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 가네코 후미코의 공동투쟁과 그들을 지원한 사람들
훌륭한 박열의사기념관 개관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관계자 여러분들의 오랫동안의 귀중한 노력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보냅니다. 박열의사와 함께 가네코 후미코가 전시된 것에 대해, 후미코 고향마을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오늘, 회원 6명이 이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저희들은 두 달에 한 번 연구회모임을 갖고 있습니다만, 매번 기념관 건설의 상황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누면서 개관식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국민문화연구소의 여러분들과는 공동연구회를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했으며, 연구교류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山梨金子文子研究会)는 후미코의 옥중수기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ごうさせたか)』를 독서회 형식으로 읽어 왔습니다. 6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거쳐 올 4월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마지막 박열과 후미코와의 만남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유년시절부터의 생활체험과 진지한 독서를 통해 획득한 사상을 통해,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살고, 참된 일을 하고 싶어 했던 후미코 이었습니다. 그럴 즈음 반역의 느낌이 충실한 박열의 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열을 만나면서 그의 강한 힘에 이끌려, 함께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까지의 모든 생애로 받아들인 박열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한편 두 사람은 , 서울과 부강에서 각각 3․1운동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독립운동은 박열에게 활동의 장소로서 일본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후미코에게도 그의 사상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박열과 후미코는,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약속을 합니다. 그 하나는 「한쪽이 사상적으로 타락해 권력자와 악수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공동생활을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2년 후에, 법정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동지들에게 해가 미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적극적으로 진술하고, 그 후에도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법정을 사상저항의 장으로,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천황제와 정면으로 맞서게 됩니다.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약속의 단계에서부터 상당한 각오가 두 사람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함께 생활하면서 후미코는 「흑도(黑濤)」,「후토이센징(太い鮮人)」,「현사회(現社會)」를 박열과 함께 편집하거나 집필했습니다. 3․1운동과,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에 대한 편견등과 같은 수많은 원고를 썼습니다. 그 문장 속에서 박열과 함께한 투쟁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검열로 인해 검은 묵으로 지워져 읽을 수 없게 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기 전부터 이미 극심한 탄압에 맞서 싸워왔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박열이나 후미코나 결코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신문도 잡지형식으로 바꾸고 매수도 늘렸습니다. 후미코는 광고청탁을 위해 방문하면서 인삼을 파는등, 자금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1923년 4월 자택에 불령사(不逞社)를 설립해, 수차례 모임을 갖고, 강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등 두 사람의 활동은 의욕적이었습니다.
강사로 초대된 사람들로는 모치츠키 카츠라(望月桂), 가토 카즈오(加藤一夫), 그리고 출옥회를 열어주었던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는 사건 후에 박열과 후미코를 지원했습니다. 이전부터 박열을 알고 있었던 극작가 아키다 우자크(秋田雨雀)는 「일본의 청년보다 훨씬 진지하고 인간적이다.」면서 박열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작가 이다 토쿠타로(飯田徳太郎), 사토무라 킨조(里村欣三), 나키니시 이노스케 등도 박열, 후미코의 판결을 듣고 한탄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을 자책하는 비통한 생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임에서 강연을 했던 가토 카즈오는 당시, 오다와라(小田原) 해안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가토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를 돕고 있었던 이시가미 타로(石上太郎)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박열사건의 가네코 후미코 여사도 사건 전에는 박열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오다와라까지는 당시에 두 세 시간은 걸렸을 것입니다. 강연회의 강사의뢰건으로 방문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무엇을 이야기 했을까요.
후미코가 세상을 떠난 50년 후, 후미코의 본가에서 추도회가 열리면서 당시의 동지들이 모였습니다. 변호인 나카무라 코이치(中村高一)변호사도 참가하고 당시의 동지였던 구리하라 카즈오(栗原一男), 한현상(韓晛相), 장독수(張讀壽), 후루카와 토키오(古川時雄)등도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두 사람을 지원했습니다. 특히 구리하라 카즈오는 옥중의 박열과 후미코를 헌신적으로 지원하고, 옥중의 두 사람의 글과, 단가(短歌)를 「자아인(自我人)」이라는 소속 그룹의 신문 등에 싣거나, 후미코의 사망 후에는 옥중수기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ごうさせたか)』를 출판하는 등, 끝가지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원했습니다. 후세 타츠지(布施辰治)변호사의 빈틈없고 자애가 넘치는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흑우회동지가 후미코의 죽음을 알고 가장 먼저 도치키(栃木)로 달려가는 등, 그들의 깊은 동지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박열의 형인 박정식씨가 후미코 생전의 뜻을 받아들여,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까지 유골인수을 위해 와 주었던 사실을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두 사람을 지원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연구는 박열, 후미코 연구에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귀중한 자료를 풍부하게 전시하고 있는 박열의사기념관은, 박열과 후미코 그리고 후세타츠지변호사 연구의 거점이 될 것이며, 나아가 역사를 증거하고, 미래로의 길을 비춰주는 기념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박열의사기념관에,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배울 수 있도록, 이 훌륭한 기념관의 개관을 일본에 돌아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2012년 10월 9일 야마나시가네코후미코연구회 사토 노부코(佐藤信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