥을 먹으며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생이 되어선 단박에 서울특별시에서 살게 됐는데, '읍민이 되련다'던 어릴 때 꿈같은 건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런데 주체할 수 없는 가슴 떨림으로 한순간 꿈이 살아났던 것은 군대에서의 어느 날 저녁때였다.
"내가 보는 것들
내가 듣는 소리
내가 밟는 길이
글쓰기와 똑같은
사랑의 존재로
엉키어들었다" 우리는 군용 트럭을 타고 부대에서 꽤 먼 곳으로 무슨 작업을 하러 갔었고, 그리고 귀대할 때였다. 부대 인근의 소도시를 가로질러야 했다. 4차로 도로가 일직선으로 읍을 둘로 나누며 놓여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고 도로의 차들은 드물었고 가게마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참 곱다란 불빛들이 도로를 따라 길게 뿜어 나오고 있었다. 내 눈은 사제(社製, 私製)의 모든 것에 굶주려 있었고, 나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저녁을 맞고 있는 읍내의 건물과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시적이고 평화롭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때 진심으로 소망했다. '꼭 이런 정도의 작은 읍에서 살고 싶어!' 그 아름다워 보였던 읍은 강원도의 양양읍이었다.
제대를 하고 서울살이를 얼마간 더 하다가 나는 '탈서울' 하였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부산이다. 십 몇 년 동안, 연지동과 연산동에서 살았다. 재작년부터는 만덕동에 살고 있다. 10여 년 전, 어느 지면에 발표했던 나의 어떤 글에는 "나는 부산을 사랑하는가" 자문하고는 이렇게 자답하는 대목이 있었다. "부산을 사랑한다, 그러나 절실하게 사랑하지는 않는다. 광주에 살았다면 광주를 사랑했을 것이다. 속초에 살았다면 속초를. 이런 정도로 부산을 사랑한다."
방금 인용을 하면서도 느꼈지만, 부산이란 도시에 조금 냉담한 듯하면서 그러나 그 어떤 강심장도 꼼짝달싹 할 수 없는 확실한 사랑의 이치가 잘 표현된 문장이 아닌가 싶다. 내가 스스로 부산에 살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부모님의 바뀐 주소지에 개념 없이 얹혀살기 시작했을 뿐이라 해도 살다 보니까 정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부산을 떠나지 않는 한 살면 살수록 자꾸만 사랑하게 되는, 마침내 누구 못지않게 부산을 사랑한다고 할 날도 오지 않을까 싶은, 그러나 그렇다고 그 나중의 뜨거운 '부산사랑'이 무슨 자랑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별 노력 없이 시간의 힘에 의지했을 뿐이니까) 꽤나 지혜로운 문장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 나는 10년 전보다야 부산에 더 정들었고, 부산의 속살을 더 많이 알고 있고, 즉 더 많이 사랑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보다 정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과연 부산일까. 아니 감히(!) 부산인가. 즉 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부산은 너무 거대한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내가 몸을 의탁해 사는 곳을 사랑하긴 사랑하는데, 그게 분명 부산이면서도 부산이라고 해선 안 되는 그것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일까.
한 인간의 책임선을 넘어서는 사랑의 표현을 하지 말자는 말이기도 한데, 즉 내가 정녕 사랑하는 것은 산책이 가능한 거리(距離) 안의 것들일 뿐이다. 즉 내가 사랑한 것은 연지동이었다. 또 연산 9동이었다. 아니 연지동의 일부, 연산 9동의 일부였다. 그렇다, 나는 이미 연지동에 살 때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곤 했었다. 바로 이곳이야! 집을 나와 여기까지 내가 걸어온 골목과 골목,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온 만큼 또 걸어야 하는 다른 골목과 골목, 이 사랑스러운 것들, 그런데 이게 어찌 부산인가. 연지동이지! 아니 이게 어찌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인가. 내가 어릴 때부터 살고 싶었던 나만의 읍이지. 그래, 연지읍인 거야! 그 순간 부산은 우리 연지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 너머의 거대한 도시로 멀어져버렸다. 산책을 하며 고조된 어떤 뜨거운 감정이 그렇게 나의 동네를 연지읍이라고 애틋하게 호명하게 하던 것이다. 연산 9동의 일부도 그렇게 연산읍이 되었고….
하여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만덕읍은 나의 그런 세 번째 읍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재작년 겨울 이사를 왔던 때부터 바로 만덕읍이라고 호명했던 것은 아니다. 작년 어느 결에야 읍이라고 입에 붙기 시작했다. 1년 넘게 걸렸다. 뭐, 연지동이 연지읍이 되는 데는 약 3년, 연산 9동이 연산읍이 되는 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런데 말이다, 몇 년 만에 다시 가보았던 작년 겨울의 연지읍은 자잘한 추억과 뼈아픈 기억들로 나를 온통 살떨리게 하였고, 1년 몇 달이 지나 다시 가보았던 연산읍은 그 모든 황홀한 추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깨끗한 자태로 나를 경탄하게 하였는데, 한때 같은 읍민이었던 '습지와 새들의 친구' 홍정욱 선생에게 당부하고 당부하였다. "선생님, 나 대신 우리 연산읍 많이 사랑해주세요."
솔직히 말해 아직도 나는 연지읍과 연산읍을 더 사랑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옛마을일 뿐, 또 추억타령이란 죽은 어미 젖 만지기와 같으니, 이제부터라도 이 글은 내 산책의 경로가 경계선이 되는 우리 만덕읍에 바치는 연서가 되어야겠다.
만덕읍과의 사랑은 오후 8시가 다 된 어느 늦은 저녁, 엠피스리를 착용하고 집을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동신수퍼 앞까지 터덜터덜 걸어 나갔고 백양공원의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133번 버스의 회차지점까지 새로 걸었다. 집 나선 지 10분이나 되었나 싶은데, 회차지점에서 디지털도서관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정기간행물은 도서관 1층 로비와 2층 열람실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다. 자판기에서 250원짜리 커피를 뽑고 로비 한편의 소파에 앉았다. 소파 바로 옆에는 잡지 표지가 다 드러나 있는 벽면 서가가 있었다. 나는 '현대문학'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인의 단편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 한 편만 완독하고 나는 '계간 철학'을 집어 들었다. 특집의 원고들에서 이름을 아는 필자가 없었다. 제목이 마음에 드는 논문을 읽었다. 그러는 새 40분이 후딱 지나갔다. 나는 도서관을 나와 집까지 다시 걸어갔다. 내 방문을 열었을 때, 켜놓고 나갔던 텔레비전에서 9시 뉴스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감동했다. 내 평생 방금과 같은 멋진 저녁 산책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순식간에 상상이 되는 것이다. 내 나이 육십을 넘은 어느 날, 방금과 똑같은 저녁 산책이 있으리라!
쇠미산과 백양산의 뒷등에 편안히 얹힌 듯한 만덕읍에 이사를 왔던 첫날, 오래 살았다는 이웃 할머니에게 어머니가 물었다는데, 딱 하시는 말씀이 "응, 물이 좋은 동네야"라는 것이었단다. 말씀처럼 나는 2L 물통 서너 개를 배낭에 넣고 석불사 주차장 샘터, 쇠미산 체육공원 샘터, 백양산 곳곳에 있는 4개의 샘터, 도서관 옆 샘터, 석불사 경내의 샘터, 이렇게 그날그날 마음 내킬 때마다 골라 물을 뜨러 다니게 되던 것이었는데, 그런 내내 공들여 듣는 온갖 음악들, 그 감동의 축적이 만덕읍과의 약간 더딘 정 쌓기의 출발점이자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뿐이랴. 소설이나 시가 무슨 예술이냐, 이게 예술이야! 하고 세 번이나 감탄하였던 '멕시카나' 치킨집이 새벽 1시 반까지 영업을 하고, 손님과 주인 사이에 언제나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가 오가게끔 하는 도레미 슈퍼 아저씨의 싹싹한 친절은 우리 집 밥상머리의 잦은 화제가 될 정도고, 집에서 백양중학교 담을 따라 내려가 5분이면 닿는 만덕시장의 만물상에는 세상의 모든 생활필수품이 와글와글 모여 있고 기대 없이 산 7천 원짜리 LG 이어폰은 인터넷쇼핑의 5만 원짜리 이어폰 저리 가라였으며, 애견숍에서 샀던 2만 원짜리 개줄은 1년도 되지 않아 고리가 떨어졌는데 만물상의 5천 원짜리 개줄은 2년째 건재하니 알뜰살뜰한 양질의 물건들이 그득한 만물상이 다시 한 번 고맙고 볼 때마다 반가울 뿐이고, 어머니의 오랜 귓병을 낫게 한 동네 이비인후과는 진료실의 사방이 꽉 막혀 창문이 없는데도 의사의 환한 미소가 있어 '사람의 미소가 하늘로 산으로 뚫린 지붕창과 햇볕창이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었고, 반주소리 빵빵한 노래방도 만덕시장에 두 개나 있는 것이며, 이 늙은 노총각을 늘 분에 넘치게 스타일리시 하게 만들어주는 '빗과 가윗소리' 차르륵거리는 미용실의 라디오는 하필 내가 미용실 의자에 앉을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며, 아, 그래, 지난겨울, 눈 내린 아침, 백양산의 샘터로 물 뜨러 갔다가… '김태희는 여기 와서 반성 좀 해야 돼! 니가 예뻐 봤자 이 숲길보다 예쁘냐' 하고 외로운 노총각을 우주에서 가장 오만한 남자로 직립시키기도 하였으니 이 모두가 만덕읍이 부리는 조화였다.
그래도 나는 떠나온 연지읍과 연산읍이 아직도 너무 그립다. 만덕으로 이사를 왔던 얼마간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연인처럼 뼈가 저리게 그리웠다. 내 고향도 아닌데, 몇 년 살지도 않았는데, 피붙이처럼 그립다니 불가사의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애의 전염이자 확장이 본질이었다.
내가 정말 사랑한 것은 나의 글쓰기였다. 내가 쓰고 있는 글과 글을 쓰고 있는 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기운에 휩싸여 자주 산책을 나갔기 때문이다. 온몸을 수백 번 채우고도 넘치는 사랑이 어디로 옮아붙었겠는가. 집 나와서 내가 보는 것들, 내가 듣는 소리, 내가 밟는 길이 글쓰기와 똑같은 사랑의 존재로 엉키어들었다. 사랑의 시간 속에서 만난 것들은 하나같이 사랑이었다. 나의 읍내에는 사랑만이 가득하였다. 나는 떠나온 사랑을 그리워하였다.
결론은 이것이 되겠다. 살기 시작한 지 1년 몇 개월이 지나서야 만덕동이 만덕읍이 된 것은 그 즈음에야 사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랑에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사랑이다. 다시 말하지만, 벌써 세 번째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시 결론. 만덕읍과 함께 쓰게 될 나의 장편소설은 내 인생 최고의 장편소설이 되지 않겠는가. 세 번째 사랑이 가장 지혜로운 사랑이라고 다시 한 번 믿기에. 자, 오늘 연서는 이 정도면 됐다. 자고로 못 다한 말과 비밀이 있어야 사랑이니까.
김곰치 소설가
◇약력=199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장편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 '빛', 르포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 '지하철을 탄 개미'. 제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