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정사에서 개울 건너를 보면 산 아래 고가 한채가 보인다. 멀리서 봐도 단아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보면 더욱 정감이 간다. 사람들은 ‘고계정’이라 했으나, 현판당호는‘고계산방古溪山房’으로
되어있다. 퇴계10대종손 고계 이휘영(古溪 李彙寧)의 정자이다. 고계는 역대 퇴계종손 가운데 최고의 학식과 관직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지금 이 정자는 쓰러질 정도로 퇴락하다.
대원군이 썼다는 고상한 현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후손의 관리한계를 넘어서는 이런 집들은 관청에서 임시 조치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고계산방에서 나와 아래로 내려오면 ‘양평’이라는 지역이 나온다. 길가에 ‘춘당묘소春塘墓所’ 표석이 있다. 춘당은 송재의 외손자면 퇴계의 제자인 오수영吳守盈이다. 매헌 금보(梅軒琴輔), 매암
이숙량(梅巖 李叔樑)과 더불어 ‘선성3필宣城三筆’로 일컬어진 인물이었다. 아버지 진사 오언의吳彦毅가 송재 사위가 되어 이곳에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뚜렷한 한 집으로 존재했지만 지금 이 곳에는 후손이 살지 않아 잊혀진지 오래이다. 지난해 조각을 하는 후손 한 분이 참배하러 왔는데,
미처 묘소를 찾지 못해 그냥 떠난 일이 있다.
그런데 양평을 떠나려니 자꾸만 한 여인의 환영이 차창 뒤에 나타난다. 여인은 사랑하는 연인의
마지막을 보고 싶어 했고, 사람들은 보지 못하도록 했다. 보지 못하는 것이 숙명이었다. 여인은
양평의 길모퉁이에서 한없이 흐느꼈다. 그리고 떠나는 연인을 먼발치서 영원히 영결했다.
여인은 ‘두향杜香’이고, 연인은 퇴계였다. ‘퇴계에게 여인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지만,
분명 여인이 있었다. 단양군수 시절 인연이 맺어진 관기 두향이었다. 두향은 퇴계가 떠난 이후에도 잊지 못했고, 운명의 소식에 달음박질해서 왔다. 그러나 양평은 그녀가 더 갈 수 없는 한계의 땅이었다. 갈 수 있었음은 생전의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생전에도 가까이 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퇴계와 두향
어느 유명한 교수의 글을 보니 퇴계 관련 글에 “밤 퇴계가 어떻고 낮 퇴계가 어떻고 운운...”했는데 왜 이런 말이 쓰여 졌는지 모르겠다. 잘못 쓸 수 있다. 그렇지만 2권 산청지방과 3권의 안동부문은 오류가 너무 많다. 산청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는 ‘남명학연구원’에서 ‘남명원보’에 조목조목 그 잘못된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안동에 대해서는 최근 ‘안동문화원’에서 발간한 『안동문화』
이란 책에 서수용의 날카롭고 신랄한 비평이 있었다. 사실 산청과 안동에 대한 글은 너무 모르고
아무렇게나 쓴 부분이 많아 안타깝다. 교수의 이런 오류는 최근 발간된 『완당평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잘못 기술된 부분이 무려 100곳도 넘게 지적되어 저자의 구차한 변명을 듣게 했다.
1권이 나왔을 때 나 역시 그의 찬미를 찬미했고, 우리 조국의 문화에 대한 무지를 자괴했다. 그렇지만 2권을 보니 많은 부분 맛이 떨어졌고, 3권은 ‘정선지방의 관련 글’을 제외하면 전연 느낌이 와
닫지 않은 글이었다. 유가儒家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공부를 좀 해서 그 훌륭한 재주로 무르익은 글을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해 가을, 하회에서 부산의 어느 철학과 대학생들에게 ‘안동문화강의’를 했는데, 강의가 끝나자말자 “밤 퇴계와 낮 퇴계가 달랐다고 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 내가 좀 어이없어 머뭇거리니 인솔 교수가 더욱 명료하게, “말하자면 퇴계의 sex life에 대해 좀 말해 주십시요” 한다. 그때 필자는 아래의 퇴계의 언어를 말해주고, “여색에의 유혹은 퇴계에게 생과 사, 즉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라 했으니, 위의 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교수의 퇴계 관련 글은 조리가 맞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 가령 글 가운데 “퇴계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과거시험을 쳤다”는 부문과, 퇴계 둘째부인은 “요즈음 말로 싸이코였나봐요”로 답변했다는 기록은 어찌된 사정인지 모르나, 나로서는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근필李根必 종손과 고 청민 권오봉(靑民 權五鳳) 박사의 대답이라 한다. 두 분이 이런 대답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정황과 자료로 보아 이런 표현은 전연 엉터리에 가깝다. 여색에 대한 퇴계의 언어는 이렇다. ‘언행록言行錄’의 기록이다.
“내가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 어느 잔치 자리에서 소리하는 기생이 눈앞에 있어서 문득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생겼다. 힘써 욕망을 억제하여 구렁텅이로 빠지는 지경을 면하였다. 이런 순간이
바로 살고 죽는 기로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퇴계 장례식은 제문祭文과 만장挽狀으로 뒤덮였다. 오열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렇지만 여인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사랑하는 연인의 운명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게 했다. 여인은 울며 돌아가서 빈소를 차리고 추모했다. 그리고 3년 상이 끝나는 날 단양의 못에 가서 몸을 던졌다. 시신은
지나는 스님이 발견해 묻었다. 이 후 오랜 세월 스님들은 묘를 살폈다.
세월은 흘러갔다.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다. 왕조마저 바뀌었다. 후손들은 이 안타까운 ‘할아버지의 로멘스’를 이제는 숨기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두 분 만남을 숨김없이 밝히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두향의 묘는 최근 단양댐 건설로 이장했다. 그 때 비석을 세웠다. ‘杜香之墓’라 했는데, 이동은李東恩 퇴계 종손이 썼다. 두향의 존재가 인정되기까지는 450여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퇴계종택
두향의 한영이 끝날 즈음,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무인지경에 뜻밖에 일굴의 고가가 나타난다. 암자나 사찰로 어울리는 형국이라 할까? 도저히 일반 주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선입견만 없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집이 바로 퇴계의 집이다. 퇴계가 살았고, 후손들이 긴세월 살아왔다. 사람들은 이 집을 퇴계종택이라 한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 상계上溪라고 한다. 또 웃토깨上兎溪 라고도
한다. 지역 전체 명칭이 토계(土溪 혹은 兎溪)이나 이 곳은 조금 상류에 위치하기에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까, 온계의 개울은 온혜정류소 앞에서 청계淸溪와 합류하여 도계를 지나 여기에 오면 ‘토계’가 된다. 토계는 다시 상계와 ‘하계下溪’로 나누어지고, 하계는 다시 ‘계남溪南’이라는 지역과
구분된다. 상계는 ‘토계’를 고처 호로 삼은 퇴계에 의해 ‘퇴계’가 되기도 했다. 도산서원에서 동북쪽의 새로 난 뒷산 길을 넘으면 바로 상계이고 퇴계이다. 특징 없는 평범한 개울에 이와 같은 많은
지명과 의미와 역사가 존재함도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퇴계가 이 지역에 자리 잡은 해는 그의 나이 46세 때인 1546년이다. 처음에는 하계의 ‘동암東巖’이란 바위 부근에 집을 지었다. ‘양진암養眞菴’이라 했다. 이때 ‘후진교육’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은 당시 주민들에게 무위도식하는 사람처럼 보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시가 남아있다.
늙은이 웃으며 나의 일 묻기에, 山翁笑問溪翁事 밭갈이 대신에 혀로서 갈려하오. 只要躬耕代舌耕
‘혀의 밭갈이’는 교육이다. 가르치고자 하는 의욕이 넘쳐있다. 퇴계는 이곳에 오기 전 노송정 맞은편 산기슭에 살았다. 그 산 이름이 ‘영지산’이어서 ‘영지산인靈芝山人’이라 했다. 그러나 퇴계는 이 미호美號를 오래 사용할 수 없었다. 영지산 남록南麓에는 향리의 대선배 농암이 ‘영지정사’를 지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보했다.
그런데 토계로 온 퇴계는 초기 집터 찾기에 고심했다. 양진암을 지은 다음해 부근 ‘자하고紫霞皐’로 이사를 했고, 그해 다시 ‘대골(竹洞)’로 옮겼다. 2년 뒤, 최후 결심한 곳이 상계였다.
이 무렵, 마음은 이미 서울을 떠나 있었다.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를 역임했다.
48, 49세의 일이었다. 외직은 제성帝城과 강호의 거멀못이었다.
상계 개울가
퇴계의 49세는 정말 뜻 깊은 나이였다. 풍기군수이던 이 해, 그는 직속상관인 경상감사에게 간곡한 3번의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때마다 수리가 되지 않자 그해 가을 짐을 싸서 퇴계로 와버렸다. 그 결과 무단이탈죄목에 걸러 직첩이 강등되었다.다음해 50세, 퇴계는 드디어 퇴계의 개울가에 집을 지었다. ‘한서암寒棲庵’이라 했다. 시도 한 편 지었다. 제2의 인생 선언이며 다짐이었다.
악과 무도無道가 난무하는 정치세계에서 물러나(退) 선과 진리가 온존한 강호자연(溪)으로 돌아오는 일대전환이었다. 시는 이를 분명히 표방했다.
분수를 알고 벼슬에서 물러나 身退安愚兮 진리를 알고자 하나 이미 늙는구나. 學退憂暮境 개울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했으니,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을 보며 날마다 성찰하리. 臨流日有省
‘자기 성찰의 적지’가 바로 상계 개울가였다. 그래서 ‘개울가로 물러남’을 호로 삼았다. ‘退溪. 졸졸졸.... 퇴계의 개울물 정도의 소리만이 퇴계를 만족시키는 최적의 주거환경이었다. 퇴계는 바로
고요와 적막의 공간이었다. 퇴계는 그런 공간을 사랑했다. 율곡이 인생을 마감한 49세, 그 나이에 퇴계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늦었다’고 한탄했지만 사실은 적기였다. 퇴계는 이때 어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기뻐서 끼니조차 잊었다”고 했다. 『광뢰본廣瀨本』기록이다.
“세상 길 잘못 들어 세속에 골몰하기를 수십 년, 세월만 홀연히 보낸듯합니다. 돌아보며 망연히
탄식할 뿐입니다. 다행히 이제 본래 자리로 돌아와 몸을 수습하고 옛 책을 찾아 읽으니 마음과 뜻이 합쳐진 듯 합니다. 이른바 옛사람들이 ‘기뻐서 끼니조차 잊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개울가에 몇 칸 집을 짓고 이대로 죽을 때까지 지낼 것을 다짐하며, 고요히 사색하고 하늘의
신령한 힘을 입어 진리의 큰 빛을 틈새로 나마 볼 수 있다면 못난 선비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50이라는 나이? 50은 생의 황금기다. 나는 적어도 이 나이가 되어야 ‘인생을 안다’라고 생각한다. 길(道)은 적어도 이 정도의 나이는 들어야 보인다고 믿는다.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과거가 따뜻한 모습으로 곁에 와서 한없는 연민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털어버리고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되던 ‘보수保守’가 보호하고 지켜야 할 참된 보수로 다가와 어느덧 우리 곁에 우정처럼
서성거린다. 젊은 날의 온갖 정열과 이상과 분노와 좌절이 저만치로 밀려나서 마치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삶의 자락 한 끝이 이 무렵 봄의 새싹처럼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50세는 참다운 인생의 길에 대한 각성이 싹트는 나이였다. 퇴계는 그 나이에 그 길을 깨달았고, 그 길로 갔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신령한 힘과 진리의 큰 빛을 보기를 희망한다”고 했지만, 사실 이때 이미 보았다. 그 길을 쉬운 말로 ‘예뎐길’이라 했을 뿐이다.
우리 모두 50을 전후한 나이가 되면 자신의 삶의 길에 대한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길 바란다. 퇴계는 그 길을 가르쳐주는 한 분의 모델로 전연 손색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퇴계 종택 입지의 비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종택’이 이런 깊은 산 무인지경에 외롭게 자리 잡음이 필자에게는
항상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아니 수수께끼였다. 종택은 집성마을, 그것도 중심에 자리한다. 서라벌대학 최영기교수의 학위논문은 ‘종택의 입지조건’을 분석한 것인데, 퇴계 종택은 종택의 일반적
입지조건과는 전연 부합되지 않는다. 하회마을의 ‘충효당’, 양동마을의 ‘무첨당’을 비교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안동 지방 어느 종택도 이런곳에 위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그런 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퇴계가 그렇게 잡았으니 그러하다’는 설명으로 부족하다. 나의 이런 의문은 『도산전서』에 쓰여 있는 한 문구로서 어렴풋이 풀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군자의 학문은 위기爲己일 뿐이다. 위기’란 무엇인가? 하는 바 없이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이다. 마치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에 한 포기의 난초와 같은 것이다. 종일토록 향기를 품으나 그 자신은 그 향기로움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바로 군자의 위기의 의리에 부합하는 것이니, 마땅히 깊이 체득할 일이로다.
“원문: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爲爲己者, 無所爲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 有一蘭草, 終日薰香, 而不自知其爲香, 正合於君子爲己之義, 宜深體之”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의 한 포기의 난초”와 같은 존재의 구도! 이 구도가 퇴계와 퇴계종택이 입지한 비밀의 열쇠이다. ‘심산무림지중’은 바로 상계이고 ‘유일난초’는 곧 퇴계 자신이 아닐까? 퇴계는 정녕 쉽게 찾아올 수 없고 발견하기 어려운 깊은 산 숲 속에 자라나는 한 포기의 난초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도산서당은 더욱 그러했다.
도산서당이 위치한 당시의 도산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의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의 한 터전이었다.
지금 서원과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서 마치 종합 캠퍼스처럼 변했고, 퇴계는 훌륭한 시설을 갖춘
종합대학의 총장 같은모습을 연상을 하게 하지만 ‘도산서당’이 건립되던 초기 도산은 그야말로
‘심산 무림의 한 가운데’였다.
그렇다면 퇴계에게 ‘심산 무림 속’은 왜 필요한가?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 때문이었다. ‘위기지학’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다. 바로 ‘경敬’ 실천의 학문이다. ‘경’은 유가의 선禪이라 할 수 있다. 선과 매우 닮아 있다. 경 실천을 ‘거경居敬’이라 했다. 거경과 참선의 궁극은 무엇인가? 모두 인생의 길(道)을 찾기 위함이다. 길을 구함이 ‘구도求道’이고
찾음이 ‘득도得道’이다. 도는 진리이고 진리를 찾음이 구도이다.
구도의 첩경은 ‘고요’였다. ‘고가 온존한 지역! 그렇지만 그 고요는 산중 절 집 같은 곳은 아니었다. 인가가 집성한 동리는 더욱 아니었다. 동리도 산중도 아닌 그 완충지점의 ’심산 무림 속‘이 위기지학을 할 수 있는 적지였다. 강이 멀리 있지 않고, 곁에 개울이 알맞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 요컨대 ‘산수의 조화’는 가거지지可居之地의 절대 조건이었다. 상계와 도산은 바로 그 적지였다.
지금 퇴계종택과 도산서원이 ‘심산 무림 속’에 고독하게 자리 잡은 연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고요의 무림 속에서, 퇴계는 한 포기의 난초와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향기는 종일 훈향을 풍기나 스스로는 그 향기가 남을 의식치 않는 그런 인생을 소망한 것이 아니었을까?
퇴계의 편지
그렇다면 당시 깊은 산 무성한 숲 속에 한 포기 난초같이 꼭꼭 숨어살고 자 한 퇴계, 그가 어떻게 당대의 인물, 아니 세계적 학자로 위업을 남기게 되었는가, 그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퇴계나 도산에서 퇴계의 일상은 독서, 저술, 교육으로 요약되고 있다. 이 가운데 저술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저술, 시 쓰기, 편지 쓰기로 구분된다. 시는 2천270여 수, 편지는 3천100여 편
남아 있다. 시는 고요 속에서 내면을 가꾸는 위기지학의 요체였고, 편지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극복하는 수단이다. 주목하는 것은 단연 ‘편지’이다.
퇴계의 편지는 인생의 후반기로 가면 더욱 왕성하다. 청민(靑民 權五鳳)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가령 그의 나이 65세에는 392편, 66세에는 329편 등등. 그러니까 60세 이후에는 평균 3일에 2편씩 지었다. 거의 초인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아들, 손자, 조카 등 인친들에게
1천339편의 편지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들 준寯에게는 무려 613편, 손자 안도安道에게 123편의 편지를 남기고 있다.
한 통의 편지는 사람의 영혼을 흔들 수 있다. 편지는 마력을 지닌 글이다. 고매한 학자 퇴계의 편지 행간 한마디 한 구절은 친지, 제자들을 깊은 감동의 강으로 인도했다. ‘심산 무림 속’에 은거한 당대의 학자, 퇴계에게서 온 겸허하고 가식 없고 정성스런 편지는 단번에 존경의 물결이 넘치도록 했다.
편지를 써 줌과, 편지 받음의 형식과 인사가 교육 핵심이었다. 성리학의 한국적 전개의 꽃으로 일컬어지는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과 8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이기이론의 논의는 대표적 편지교육이었다. 편지는 자신의 의지와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당시 사화로 인해 극도로 위축된 사림집단 개개인을 격려하고 결속시키는 최대의 동인으로 작용했다.
편지 속에 경의 이론과 실천과 구현 방법이 있었다. ‘경’의 이론은 ‘이선기악理善氣惡’이고, ‘경’의 실천은 ‘이기분속理氣分屬’이고, ‘경’의 구현은 ‘이선理善의 구현’이었다. 그 궁극은 理의 집단이며 善의 집단인 사림집단의 집권이다. 훈구집단의 괴멸이 목표였다. 왜냐하면 훈구집단은 ‘악의 집단’으로 우리 조국을 야만국으로 만드는 역사상 소멸되어야할 한시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퇴계의 개울가 숲 속은 저술의 적지 일뿐만 아니라 악의 예봉을 피하면서 내일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단순한 숲 속의 은둔지가 아니었다.
편지교육
퇴계는 편지를 조심스럽게 임금에게도 썼다. ‘사직서’ 등의 글은 임금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무엇보다 임금을 우군으로 삼고자 했다. 퇴계는 역사의 치란, 성쇠가 군주의 한 마음에 있음을 주목하고 사직소 등의 편지를 빌미로 끊임없이 개진한다. 군주의 도덕적 마음가짐이야말로 악의 집단을 단숨에 분쇄하는 효과적이면서도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퇴계 특유의 거듭되는 취임과 사퇴는 파행정국의 암울한 정치현장을 임금이 하루 빨리 인지하고 개선하라는 충격요법이며, 임금 역시 책임의 일단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전일 임금의 한
마음에 모든 것을 걸고 개혁을 주도하다가 좌절한 정암 조광조의 사례를 볼 때, 퇴계의 방식은
매우 현실적인 대응방식이 아닐 수 없다.
퇴계의 현실대응 방법은 가령 기묘사화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놀랍게도 개혁실패의 원인을 정암 조광조의 ‘학문 부족’을 그 원인으로 진단한다. 이는 예사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젊은 이념가의 과격성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류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 한 예로, 보우普雨에 의해 승과가 설치되자 제자들이 모여 과거거부 입장 표명을 하자, ‘그런
약속은 지나치다’라고 하며 반대하고 있다. 또 정암이 체포되자 성균관의 학생들이 동맹휴교와
집단데모를 전개한 사실에 대하여 “관을 비우는 것은 임금을 협박하는 행위”이며, 데모에 대해서는 “악의 집단이 선의 집단을 탄압하는 구실만을 제공하였다”고 했다. 정암의 처형에 학생데모가 적지 않게 기여했으며, 사림의 집권이 이로 말미암아 상당히 후퇴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편지’들의 행간을 좀더 분석해보면, 퇴계는 국정파행의 원인을 일차적으로 ‘사邪와 정正의 공존’에 있고, 그 이차적인 결과는 항상 ‘사림집단의 재앙’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기理氣 개념 역시 ‘이와 기를 분속시켜 이물로 이해하려는 태도’ 즉 ‘이기분속론理氣分屬論’으로 나타난다. 이는 바로 대립되는 두 집단의 양립할 수 없는 공존상태를 의미하고, 그 공존상태는 극단의 화합할 수 없는 모순된 집단의 혼효이기에 하나의 집단이 또 다른 상대의 집단에 대해서 소멸, 혹은 제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국정에 나타난 정의 집단과 사의 집단을 학문일반의 영역으로 변이시켜서 공존할 수 없는 뚜렷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전개한다.
그래서 퇴계는 이기의 관계를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결시이물決是二物’의 분속된 요소들로 설명하며, ‘이기가 일물이 아니라는 이론-非理氣爲一物辯證論-’을 제시했다. 그것은 ‘사와 정, 현과 우의 공존(邪正相雜.賢愚混淆)’을 ‘분명한 모순된 공존(理氣不相雜. 理氣分屬論)’으로 이론화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황의 이기불상잡의 강조와 이기분속론 고수는 결시이물의 이론적 체계를 보다
선명하게 구체화하는 이론인 셈이다.
퇴계가 이理의 개념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함은 이의 지칭이 바로 사림집단을 의미하며, 그 집단은 정권창출을 위한 사사로운 정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역사를 감당해야할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림 개개인은 역경 속에서도 “항상 불변하고 날로 피폐해가는 세파 속에서도 힘차게 두 발을 굳게 딛고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등뼈를 곧게 세우고 두 발을 굳게 딛고 서 있지 않고서는 진흙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면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했다.
퇴계는 “사림의 화가 일어나면 사림 개인에 대한 상해를 가져올 뿐만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국가의 명맥마저 끊길 수도 있다.”하여, 사림의 존재를 나라의 명맥과 같은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선조임금과 독대한 마지막 대답이 “사림을 보호 하소서”였다.
퇴계의 ‘이선기악理善氣惡’, ‘이귀기천理貴氣賤’, ‘이존기비理尊氣卑’ 등의 유사한 표현은 바로 대립된 두 집단의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 국면의 성격을 반영한다. 표면상 공존(理氣相須)하지만 사실은 적대하면서 투쟁하는 관계(理氣相害)에 있다. 이기 개념을 선. 귀. 존 한 것과 악. 천. 비한 것의 분속적 대비는 퇴계가 내밀하게 고봉 기대승에게 고백한 ‘실재 사리의 판단’과 ‘새로운 이론의 수립’의 제시와 연계된다.
그렇지만 고봉은 ‘이발理發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라는 집요한 학문적 오류만을 지적하여, 끝내 퇴계의 꿈과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퇴계의 이기이론은 당시의 두 집단의 처절한 대결구도의 정국동향과 연계하지 않고는 어떠한 설명도 합리적인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퇴계에 대한 비판
그렇다면 퇴계의 이선기악 이기분속의 이론은 단순한 사림과 훈구의 대결논리, 즉 사화의 극복논리에 머무르고 마는 것인가. 도대체 그가 부르짖은 ‘도학’은 무엇인가?
퇴계는 한때 ‘무언의 정치가’로 비판받았다. 모순이 폭발한 시대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도학道學을 자임自任하고서 회피 한다”고 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는 본심이 아니다. 퇴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말의 수위를 조절하며 그 시기를 기다려 왔다. ‘그 시기’라고 판단한 시기가 무진년(1568년 선조1년)이었다. 그는 여태까지 참았던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정리해서 나라에 올렸다.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무진사직소戊辰辭職疏’, ‘무진경연계차戊辰經筵啓箚’ 등의 그것이다.
여기에는 악의 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시국의 황폐함을 전에 볼 수 없는 격렬한 논조로 개진하고
있다. 악의 집단은 “임금으로 하여금 아부토록 하며, 위. 아래가 서로 당으로 굳게 결속하여 아무도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도록 했다”고 하고, 그 와중에서 피팍 받는 사림세력의 괘멸상을 이렇게 피력했다.
“만일 어떤 강직한 선비가 있어 칼날을 무릅쓰고 일을 범하게 되면, 반드시 귀양을 보내어 죽이거나 (다져서)양념을 만들고(虀),(빻아서) 가루(粉)가 된 다음에야 그만 두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악의 집단은 “이익을 꽤하는 폐단이 고질화되어 있으며, 그 폐단은 구체적으로 포악한 관리들이 가택을 수색하고 장정을 잡아가며 협박하고 독촉함이 성화보다 급하여, 뼈를 깎는 듯한 착취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그 결과 “부모와 사랑하는 처자를 버리고 사방으로 숨어 다니며, 장정들은 떼를 지어 도적이 되고 노약자는 구렁에 떨어져 죽어 가며, 이로써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사태는 자칫하면 백성들의 분노와 원망으로 이어
저서, 종국에는 국가의 존망과 결부된다는 구체적 사례를 한. 위. 당. 송의 패망에 기여한 농민봉기를 지적했다.
지금 국가적 위기는 바로 이런 사태에 연유하여 우리나라가 야만국으로 전락됨을 자못 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우리 동방에는 옛날부터 성인이 살고자 했고, 또한 기자 같은 성인이
살았던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새삼스럽게 환기시키고 있다. 성인이 도학을 했기에, 도학을 해야 할 당위가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지금 도학을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 없기에 사상의 위기가 온 것이다. 전시대에 도학을 한 사람이 없지 않지만 그들이 문자와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에 제대로 과업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동방에 도학자가 없지 않았지만 문헌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 조예의 얕고 깊음을 상고 할 수 없다. 우제주, 정포은은 시대가 멀고 한헌. 일두 같은 학자들은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지만, 문헌을 찾을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참고로 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오직
회재 한 분이 있을 뿐이다.....조예가 깊지 않고 서야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퇴계는 도학을 한 사람의 공적을 치하하면서도 한결같이 ‘문자와 저술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한 탄식이 아니다. 문자와 저술은 문명국의 기반을 다지는 절대적 자료가 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퇴계에게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나마 문자와 저술을 남긴 회재(晦齋 李彦迪)가 더욱 소중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는 회재의 업적을 아낌없이 찬양했다. 퇴계의 엄청난 저술활동은 이러한 문명국의 문화의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퇴계는 우리나라가 ‘혼란에서 질서로’, ‘야만국에서 문명국’으로 그나마 명맥을 이어온 연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가 되었고, (이를 계승한) 고려는 5백 여 년 동안 세상에 도리가 일어나고, 문화의 풍토가 차츰 열리어 중국으로 유학하는 학자가 많아지고 경학(도학)이 따라서 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혼란이 질서로 변하였고, 중화를 사모하여 오랑캐를 면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우리 동방은 현재 ‘문헌의 나라(文獻之邦)’,‘군자의 나라(君子之國)’라고 일컫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이 문명국이 됨은 도학이 존재하게 때문이다. 도학은 문명국의 결정적 학문이다. 성인은 주체자이며 도학은 정수이다. 도학을 성스러운 학문 ‘성학聖學’이라고 하는 것과, 퇴계, 율곡의 핵심적 저술을 각각 『성학십도聖學十圖』,『상학집요聖學輯要』등으로 표현함도 이런 문명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우리나라가 도학을 해야 할 당위성은 천도가 무너지는 반문명적 전개와 더불어, 중국을 의식한 자주적 화의론華夷論의 수립에 그야말로 위기가 왔기 때문이다. 퇴계가 우리나라를 ‘동로東魯’라고 지칭함도 이러한 위기의식과 문명의식을 함께 반영하는 표현이다. ‘도학’이 이처럼 중요함은 ‘도학이 바로 하늘의 학문(道之大原出於天)’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요컨대, 퇴계의 꿈과 이상, 그리고 철학과 사상은 우리나라를 야만국으로 전락시키는 악의 집단을 축출하고, 문명국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에서 결정結晶된 것으로, 그는 이를 온몸으로 성찰하고, 온몸으로 인식하며 온몸으로 실천하려고 했던 한 지성적 지식인의 고뇌에 찬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생애는 기본적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미래에 희망을 품으면서, 우리나라를 진리의 나라로 끌어올리려는 크고 원대한 우리 민족 모두의 이상과 함께 한다. 이를 위해 퇴계는 자신의 시간표를 지켜보면서 내일을 기약하며 최선을 다해 실천에 옮겼다. ‘편지’는 그것을 담아냈고, 그것이
그대로 도학이고 정치이며 교육이었다. 상계는 그것을 이루어낸 일차적 현장이며, 도산은 그 이차적 현장이었다.
‘심산 무림 중’은 외부 세계와의 단절의 환경을 조성한다. 그런 지형적 단절을 ‘편지’라는 수단으로 극복하고 있다. 조용한 ‘편지 교육’이었다. 카네기의 명언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편지의 효용성’을 퇴계의 편지가 증명했고 그 기적을 낳았다.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치밀하게 실행했다. ‘내성적인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고 하는데, 퇴계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즉위와 더불어 등장한 사림집단의 집권과 이 무렵 퇴계 영향권 인물들의 대거 요직 포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