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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백.......
한국산악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 최홍건 중소기업연구원장은 산행에서 인생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로프를 매고 북한산 인수봉을 올랐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아예 산악 동아리에 들었다. 졸업 후 공직에 있으면서 산을 자주 타지 못했지만 산업자원부 차관을 마치고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뒤에는 ‘세계의 지붕’들을 차례로 섭렵했다.
유럽 최고봉인 러시아의 엘브르스(5,642미터)를 비롯해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5,895미터),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8,091미터)와 임자체(6,189미터), 알프스의 몽블랑(4,807미터)도 모자라 60세 이상 노인들로만 구성한 ‘실버원정대’를 이끌고 에베레스트 최고령 등반 기록까지 세웠다.
이쯤 되면 산에 관한 한 아마추어로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몸을 더 낮춘다.
“산은 정상에 다다를수록 경사가 급해집니다. 경사가 급해지면 몸을 숙이지 않고는 오를 재간이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정성을 끝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안전한 하산까지 마무리해야 비로소 등산에 성공하는 것이지요.”
세계 최고의 프로 산악인이나 한국 최고의 아마추어 등반가나 ‘높은 곳에 오르고 나면 비로소 낮아지는’ 생의 이치를 깨닫는 방식은 똑같다.1)
칠보시 2) - 조식 曹植 192-232. 위 魏 나라 조조 曹操의 아들로, 재주가 뛰어났지만 형의 위세에 눌려 오랫동안 떠돌아 다녔다. 조조의 아들 중에서 가자 재주가 뛰어난 인물은 셋째 조식이었다. 조식의 문재 文才는 출중했다. 어릴 때부터 나라 안팎의 칭송이 그치질 않았다. 그를 총애한 조조가 맏아들 조비를 제쳐 놓고 후사를 이을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맏이인 조비는 그런 동생을 몹시 미워했다. 후계 문제에서도 밀릴 뻔하자 그의 증오와 질투는 극에 달했다. 조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제위에 오른 그는 동생을 죽이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혈육을 죽였다고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네 글재주가 좋다고 하니 일곱 걸음 안에 시를 한 수 지어봐라. 성공하면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칙령을 어긴 죄로 처형하겠노라.” 이 기막힌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칠보시」다. 콩과 콩깍지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에 비유하며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풍자한 것이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식이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대결적 언어’로 맞섰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처럼 진정한 소통은 ‘잘 익은 언어’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앞뒤 돌아보지 않고 되받아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불통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미 동서고금의 수많은 고전과 명구들이 다 알려준 교훈인데도 우리는 이 소중한 원리를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툭하면 ‘삿대질 어법’으로 서로 상처를 입히고, 자기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날것의 언어’로 마구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다 상대방이 ‘낮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하려 하면 거두절미하고 딱 자르며 되레 승리자가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조직에서든 적을 만들고 결국엔 스스로 죄초되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 한 뿌리에서 난 ‘콩’과 ‘콩깍지’ 아닌가. 참다운 ‘소통의 기술’을 익힌 사람이 많아야 성숙한 사회가 되고,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성숙한 국가도 이루어진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네
콩을 걸러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가마 밑에서 타는데
콩은 가마 안에서 우네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거늘
서로 볶기를 어찌 그리 급한가
따뜻한 편지(寄 家 書 기가서)
이안눌3)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다
欲 作 家 書 說 辛 苦 욕작가서설신고
흰머리 어버이 근심할까 두려워
恐 敎 愁 殺 白 頭 親 공교수살백두친
북녘 산에 쌓인 눈 천 길인데도
陰 山 積 雪 深 千 丈 음산적설심천장
올 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적었네.
却 報 今 冬 暖 似 春. 각보금동난사춘
어머니의 맞춤법은 자유자재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어중간한 글쟁이보다 더 선명하고 사려 깊은 표현이 담겨있었다. 말하자면 주제가 뚜렷한 글이었다.
‘눈 뜨고도 코 베인다는 서울에서 그래 고생 많지. 우짜겠노 성심껏 살면 된다.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어렵더라도 참고 꼭 건강해야 한다. 몸이 힘이다….’ 이런 내용인데 이건 꼭 틀린 맞춤법 그대로 읽어야 어감이 온전하게 전해져온다.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훈장집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그나마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셨다. 한문도 조금 깨치셨고 어른들이 다 저 세상으로 가신 뒤, 열세 살 때는 직접 제문을 짓기도 하셨다. 그렇지만 자고 나면 바뀌는 맞춤법을 제때 따라잡지 못해 편지를 쓰거나 누구네 생일날을 기록할 때는 맞춤법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걸 보고 내가 빙긋거리면 ‘반편이글’이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고 퉁을 주곤 했다.4)
삼성의 이병철 창업주는 여백과 직관의 힘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그는 거실에 木鷄(목계; 나무로 깎아 만든 닭)를 걸어 놓고 자신에게 마음의 여백을 일깨웠다고 한다. 목계는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기성자라는 사람이 왕을 위하여 싸움닭을 키웠다. 그런 지 열흘이 지나 왕이 물었다. “닭이 이제 싸울 수 있겠는가?” 기성자가 아뢰었다. “아직 안 됩니다. 지금은 허세만 부리고 교만함며 제 힘만 믿습니다.” 열흘이 지나 다시 묻자 “아직 안 됩니다. 다른 닭의 울음소리를 듣거나 보면 당장 덤벼들 태세입니다.”라고 답했다. 열흘이 지나 재차 묻자 이렇게 고했다. “안됩니다. 다른 닭을 보면 노려보면서 성난 듯이 합니다.” 또 열흘이 지나 재삼 묻지 기성자가 이렇게 아뢰었다. “거의 되었습니다. 싸울 닭이 소리를 질러대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이제야 싸움닭으로서의 덕을 갖추었습니다. 상대편 닭이 감히 상대하지 못하고 도망가 버립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힘을 뽐내지 않는다. 아무리 약한 적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스스로 여백의 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와도 목계처럼 초연한 마음으로 평상심을 유지한다. 이처럼 진정한 여유는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법이다. 정의의 홍수 속에서 텍스트나 데이터에 함몰되지 않고 열린 사고와 투명한 직관으로 자기만의 ‘진리’를 찾을 줄 아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5)
주원장과 장사성6)
중국 원나라 말기, 두 사람이 천하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소금장수 출신의 장사성이었고, 또 한 사람은 절에 버려졌던 고아 출신의 주원장이었다. 주원장은 장사성의 주력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포위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적의 배후로 가는 길에 협곡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협곡의 외길 한가운데에 산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원장은 새끼를 품은 동물을 해지면 업보를 받는다는 어린 시절 절에서 들은 가르침을 떠올렸다. 결국 진군을 포기하고 산오리가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아 제 발로 길에서 벌어날 때까지 여러 날을 기다렸다. 주원장이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자 장사성은 그의 작전을 눈치 채고 역공을 펼쳤다. 전세는 주원장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상황은 분명 장사성에게 유리했는데 오히려 부장들이 부하를 데리고 주원장에게 투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에서 오리 한 마리의 생명까지 소중히 여기는 ‘인간적인 장수’라면 믿고 따를 수 있는 큰 그릇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주원장은 많은 피를 보지 않고도 천하를 얻었다. 인간적인 리더십의 승리였다.
일본 막부 시대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인간적인 매력으로 신뢰를 얻은 리더였다. 경쟁자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검을 꺼내 놓고 자랑하자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에겐 별다른 보물이 없다. 그러나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부하 500명이 있다. 그들이 최고의 보물이다.”
진정한 리더의 조건 중에서 가장 으뜸은 인간적인 덕성이다. 배려나 공감 등의 키워드가 새로운 리더십의 코드로 떠오른 데도 이유가 있다. ‘섬김 리더십’이란 말도 괜히 생긴 게 아니라, 과거처럼 카리스마로 일관된 리더십이 아니라 섬김과 교감, 배려의 리더십이 더 공감을 얻는 시대다. 줏대없이 무조건 떠받드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적인 매력과 신뢰에 바탕을 둔 리더십. 그래서 가장 뛰어난 리더의 수식어는 항상 ‘가장 인간적’이라는 표현이다.
정주영
3대에 걸쳐서 이룩할 만한 위업을 당대에 다 이루고 간 정주영 회장의 에너지는 ‘긍정의 힘’에서 나왔다. 그는 뭐든지 가능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부하 직원이 무슨 무슨 이유로 이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면 “해봤어?”라는 말 한마디로 ‘부정의 싹’을 잘라버렸다.7)
결국 사람이다.8)
북송 8대 황제였던 휘종은 사물의 가치를 보는 눈이 남달랐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예술품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한번은 휘종이 화가들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독특한 그림 문제를 냈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데, 특히 감춰진 절을 제대로 표현하라는 주문이었다. 많은 화가들이 골머리를 앓다가 희미하거나 작은 절을 그려 넣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유독 한 작품에는 절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절 대신 깊은 산속 계속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스님의 모습만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을 본 휘종은 기뻐하며 1등을 주었다. 다른 화가들은 절과 탑을 어떻게든 화폭에 담으려고 했으나 이 화가는 그냥 물을 길어 가는 스님의 모습만으로도 근처에 절이 있음을 그 이면에 숨은 뜻이나 가치를 제대로 찾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15세기 최고의 과학자였던 장영실이 그저 부산 동해현의 관노로 일생을 마쳤다면 어찌 되었을까? 눈 밝은 임금 세종은 장영실의 비상한 능력을 알아보고 신분의 한계를 넘어 종 6품인 상의원 별좌에 그를 임명했다. 세종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그는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최첨단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를 발명할 수 있었다. 측우기와 해시계 등 세계를 놀라게 한 성과를 이루어낸 것도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세종의 혜안 덕분이었다. 세종은 작은 재능이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ㅈ는 등 그 사람의 장점을 취하고 포용하면서도 엄격한 기준으로 혹독하게 훈련시킬 줄도 알았던 강유 겸비의 리더였다.
그런 점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인재를 사는 것과 가장 깊은 마음으로 인재를 감동시키는 것의 두 바퀴 수레 이론을 터득한 중국 거상 호설암의 경륜도 대단하다. “능력 있는 사람을 찾으면서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 나의 비결은 돈으로 인재를 사는 것이다. 사물을 대하는 눈이 날카롭고 사람됨이 믿을 만하면 돈은 아무리 많이 줘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정말로 걸출한 인재를 얻으려면 돈을 많이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情정과 義의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진정한 인재를 얻을 수 있다.”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략을 함께 써라
하늘의 시간과 땅의 시간이 이렇게 다르다. 사람들은 일 년에 한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가 안타깝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天界와 人間界의 시간은 상대적인 것.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천지차이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똑같은 떡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장자의 齊物論에도 ‘이 세상에 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큰 산도 좁쌀만큼 작게 보이는 수가 있다’고 했다. 부싯돌이 번쩍하는 불빛의 길이가 바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한 백거이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 경영 키워드인 창조와 혁신의 원리도 시각과 관점의 문제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 『1위의 패러다임』을 읽은 한국 기업인들이 일본을 방문해 저자 노나카 이쿠지로에게 물었다. “최고의 기업들은 어떻게 일류 이노베이터를 발굴하고 키우는 겁니까?” 그러자 그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략을 함께 쓰세요”라고 대답했다. 히토쓰바시 대학 국제기업전략 교수인 그는 “성공하는 리더에게는 사자와 같은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직면한 과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필요에 따라 ‘여우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면서 “국면에 따라 사자와 여우를 구분하여 활용하는 균형 감각을 갖추라”고 조언했다. ‘천사처럼 대담하게 악마처럼 세심하게’라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철학처럼, 이상을 추구할 때에는 대담하게 발상하고 이를 실현할 때에는 세심하게 실천하라는 말이다.“트렌드 분석과 시장조사는 당신의 경쟁자도 하고 있으니 경쟁자가 못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9)
인생과 삶에 대한 남다른 통찰로 유명한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일화도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가 9․11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축 프로젝트(그라운드제로 프로젝트)로 수많은 건축가들과 경합을 벌일 때였다. 2002년 10월 어느 쌀쌀한 날, 프로젝트에 관한 관계자의 브리핑이 끝난 후 그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로 참화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건축가 중에서 항만관리청 관계자들의 제안을 받고 그곳에 내려가 보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뉴욕의 불빛 속에서 현장을 바라보니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했다. 하늘 아래 드러난 참화의 벽들을 직접 보면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을 경험하는 순간,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건축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수많은 거장들을 제치고 당당히 따낸 ‘완벽한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며 추진되고 있다.
그가 ‘애송이’ 시절 베를린의 유대박물관을 설계할 때도 그랬다. “우리가 베를린으로 이사했을 때는 유대박물관을 다윗의 별처럼 설계하면서 마음속 베를린 장벽을 지워버렸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 동과 서를 가른 장벽이 없었음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1988년 말엽이었던 그때 나는 장벽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나의 생각 위에 도면을 그렸고, 장벽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러다 실제로 장벽이 무너졌을 때는 얼마나 놀랍던지!” 미국인이지만 유대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었을까? 이 박물관에 대한 그의 남다른 시각 덕분에 결국 그는 깊이 있는 건축가, 철학적인 건축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이때 겪은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어떤 건물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게 곧 현실이 된다는 걸 건축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결국 현실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다.10)
십 년을 경영하여 - 송순11)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 세 칸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
욕심과 여유는 다르다. 욕심은 ‘마이너스 에너지’여서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채워진다. 그래서 자신과 남을 다 같이 빈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유는 ‘플러스 에너지’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아니라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더 큰 풍요를 선사한다. 그래서 욕심 많은 부자는 남의 곳간을 탐내고, 진정한 부자는 남의 곳간이 가득한 데서 기쁨을 느낀다. 세상엔 부자가 많지만 이처럼 마음까지 풍요로운 부자는 드물다. 척 피니라12)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집도 차도 없다. 시계도 몇 만 원짜리를 차고 다니고 밥도 허름한 식당에서 먹는다. 그러면서도 25년간 4조 원이 넘는 돈을 남 몰래 기부해왔다. 그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숨은 억만장자’다. 미국과 베트남,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곳곳의 질병 퇴치와 교육․인권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지만 ‘비밀엄수’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정말 가난했다. 아일랜드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우산팔이, 카드 판매, 골프장 캐디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하며 자랐다. 사회에 나와서도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지중해 항구에서 미국 선원들에게 면세 술을 파는 일을 계기로 돈을 벌었고, 마침내 세계적인 소매 면세점 듀티 프리 쇼퍼스 DFS를 창업해 ‘면세점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엄청난 돈을 모은 그는 1984년 자선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부인과 자녀들 몫으로 얼마간 남기고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부자란 과시나 허영을 멀리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앤드루 카네기의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돈은 매력지이지만, 그 누구도 한꺼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는 그의 깨달음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부자들은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미국의 두 번째 부호인 워런 버핏13)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재산의 대부분인 300억 달러를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멀린다가 운영하는 자선재단에 맡긴 것이다. 그는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는 세 자녀의 재단에도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했다. 이에 대해 버핏은 이렇게 말했다. “투자자들이 자기가 직접 투자하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은 돈을 벌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부자가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빌과 멀린다는 나보다 내 돈을 더 잘 써줄 겁니다.” 다른 사람이 버핏만큼 부와 명성을 이루었다면 직접 재단을 세워서 자기 이름으로 기부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게이츠 부부의 활동을 지켜본 후 자신의 돈으로 최대한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게이츠재단에 재산을 맡긴 버핏의 결정은 아름답고도 지혜로운 것이었다. 남에게 베풀면서 인생의 행복을 실현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트레일러 주차장의 버스에서 자라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전 세계의 가난한 지역에서 에이즈와 폐결핵에 맞서 평생을 의료 활동에 바치며 아이티와 르완다에 최초로 공중보건소를 세운 폴 파머 박사, 75년간 세탁소를 운영하며 근근이 모은 15만 달러를 흑인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미시시피 대학에 기부한 오시올라 맥카티, 학생들을 위해 5만 7000제곱미터 넓이의 타이거 우즈 학습센터를 세운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 양 열두 마리를 우간의 한 마을에 보내 학생들의 자립을 도운 헤퍼 인터내셔널…….14) 이들 크고 작은 ‘영웅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진짜 부자‘들이다. 송순이 ’십 년을 경영하여‘ 얻은 교훈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심보다 세상을 품는 그릇이 얼마나 더 소중한지를 깨닫는 것이다. 진정한 부자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을 위한 욕심으로는 절대로 큰 그릇을 채울 수 없다.15)
품격을 말한다.16)
품격이란 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사물의 품위를 말한다. 品품은 여러 사람이 모여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좋은 것이 나타난다하여 ‘물건’을 뜻하기도 한다. 특히 부수로 쓰인 구에 큰 의미가 있다. 사람의 입과 말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는 곧 많은 사람의 ‘평판’과도 통한다. 그래서 사람의 품격을 인격이라고 한다.
장기려 박사의 인생은 글자 그대로 ‘성자의 삶’이었다. 그의 남다른 삶은 청년 시절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기도에서 출발했다. 나머지 인생은 이 서원을 지키기 위한 순간순간의 집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의전에 입학하기 전 가슴 깊이 새긴 이 맹세를 영혼의 청진기 삼아 ‘인술의 꽃’을 피워냈다. 그가 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겪은 시련과 깨달음의 과정들의 더욱 아릿하다. 그는 ‘의학이란 눈 내리는 길을 걷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매 걸음이 미답의 영역에 발자국을 남기는 개척의 역사를 이루지만 세 걸음, 네 걸음 앞으로 나아갈수록 첫 번째 발자국과 두 번째 발자국은 계속해서 내리는 눈에 지워지고 말지 않던가. 그래서 의학은 늘 새롭고도 낯선 영역이다.” 일제 시대에 간 설상절제 수술을 처음으로 해내고 1959년 국내 최초로 간 대량절제수술에 성공했으며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만든 사람,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서원을 한 이후 죽을 때까지 병든 사람과 함께 한 사람. 그는 인생의 진정한 품격이 무엇인지를 가장 낮은 곳에서 보여준 최고의 삶을 살다 갔다.
‘영등포의 슈바이처 박사’로 불렸던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의 삶도 그렇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갔다온 엘리트였지만, 종합병원 내과 과장 자리를 버리고 노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등 저소득층 환자를 돌보는 ‘쪽방 의사’로 살았다. 위암선고를 받고도 죽기 며칠 전까지 청진기와 진료차트를 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러 다녔다. 청빈하게 살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한 이들의 삶은 일생에 딱 한 번 꽃을 피우는 대나무와 닮았다.
조금씩 흙을 쌓아 산을 이루다.17)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시함을 하기 세 시간 전부터 빈 코트에 나와 홀로 슈팅 연습을 한다. 남보다 먼저 도착해 남조다 더 열심히 훈련하는 스타. 놀라운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유투를 던지는 동안 한 번도 눈을 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두 눈을 감고 슈팅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은 ‘조금씩 흙을 쌓아 산을 이룰’때까지 그가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거듭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미국 프로농구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구단주 팻 크로스였다. 그는 조던의 탁월한 능력과 집중력이 바로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던이 자신의 시간과 땀을 투자하고, 다른 선수들보다 먼저 코트에 나와 연습하는 과정은 곧 팀원 전체의 승리로 이어졌다. 자신의 흙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팀원들이 함께 흙을 쌓고 산을 이룰 수 있도록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경기를 하는 것은 각각의 선수들이지만 챔피언십을 획득하는 것은 팀”이라는 그의 말처럼 이 같은 노력은 개인의 성공을 넘어 팀의 승리로 확장되고 승화된다.
성공학의 대가인 나폴레온 힐18)도 꾼준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어느 날 일흔이 넘은 강철왕 카네기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카네기는 세 시간 이상의 인터뷰에도 지키지 않고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인터뷰를 계속하자”고 말했다. 그는 카네기의 열정에 이끌려 결국 사흘 밤낮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지상에서 가장 긴’ 인터뷰를 끝내자 카네기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까지 말한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자네가 이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데 대략 20년 정도 걸릴 텐데 그 동안 재정적인 지원은 없을 걸세. 그래도 하겠나?” 카네기의 뜬금없는 제안에 놀라긴 했지만 그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카네기가 소개해준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 그들의 철학을 정리했다. 그 유명한 헨리 포드와 루스벨트 대통령 등 수많은 성공인물들이 그를 거쳐 갔다. 그가 20년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이든 ‘미적대지도 말고 너무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꾸준하게 노력하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카네기의 말대로 그는 20년짜리 프로젝트를 통해 그만의 ‘성공 프로그램’을 창안해냈다. 그 결과, 그는 성공학의 대가가 되었고, 그의 책은 전 세계적인 밀리언셀러가 되었으며, 그의 강의 내용은 현대 성공학의 바이블이 되었다.
'돌부처‘로 불리는 바둑의 이창호 9단 역시 절대로 ’미적대지도, 서두르지도‘ 않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훈련과 연습을 게을리 하는가? 그는 열한 살에 데뷔해 2년 뒤인 1988년 최다 대국, 최다승, 최고 승률, 최다 연승의 진기록을 남겼지만 하루도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느림보‘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서는 ’조금씩 흙을 쌓아 산을 이룰 그날까지‘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연습하는 그의 가치관이 녹아 있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더욱 의미 있다. 느린 행마로도 스피드를 제압할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느린 쪽이 단지 둔한 수라면 스피드에 밀릴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 둔한 수를 잘 두고 그 때문에 초반엔 자주 밀리곤 한다. 그러나 빠른 게 꼭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느림에도 가치 있는 느림이 있다. 가치 있는 느림은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러니 절대 서두를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많이 겪는 유혹이 눈앞의 목표에 대한 조급함이다. 짧은 시간에 성과를 얻는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더군다나 배움의 과정은 멀고도 험할 수 밖에.
자탄 ------ 이황19)
‘이미 지난 세월이 나는 안타깝지만
그대는 이제부터 하면 되니 뭐가 문제인가
조금씩 흙을 쌓아 산을 이룰 그날까지
미적대지도 말고 너무 서두리지도 말게.“
사립문 ------ 주돈이20)
우중문에게 -을지문덕
신비로운 계책이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듯하고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다 아는 듯하네
싸움에서 이긴 공 높고도 높으니
이제는 만족하고 그치는 게 어떠한가
고구려 명장 乙支文德(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을 앞두고 수(隨)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다. 적장을 한껏 치켜세우면서 이제 그만큼 공을 세웠으면 됐으니 돌아가는 게 어떠냐고 종용하는 내용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最古의 한시.
;서기 612년 1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했다. 전투병의 수만 113만 명, 보급병은 두 배나 되었다. 수 양제는 엄청난 규모의 수륙양군으로 고구려를 초반에 쓰러뜨릴 작정이었다. 유군이 고구려의 관문인 요동성을 먼저 공격했다. 그러나 난공불락이었다. 몇 달을 공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 수군은 浿江패강(지금의 대동강)을 거슬러 펴양성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양제는 외곽을 치는 전략을 버리고 곧바로 평양성을 함락하기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사령관으로 삼아 30만 5천명의 별동대를 투입했다. 수의 별동대가 진격해오자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적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호랑이 굴’로 직접 들어갔다.. 당시 그의 명성이 대단해 수 양제가 우중문에게 ‘고구려 영양왕과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아 오라’는 밀지를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우쭐해진 우중문은 밀지를 잊어버리고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그 사이 을지문덕은 수나라 병사들이 지친 상황을 간파했다. 敵情적정을 눈으로 확인한 그는 수나라 군대를 더욱 지치게 만들라고 유인작전을 세웠다. 『수서』에 ‘수나라 군대가 하루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했다’고 기록된 것처럼, 그는 자꾸 패하는 척하며 적을 평양성 30리 안팎까지 유인했다. 수나라 군대가 보기에 이젠 평양성만 무너뜨리면 끝이었다. 그러나 평양성은 철옹성이었다. 게다가 군량미는 떨어지고 병사들은 기진맥진했다. 바로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내 “그만 하면 됐으니 물러가라”고 타이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물러가면 우리 왕이 너희 황제를 찾아가 뵙겠다”고 퇴각 명분까지 제공했다. 속으로 잘됐다 싶은 수나라 군대는 이를 명분 삼아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이 살수(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러 무방비 상태로 강을 건널 때, 뒤쫓던 고구려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때의 상황은 ‘수나라 군대가 하루 사이에 450리나 도망쳤고 30만5천명 가운데 살아남은 병사는 겨우 2,700명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을지문덕은 전략과 전술에서도 우중문을 능가했지만 심리전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그는 지략과 용맹을 갖춘 명장이면서 시문에도 뛰어났던 것이다. 7세기 무렵의 장군이라면 힘을 앞세우는 것만으로도 족했겠지만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智將지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욕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명분을 살려 칭찬까지 해가면서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할 줄 알았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한 것이었으니 그의 내공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속에는 ‘싸움을 끝내지 않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숨겨져 있다. 병법에 ‘명장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라고 했으니, 을지문덕은 ‘좋은 리더를 넘어 위대한 리더’의 조건을 다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21)
난을 가꾸는 뜻 - 정섭
구 畹원 넓이 난초 가꾼 강변 텃밭
팔 畹원 만 그리고 다 마치지 못하였네
세상만사 만족스러운 때 언제 있었더냐
나머지 가꾸는 일은 뒤에 오는 사람의 몫
-대나무를 그리면서 벌과 나비가 수선 떠는 것을 피하려 꽃을 그리지 않았다는 정섭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난 시다.
이 시에 나오는 구원은 초나라 시인 굴원의 난초 밭 넓이를 말한다. 시인은 구원 중에서 팔원만 그리고 나머지는 뒤에 오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노래한다. 완전무결한 결과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배움, 또는 덕성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결과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성과에 집착한다. 그렇다 보니 과정의 정당성과 노력의 가치보다 요령과 편법이 앞서는 현상까지 생긴다. 미국의 에너지 관련 기업 엔론22)이 분식회계23)와 정경유착 스캔들로 수백억 달러의 빚을 안고 파산한 것도 그렇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까지 엔론은 잘나가는 미국의 7대 에너지 기업이었지만 결국 얄팍한 요령과 편법이 큰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 반대의 경우다. 이 영화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결과지상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에게 메달의 가능성은 그리 없어 보였다. 이미 은퇴하여 아줌마가 다 된 선수들을 불러 모아 급조한 팀인데다, 국가대표 선수라고 하지만 일당이 2만 원밖에 안 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최종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며 분투한 끝에 은메달을 따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다. 영화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에게 감독이 ‘울지 말자’고 말한다. 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메달보다 그 과정이 소중했던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도 실패한 인물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제갈공명24)은 뛰어난 지략과 병법으로 수많은 적군을 물리쳤으나 결국 사마의25)에게 졌다. 그러나 역사는 사마의보다 제갈공명을 더 기억한다.. 한때 로마를 위협하고 지중해 최강자로 군림했던 한니발26)은 어떤 가. 그 역시 패장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굴복시킨 로마의 시키피오27) 장군보다 그를 더 명장으로 기억한다. 이들이 마지막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삶의 가치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의 과업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수행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덕을 쌓는 것에 끝이 없듯, 미완에 그치더라도 가치 있는 노력의 의미는 빛난다. 그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뒤에 오는 사람’들이 평가할 몫이기 때문이다.28)
이런 저런 생각 - 두순학29)
큰 바다 파도는 얕고
사람 한 치 마음은 깊네
바다는 마르면 바닥을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 알 수가 없네.
당나라 시인 두순학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하다 마흔 여섯이 되어서야 겨우 진사가 되었다. 아마도 그의 깊은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일까. 이 시를 우리 속담과 겹쳐 읽으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참으로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첨단 과학으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게 마음이다. 사회적인 여론 분석이나 소비자 분석의 경우, 적중률이 90퍼센트를 넘는다고 하지만 결국 10퍼센트의 오차로 뜻밖의 결과와 맞닥뜨리는 일이 많다. 기업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때 확신을 갖고 기대했다가 고객들의 차가운 반응에 당혹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시끄러운 술자리에서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 금방 알아챈다. 혼잡한 번화가를 걷다가도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즉각 고개를 돌린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려야 할 곳의 안내방송이 나오면 용케도 그 소리를 알아듣고는 잠에서 번쩍 깨기도 한다.������이것을 칵테일파티30)효과라고 한다. 그런데 이 칵테일파티 효과가 ‘확증편향’31)이라는 심리현상과 결합되면 올바른 결정을 방해하기도 한다. 주식을 산 사람은 주식이 오르길 바라는 마음에 ‘오른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정보에만 집중하게 된다. 주식을 팔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매수시점을 찾기 위해 부정적인 정보만 찾게 된다. ‘1등 당첨복권 나온 집’이란 현수막이 걸린 가게만 골라 복권을 사는 심리, 같은 돈이라도 ‘공돈’이 더 쉽게 주머니에서 나가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우리는 비이성적인 심리 요인 때문에 합리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우를 자주 범한다. 이는 곧 자기 생각에만 골몰하게 되는 ‘아집’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칵테일파티 효과에 자주 빠진다. 마음의 비밀은 이처럼 얄궂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사람 마음’은 생각하기에 따라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변화무쌍한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기만 하면 그것이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29년, 랜킨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조사에서 보통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쓰기 9%, 읽기 16%, 말하기 30%, 듣기 45%의 비율로 시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듣기’를 가장 많이 활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마음을 아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마음을 얻으려면, 듣되 제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갖춰진 ‘경청’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상의 방법인 것이다. “내 귀가 나를 가르쳤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칭기즈칸32)은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경청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고 한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과 교감을 나누기를 좋아했던 그는 늘 듣는 귀를 열어두고 누구의 말이든 세심하게 들었다. 그는 ‘우선 적게 말하라’와 ‘듣지 않고는 결정하지 마라’를 생활철칙으로 삼았다. 소소한 결정에도 참모들의 의견을 구했으며, 심지어는 포로로 잡혀온 적에게도 귀를 열어 생사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다. 일본경제신문에서 잘나가는 영업사원들의 영업화술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무조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응답이 1위로 나타났다. 상대에게 더 많이 말하게 할수록,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길수록 상대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잘 지킨 칭기즈칸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이전에 마음과 귀를 열고 상대의 마음을 보려고 노력했다. 이는 부하들에게도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33)
대장부의 자세-맹자는 출세했을 때 방탕해져 타락하지 않고, 궁지에 처했을 때 뜻을 바꿔 행동을 달리하지 않으며, 부당한 힘에 굴복하지 않는 게 정정당당한 대장부라고 했다. 이처럼 절개를 가진 대장부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인 ‘인(仁)’에 살고,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자리인 ‘예(禮)’에 서서, 세상에서 가장 밝은 길인 ‘의(義)’를 걷는 사람이다. 그래서 절개가 내면에 있으면 ‘인덕(仁德)’이 되고 밖으로 드러나면 ‘지조(志操)’가 된다고 했다. 34)
영화「카사블랑카」에서 이런 감정의 절제를 공감할 수 있다. 1940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가지 직전의 스산한 분위기였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카페에서 한 흑인 피아니스트가 「As time goes by」를 연주하고 있을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조용히 옛정을 회상한다. 여자는 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남자는 그녀를 떠나보내려 한다. 남자 역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지만 욕심을 내어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그녀의 새로운 사랑을 지켜주어야 하기에 ‘슬프지만 극도로 절제된’ 모습만 드러낸다. 험프리 보가트의 절제된 눈빛과 퉁명스런 대사가 오히려 그의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명장면이다. 그래서 그런가. 카사블랑카의 꽃말은 ‘웅대한 사랑’이다.35)
제자에게 - 범중엄36)
푸른 산 그윽이 아름다운 경색
조상이 후손에게 물려주신 것
후손들아 얻었다고 기뻐만 하지 마라
다시 그것 거둬갈 사람 뒤에 있느니라
범중엄은 시에서 밝힌 것처럼 푸르디푸른 산의 절경을 보고 당장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 경탄하는 게 아니라 그 몫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산의 절경을 보고 조상과 후손을 동시에 생각하는 도량을 지녔다. 이 시를 읽다가 선인들의 가훈을 엮은 『호걸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를 다시 펼쳤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호걸이 되는 일이 내가 실로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너희가 이 가훈을 지켜서 날마다 삼가 ‘삼가는 선비’로 불리며 선조들게 부끄러움을 끼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는 신숙주의 가르침이다. 호걸은 누구나 꿈꾸는 남자의 이상이지만 ‘삼가는 자세’가 없으면 오히려 화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받은 자식이라고 모두 훌륭하게 되었을까. 4대가 연거푸 형벌로 죽은 김수항의 집안은 모진 역경 속에서도 아버지의 당부를 지켜 가문을 되살렸지만 신숙주의 넷째아들은 ‘호걸욕심’을 부리며 서른도 되기 전에 재상이 되었다가 과욕으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훌륭한 유훈보다 그것을 지키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사례다.
미인의 뒷모습 -진초남
미인이 등 돌려 옥난간에 기대었으니
안타까워라 꽃다운 얼굴 한번 보기 어렵네
몇 번을 불러도 고개 돌리지 않는 그녀
급한 마음에 그림을 뒤집어서 본다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은 내면이 도타운 사람이다.
가만히 있어도 불러보고 싶은 사람,
뒷모습이 참해서 돌려보고 싶은 사람,
못 보면 안타까워 옥난간을 휘돌아가고픈 사람…….
그러나 잊지 말자. 학문이나 예술에는 스승이 있지만,
매력만은 스스로 가꾸는 것임을.
북쪽 하늘 맑다기에 - 임제37)
북쪽 하늘 맑다기에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은유와 상징의 조화가 있는 시이다. 기생 이름인 한우(寒雨)가 ‘찰 한, 비 우’이니 문자 그대로 ‘찬비’ 아닌가. 비 맞고 춥게 자게 됐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속내는 한우와 함께 잘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임제의 로맨틱한 프러포즈에 한우는 이렇게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얼어 자기는커녕 원앙금에 비취 이불을 덮고 따뜻하게 녹아 잘 수 있게 하겠다니 그야말로 임제가 듣고 싶은 대답이었다.38)
발 세우고 때 기다려 천하를 얻는다
겉보기에는 한가로운 것 같아도 백로는 먹이를 잡으려고 ‘발 쫑긋 세우고’ 한껏 몰입해 있다. 그는 한 끼 식사를 위해 숨을 죽인 채 최대한 집중하고 있다. 물고기를 정확하게 사냥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타이밍’이란 게 있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때’를 잘 맞춰야 하는 것이다. 그 ‘때’가 우연히 찾아올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경우에야 찾아온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도 마찬가지다. 선지자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 또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보다 ‘그래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주----------------------------
1) 고두현. 옛시읽는 CEO. 21세기북스. 2008, pp. 31-32.
2) Ibid., pp. 47-51.
3) 조선의 이태백으로 불린 이안눌李安訥이 함경도 관찰사 시절에 눈이 천 길이나 쌓인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며 지은 시다.
4) 고두현. 옛시 읽는 CEO. pp. 36-37.
5) 고두현., pp. 56-57.
6) 고두현. 옛시읽는CEO., pp. 67-68.
7) 고두현., pp. 77.
8) 고두현., pp. 98-100.
9) 고두현., pp. 114-116.
10) 고두현., pp. 116-117.
11) 면앙정 송순(1493-1583)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강호가도의 선구자이며 시조에 뛰어났다. 담양 구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작품으로는 『면앙정가』가 유명하다.
12) 억만장자가 아니었던 억만장자?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앞에 ‘남몰래 4조원 기부’라는 말이 붙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비밀스럽게 기부했던 미국의 자선사업가 척 피니는 진정 ‘억만장자가 아닌 억만장자’였다. 그의 수중에 들어있던 억만금은 그의 것이 아니라 불우한 이들의 것이었다. ‘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물푸레)가 최근 출간됐다. 그는 25년간 4조원을 기부하면서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고 남은 생애에 나머지 4조원도 모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선사업가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도.전 재산의 85%를 기부한 전설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도 아닌 아일랜드계 자선사업가 척 피니다”라고 보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의 삶은 억만장자의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검소함이 몸에 밴 그는 집도 차도 없고 항공편을 이용할 때에는 이코노미 클래스를 고집한다. 1만4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나서는 것도 꺼린다. 그러나 그의 기부는 결국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재산을 좋은 곳에 써야 한다는 걸 알리기 위해 비밀스런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부자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일깨웠다. “내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자랄 때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삶을 살려고 한다. 삶의 모습은 자라온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는 열심히 일했지만 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늘 살폈다.” 피니는 뉴저지주 아일랜드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우산팔이.골프장 캐디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자수성가했다. 통신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일본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코넬대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대학을 다니면서 지중해 항구에서 미국 선원들에게 면세 술을 파는 일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소매 면세점 ‘듀티 프리 쇼퍼스’(DFS)를 창업해 큰 돈을 벌었다. 돈을 버는 것은 좋아했지만 돈을 소유하지 않은 피니. 부호명단에서 빠지기를 바랐기에 ‘빈손의 억만장자’로 불린다.
13) 워렌 버핏(Warren Edward Buffett), 기업인. 출생 -1930년 8월 30일 (미국), 소속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 가족 -아들 하워드 버핏, 아들 피터 버핏, 학력 -컬럼비아대학교경영대학원, 경력 -1965년 버크셔 헤더웨이 회장. 1961년 Dempster Mill Manufacturing Co. 회장 출처:네이버검색. 워렌버핏:미국의 주식투자가. 1930년 미국에서 증권 세일즈맨인 아버지밑에서 태어난 워렌버핏은 콜롬비아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 100달러로 주식투자를 시작, 한때 미국 최고의 갑부였으며 현재도 미국 5위 안에 드는 갑부인 워렌 버핏은 전설적인 투자의 귀재로 평가받고 있다. 워렌 버핏은 가치있는 주식을 발굴해 매입하고 이를 오랫동안 보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90년대 미국에 신경제와 인터넷 기술주가 급등할 때 "미국 주식은 80년대의 일본과 같이 버블로 터져 버릴 것이다."라는 버블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버핏은 뉴욕에서 2천Km 이상 떨어진 자신의 고향 내브래스카주 오마하를 거의 벗어나지 않지만 주식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는다 해서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이라고도 불린다. 버핏은 자신이 운용하는 벅크셔 해서웨이의 주주총회 때나 얼굴을 내밀 뿐 거의 외부 접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14) 빌 클린턴. Giving. 물푸레(2007).
15) 고두현., pp. 128-131.
16) 고두현., PP. 134-137.
17) 고두현., PP. 140-145.
18)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 1883-1970)은 세계적인 성공학 연구자이다. 유년시절에 새어머니로부터 "너는 틀림없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적인 말을 들으면서, 지역의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변호사기 되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갔으나, 학비와 생계를 위해서 어느 잡지사의 기자로 취직하게 되어, 마침내 당대 세계 최고의 부자인 앤드류 카네기를 만나게 된다. 앤드류 카네기의 유지를 받들어 1908년부터 1928년 까지 20년에 걸쳐서, 앤드류 카네기가 건네준 명단 507명을 직접 인터뷰와 조사를 하면서 성공의 원리를 정리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공학 역사의 위대한 걸작인 Law of Success (1928)를 완성하였고, 이후 일반인들을 위한 다이제스트 판으로 정리한 Think and Grow Rich (1937)은 성공학의 명작으로 지금까지 5천만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말년에 자수성가한 억만장자인 W 클레멘스 스톤 회장 (W. Clement Stone 1902-2002)을 만나면서, 오늘날의 PMA 프로그램을 완성하게 된다. 이것은 현재 나폴레온 힐 재단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프로그램으로 보급되고 있다.
19) 1501~1570. 이 시는 이황이 64세 때 쓴 것이다. 이 시는 그가 도산서원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찾아온 제자 김취려에게 준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대는 아직 젊으니 앞으로 성심껏 노력하면 잘될 거라고 격려하면서, 너무 조금하게 굴지도 말고 그렇다고 어영부영하지도 말고 그저 꾸준하게 해나가라고 조언하고 있다.
20) 周敦頤(1017~1073)
21) 고두현. 옛시읽는 CEO. 21세기북스 (2008) pp. 181-184.
22) 엔론 크레디터스 리커버리 코퍼레이션(Enron Creditors Recovery Corporation, 舊 엔론 코퍼레이션(Enron Corporation, 舊 NYSE:ENE))은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 본사를 둔 미국의 에너지 회사였다. 2001년 하순에 부도가 나기전까지 엔론은 22,000여명의 사원과 2000년 1110억 달러의 매출액을 보고한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인 전기, 천연 가스, 펄프 및 제지, 통신사업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포천》지는 엔론을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했었다. 2001년 말에 엔론이 보고한 재정상태가 제도적, 조직적, 체계적, 창의적으로 계획된 회계부정(분식회계)로 지탱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당시 엔론의 회장이었던 케네스 레이회장과 최고경영자였던 제네스 킬링은 연방법원에서 사기와 내부자 거래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1] 당시 엔론의 감사를 맡고 있던 미국의 5대 빅펌중 하나였던 아서 앤더슨역시 이사건으로 인해 파산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엔론은 기업 사기와 부패의 유명한 상징이 되었다.[daum백과사전에서]
23) 기업(企業)이 자금(資金) 융통(融通)을 원활(圓滑)히 할 목적(目的)으로 고의(故意)로 자산(資産)이나 이익(利益)을 부풀려 계산(計算)하는 회계(會計)[daum 한자사전 중에서]. 엔론 월드컴 머크 등 미국 거대기업들이 잇따라 분식회계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다우존스와 나스닥지수가 최근 폭락하고 세계경제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환위기 직후 드러난 한보철강 대우그룹 동아건설 등 대기업의 엄청난 분식회계 규모에 온 국민이 놀랐던 적이 있어 분식회계라는 용어가 별로 낯설지 않다. 분식회계란? 분식(粉飾)이란 말은 실제 모습보다 좋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얼굴에 분칠을 한다는 뜻이다. 분식회계란 경영자가 기업 재무제표에 자산이나 이익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방법 등으로 회계장부를 엉터리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분식이라는 뜻과 비슷한 'window dressing(진열장 장식하기)'이라고 주로 쓰고 좀더 범죄 성격이 짙은 것은 'accounting fraud(회계 사기)'라고도 표현한다. 분식회계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기업가치와 경영자에 대한 평가는 기업이 얼마나 건전한 재무상태를 유지하고 좋은 경영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대부분 경영자는 가능하면 자산과 이익을 좋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세금을 회피하거나 비자금을 조성할 목적으로 매출을 줄이거나 비용을 실제보다 부풀려 순이익을 줄이고 싶어하는 경영자도 있을 것이다. 또 차입조건을 개선해 자금조달을 용이하게 하거나 주가를 조작해 차익을 얻을 목적으로 재무제표를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경영자에게 재무제표를 제멋대로 작성하게 내버려둔다면 이런 이유들로 인해 회계장부의 신뢰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기업간 실적을서로 비교하는 것도 어렵게 된다. 따라서 기업 회계처리와 재무제표 작성 때 똑같이 적용되는 기업회계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이 기준을 준수해 작성된 재무제표는 적정한 것으로 간주되고 주식 투자자나 채권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의사결정 정보로활용하게 된다.하지만 기업회계기준을 지키지 않아 외부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으로부터 부적정ㆍ의견거절 의견 등을 받은 재무제표는 신뢰할 수 없는 정보다. 왜 문제시되나 분식회계로 인해 왜곡된 재무제표가 일반인에게 공표된다면 그 피해는 매우 클 수 있다. 사람에 비유하면 재무제표는 건강진단보고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의 최고 혈압은 120~130 정도다. 그런데 과거에는 건강상태도 괜찮고 좋은 성적을 내던 어떤 야구선수가 최고 혈압이 250까지 갑자기 높아졌다면 고혈압 때문에 운동선수로서 계속 뛰는 데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건강진단보고서가 왜곡돼 정상적인 혈압을 가진 것으로 보고된다면 아무도 그 사람이 아픈지 모를 것이며 야구단은 거액의 계약금과 연봉을 주고 그 선수와 재계약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 선수에게 투자한 구단은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기업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재무제표가 왜곡된다면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 것이다. 투자자들이 엉터리 재무제표를 믿고 기업가치를 과대평가한다면 비싼값에 주식을 샀다가 큰 손해를 볼 것이고 금융기관은 빌려준 돈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할 것이다. 국가 전체적으로는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해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외국 투자자들도 이런 기업에 투자해 손해를 본다면 우리 기업과 국가 전체를 신뢰하지 못하므로 투자자금을 회수하게 되고 결국 외환위기와 같은 비운을 다시 맞을 수도 있다. 분식회계 어떻게 하나? 분식회계는 대개 자산이나 이익을 부풀리고 부채나 손실은 줄이기 위해 행하지만 그 수법은 매우 다양하다. 흔히 쓰이는 수법으로는 아직 판매하지 못한 재고자산을 마치 팔려나간 것처럼 가짜 매출전표를 끊어 매출채권으로 기록하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하면 수익항목인 매출과 자산항목인 매출채권이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 있지도 않은 재고를 남아있는 것처럼 꾸미거나 재고자산 값어치를 높게 평가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비용항목인 매출원가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회수하기 어려운 부실채권에 대해 대손충당금(손실에 대비해 미리 쌓아두는 돈)을 고의로 적게 쌓아 자산과 이익을 부풀리거나 비용으로 떨어내야 할 부분을 자산으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문제시된 월드컴도 여러 가지 지출로 처리해야 할 항목을 자산인 통신설비로 기록해 이익을 부풀린 것으로 드러났다. 일상적인 지출을 자산항목인 개발비로 변칙회계처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수법이다. 이밖에 일부 부채항목을 누락시켜 빚이 적은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가치가 없어진 자산을 장부에서 없애지 않고 옛 가격대로 남아있는 것처럼 꾸미는 방법도 흔히 이용된다. 미국 엔론사는 자회사나 특수목적회사를 설립해 분식회계를 행한 것이 특징인데 자회사와 반복적인 거래를 통해 매출과 이익을 부풀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마치 부자(父子)간에 서로 반복적으로 물건을 사고 팔아 장사가 잘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 특수목적회사를 통해 거액의 부채를 조달했는데 이미 빚아 많아 은행에서 더 이상 차입하기 어려운 아버지가 아들 명의로 돈을 빌린 것과 같다. 결국 과다한 빚으로 인해 그 가족은 파산위기에 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식회계로 인한 기업 도산은 다른 이유로 인한 경영실패보다 사회적인 손실이 훨씬 더 크다. 기업경영에 문제가 있으나 재무제표를 제대로 작성했다면 이해관계자들은 재무제표를 통해 그 기업의 문제를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주들은 주가가 더 떨어지기 전에 주식을 팔 수 있고 금융기관 등 채권자들도 미리 빚을 회수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 기업은 파산할지 몰라도 조기에 적절한 판단을 한 이해관계자들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의 파산이 지연돼 사회적으로 더 큰 손실을 초래하는 사태도 막을 수 있다. 이처럼 분식회계는 한 기업만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 전체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에 고질적인 관행을 뿌리뽑는 데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인용-http://cafe.daum.net/i-do]
24)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와룡(臥龍)·복룡(伏龍)으로도 불렸다. 제갈량의 생애는 대체적으로 형주 시절, 그리고 입촉과 유비가 죽기 전, 유선대에 이르러 남정과 북벌을 할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출생과 형주 시절- 181년 낭야군의 지방관이었던 제갈규(諸葛珪)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세가 되기 전에 양친을 여의어 한동안 백부 제갈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제갈현이 죽자 형주로 온 제갈량은 스스로 농사를 하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당시 유비도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삼고의 예를 하여 결국 제갈량을 영입하게 된다. 이때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안을 한 계책이 그 유명한 '천하 삼분지계'이다. 하지만 원소를 정벌하고 남하하는 조조에게 맞설 수 없던 유비로써는 남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제갈량은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이 되고, 손권도 제갈량의 요청에 응해 유비와 동맹을 맺게 된다. 그리고 손권과 유비는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한다. 209년 겨울의 일이다. 연의에서와 달리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나와있지 않으나, 《선주전》에서는 조조를 적벽에서 격파하고 남군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양공재기》또한 화용까지 유비가 조조를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본다면, 이때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참모로써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시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음을 들어 삼국지연의에서와 같은 그러한 활약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후 유비의 형남 4군 정벌에서도 제갈량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기록은 안나와있으나 군사중랑장이 되어 내정에 힘썼다는 기록을 본다면, 내정에서의 수완은 이미 유비군 내에서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입촉 및 유비 사망 전까지 - 연의에서는 방통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사에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에서 성도로 향할때에 형주에서 호응하여 서쪽으로 진군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214년 유장이 항복한 후에는 '군사장군'에 임명이 되는데, 제갈량은 이후 유비가 황제가 되어 승상이 되기 전까지 이 직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위나라에서 한중 공방전을 치르기 전까지 제갈량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점 등을 들어 제갈량이 입촉 당시 혹은 유비가 죽기 전까지 중용이 안되었다고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후전에서는 이미 조조가 한중을 공략하기 전에 제갈량의 정치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는 점, 또한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까지 좌장군이었지만 황충은 한중전 당시 하후연을 전사시켜 좌장군보다 높은 정서장군이 되었다는 점에서, 군사장군이라는 직위도 유비가 임시로 만들긴 했으나 그 권한이 상당했으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만드는 등 익주의 구조조정에 노력했다. 유비와 조조의 일생일대의 격전이었던 한중 공방전 역시 연의에서는 신산귀모의 지략을 펼쳐서 조조를 격파한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으나 실제 유비를 수행한 참모는 법정, 황권이며 이때 제갈량은 성도에서 유비를 위해 군사물자를 조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참 또한 전쟁에 중요하므로 제갈량이 중용되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후에도 계속 군사장군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황제가 된 후에는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이 된다. 223년 유비가 백제성에서 붕어할 때에는 이엄과 함께 탁고를 받는다.[daum백과사전에서]
25) 자는 중달(仲達),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제(宣帝). 하내(河內) 온(溫:허난 성[河南省] 원 현[溫縣]) 사람이다. 서진(西晉)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 후한(後漢)말 경조윤(京兆尹)이었던 사마방(司馬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201년 군(郡)의 상계리(上計吏)로 추천되었고, 나중에 조조(曹操)에게 등용되어 문학연(文學)·황문시랑(黃門侍郞)·주부(主簿) 등의 관직을 거쳤다. 위(魏)가 건국되자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어 여러 가지 계책을 올렸는데, 특히 조조에게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 20만 명을 둔전(屯田)시키도록 건의했다. 문제(文帝:曺丕) 때에도 요직을 역임했다. 234년 명제(明帝:曺叡) 때 제갈량(諸葛亮)의 도전을 받아 오장원(五丈原)에서 대진(對陣)하던 중 제갈량이 진중에서 죽음으로써 그 군사는 물러갔다. 다음해 태위(太尉)가 되었고 그뒤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여 낙랑(樂浪)·요동 등의 4군(四郡)을 위나라에 병합했다. 명제가 죽고 제왕(齊王)이 즉위한 뒤 시중(侍中)이 되었고 지절도독중외제군사(持節都督中外諸軍事)로서 군권을 장악했다. 그후 대장군 조상(曹爽)이 그를 배척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이고 249년 승상(丞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251년 상국(相國)이 되었고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다가 죽었다.[daum백과사전에서]
26) BC 247 북아프리카~BC 183경/181 비시니아 리비사. 카르타고의 장군. 고대의 위대한 군사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 때 로마에 대항해 카르타고군을 지휘했다. 초기생애 -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위대한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이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주된 라틴어 사료인 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의 저서에 따르면 한니발은 그의 아버지가 스페인에 데려가서 이른 나이에 로마에 대해 적개심을 갖도록 키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BC 229(또는 228)년부터 BC 183년경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니발의 생애는 로마 공화정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가 가장 최초로 지휘권을 받은 것은 카르타고의 속주였던 스페인에서 하밀카르의 사위이며 후계자인 하스드루발로부터였다. 그는 성공적인 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BC 221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군은 나이 26세에 불과한 그를 총사령관으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 정부는 신속하게 그의 야전 사령관직을 승인했다. 한니발은 즉각 카르타고의 스페인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스페인의 공주인 이밀케와 결혼하고 다양한 스페인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올카데족과 싸우고 그들의 도읍인 알타이아를 점령했으며 서북부의 바카이이족을 평정했다. BC 221년에는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카르타고 노바, 카르타고령 스페인의 수도)를 기지로 삼아 타호스 강 지역에 있는 카르페타니족을 상대로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 BC 219년에 한니발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있는 이베리아의 독립도시 사군툼을 공격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에 뒤이어 로마와 카르타고가 체결한 조약에서 에브로 강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권의 북방 한계로 설정되었다. 사군툼은 실상 에브로 강 남쪽에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그 도시와 '친선'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실제적인 조약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함) 그 도시에 대한 카르타고의 공격을 전쟁행위로 간주했다. 사군툼 포위전은 8개월간 지속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한니발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카르타고에 항의하는 사절단을 보낸 로마인들은(그들은 사군툼에 지원군을 파견하지는 않았음) 사군툼이 함락된 이후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로마측에서 선포했으며 카르타고측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한니발이 주도해서 싸웠다. 갈리아진격 - 한니발은 BC 219년부터 BC 218년 겨울까지 카르타헤나에서 보내면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전쟁을 벌일 준비를 했다. 동생인 하스드루발에게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의 방위를 위한 상당수의 병력을 맡겨놓고 그는 BC 218년 4(또는 5)월에 에브로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로마인들은 이 소식을 듣기 직전에 전쟁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9만 명의 보병과 1만 2,000명의 기병, 그리고 상당수의 코끼리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폴리비우스의 수치는 아마도 과장된 것이며 총병력은 4만 명 정도로 추정됨). 피레네 산맥에서 그의 군대는 피렌 부족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이 저항과 일부 스페인 병력의 이탈로 군사가 크게 줄어들었으나 그는 갈리아 남부의 부족들로부터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론 강에 당도했다. 한편 로마의 장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반란 때문에 북부 이탈리아에 붙들려 있었던 그의 군대를 바다를 통해 마르실리아(마르세유)로 파견했다. 스키피오는 론 강 우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한니발이 이미 강을 건너 좌안에서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갈 계획인 것 같다고 깨달은 스키피오는 북부 이탈리아로 되돌아가서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론 강을 건넌 이후 한니발의 자세한 행적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폴리비우스는 바다로부터 행군하여 4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 강이 아직 한 줄기로 흐르는 지점에서 그가 강을 건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알레스 맞은편에 있는 포우르케스가 그 지점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그는 이제르 강과 론 강의 합류점 북쪽에서 도강을 했을 수도 있다. 한니발은 이 지역에서 징발한 가죽배와 보트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 강 안쪽으로 잔교(棧敎)를 만들고 거기서 흙을 덮은 뗏목에 코끼리를 태워 건너게 했다. 말들은 커다란 배에 싣거나 수영해서 건너가게 했다. 도강작전을 수행하는 중에 적대적인 갈리아 부족들이 맞은편 강둑에 나타나자 한니발은 한노를 지휘관으로 삼아 분견대를 보내 멀리 상류에서 도강하여 그들을 배후에서 공격하게 했다. 카르타고군은 강을 건넌 뒤에 북부 이탈리아의 보이족을 우두머리로 하는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 지도자들을 영접했다. 보이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통로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니발의 계획에 귀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후에 카르타고군은 뒤랑스 강(또는 더 정확하게는 아비뇽 부근에서 론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그 강의 지류)을 건너 '섬'이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이 정확하게 어디인가를 밝히는 것은 한니발의 육상이동로를 파악하는 데 관건이 된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그곳은 산악과 론 강, 그리고 아이게스 강 아니면 이제르 강을 경계로 하는 비옥하고 인구가 밀집한 3각형의 지역이었다. '섬'에서는 두 형제 사이에 내분이 벌어지고 있었다(어느 부족인지는 분명하지 않음). 형 브랑쿠스는 한니발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카르타고군에게 보급품을 제공했다. 카르타고군은 카르타헤나로부터 4개월간 1,207km를 행군한 뒤였으므로 극도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알프스 횡단 - 한니발의 군대는 콜드그리몬 또는 콜드카브르 계곡에서 알프스산에 접근해 뒤랑스강 분지를 지나거나 아니면 주네브르 관문 또는 몽스니 관문을 지나 포 강 상류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적대적인 타우리니족의 영토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한니발은 그들의 도읍(지금의 토리노)을 습격했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에 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알로브로게스족이 한니발의 대열 배후를 공격하여 위협을 가했다. 횡단로의 중간지점에서는 다른 켈트 부족이 짐 나르는 가축들을 공격하는 한편, 높은 곳에서 아래로 돌을 굴려 사람과 짐승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가파른 길에서 실족하게 만들었다. 한니발은 대응조치를 강구했으나 이로인해 엄청난 병력손실을 입었다. 3일째 되는 날 그는 갈리아 부족의 마을을 점령하고 창고를 털어 2~3일분의 식량을 군대에 공급했다. 한낮에 높은 곳에서 지키는 갈리아 부족의 공격에 애를 먹은 데다 갈리아 부족 안내인들의 충성심도 믿음이 가지 않아 한니발은 드러나 있는 거대한 암벽에서 야영을 하면서 야간에 자신의 말들과 짐 나르는 동물들이 아래쪽의 계곡으로 통과하는 것을 엄호했다. 통행로 정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이 더욱 위험했다. 전 해에 내린 눈이 굳어진 단단한 얼음 바닥 때문에 병사들이나 짐승들 모두 미끄럼질을 하면서 새로 내린 눈 속을 굴렀다. 산사태가 일어나 좁은 통로를 봉쇄했으며 그 길을 치우는 동안 군대는 하루종일 발이 묶여 있었다. 마침내 15일째 되는 날 카르타헤나로부터 5개월간 행군한 2만 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 그리고 코끼리 38마리 중 남은 소수를 이끌고 한니발은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그는 기후와 지형의 어려움,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부족들의 게릴라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족과 언어가 다양한 부대를 이끌고 잘 적응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커다란 난관을 이겨낸 것이었다. 이탈리아 전쟁 - 한니발의 부대는 이제 스키피오의 군대를 대적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최근에 창설된 플라켄티아(지금의 피아첸차)와 그레모나의 로마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포 강으로 돌진해왔다. 양군 사이의 최초의 접전은 티치노 강 서쪽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대가 우세를 보여 스키피오는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로마군은 플라켄티아로 퇴각했다. 2번째 집전을 유도하기 위한 몇 차례의 기동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스키피오의 연합군은 플라켄티아 남쪽의 트레비아 강 좌안에서 한니발을 맞이했으나 크게 패배했다(BC 218. 12). 이 승리로 갈리아족과 리구리아족이 모두 한니발의 편에 붙었고 그의 군대는 켈트족 신병들을 모집해 상당히 보강되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뒤(이때 한니발은 눈병에 걸렸음) BC 217년 봄에 멀리 아르노 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로마의 2개군이 출동하여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는 아레티움에서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를 책략으로 제압하고 파이술라이(지금의 피에솔레)와 페루자에 당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계획대로 플라미니우스의 군대는 무방비의 전투에 이끌려 들어왔다. 그들이 트라시메네 호의 북쪽 언저리와 맞은편의 언덕 사이를 지나갈 때 한니발의 부대는 준비된 위치에서 공격을 가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나머지는 호수에 빠져죽게 만들어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가이우스 켄테니우스가 이끄는 약 4,000명의 기병대 증원군은 도착하기도 전에 중도에 습격을 받고 역시 궤멸당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은 너무 지쳐서 승세를 몰아 로마로 진군할 기력이 없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세력들이 이탈하여 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한니발은 피케눔에서 쉬면서 217년 여름을 보냈으나 나중에 풀리아해와 캄파니아를 공격해 파괴했다. 한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쿵크타토르가 이끄는 로마군은 지연전술을 구사하여 양군 사이에서 소규모 접전만이 벌어질 뿐이었다. BC 216년 초여름에 한니발은 갑자기 남쪽으로 이동하여 아우피두스 강변에 있는 칸나이(지금의 몬테디칸네)의 대규모 보급기지를 장악했다. 그곳에서 8월초에 칸나이 전투가 벌어졌다. 한니발 부대의 중앙선에 배치된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 보병대의 돌진을 막아내지 못하고 대열은 유지한 채 밀려났지만 리비아 보병대와 양 진영의 기병대는 굳건히 버티면서 로마군의 공격대열을 중복시키고 배후에서 포위하는 작전을 통해 승리한 로마 군단 병사들을 오히려 추격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육상전의 대승리는 바라던 효과를 가져왔다. 많은 지방들이 이탈리아 동맹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BC 216~215년 겨울을 카푸아에서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카르타고군의 전투력은 점차 약해져갔다. 파비우스가 제안한 전략이 실행되었다. 그 내용은 로마에 충성을 바치는 도시들을 방어하고 기회가 닿으면 한니발에서 함락된 도시들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하되, 적군이 싸우자고 할 때 싸우지 말고 카르타고군을 항상 모든 전장에서 긴장상태로 있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병력의 열세 때문에 로마군을 상대하기 위해 자기 부대를 산개시킬 수도 없고 집중된 병력으로 결정전을 벌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조심스러운(항상 성공적이지는 못한) 수세에 밀렸으며 카르타고의 본국 정부로부터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로마의 제해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익한 지구전을 벌이기 위한 지방 보급원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타렌툼(지금의 타란토)을 점령한 것을 제외하면 한니발은 보잘 것 없는 승리를 거두는 데 그쳤다(BC 215~213). 카르타고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BC 213년에 카실리눔과 아르피(한니발이 BC 216~215년 겨울에 점령했던 곳)가 로마군에게 수복되었으며 BC 211년에 한니발은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카푸아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해야 했다. 한니발이 강력하게 요새화된 로마의 성벽에서 4.8㎞ 이내까지 빠르게 행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푸아는 그해에 함락되었으며 시칠리아에서는 시라쿠사가 무너졌고 BC 209년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이 다시 로마의 수중에 넘어갔다. 스페인과 아프리카 전쟁 - 한편 스페인에서 로마군은 큰 전과를 올려 그곳의 카르타고 권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BC 208년에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주력군에서 분견대를 차출하여 한니발을 지원하러 가기 위해 아마도 형이 넘어간 길을 따라 알프스를 횡단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군대는 한니발의 군대와 합세하기 전에 북부 이탈리아의 메타우루스에서 패배했다(BC 207)(→ 메타우루스 전투). 이렇게 해서 중부 이탈리아에서 형세를 만회하려던 마지막 희망마저 무산되자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브루티움에 집중하고 그곳에서 남아 있는 동맹세력의 지원을 받아 이후로도 4년 더 로마의 압력에 저항하면서 버텼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를 타격하여 카르타고의 주요동맹세력인 마사이실리아의 누미디아인들을 분쇄하고 카르타고를 위협했다. 위험에 빠진 자기 나라를 지원하러 가기 위해 한니발은 BC 203년에 이탈리아를 포기했다. 이미 예비적인 휴전협정이 선포되었고 카르타고군은 스키피오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들을 받아들인 상태였지만(BC 204~203 겨울) 한니발은 카르타고 군의 나머지 병력을 하드루메툼(지금의 튀니지 수시)에 집결시켰다. 예비적인 평화협정 제안을 가지고 로마에서 사절들이 돌아오고 있던 그 순간에 카르타고군은 휴전협정을 파기했다. 뒤이은 전투에 관한 설명은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모두 각기 자신들의 누미디아 동맹세력과 합세하기 위해 바그라다스 강을 따라 자마레기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이때 한니발은 기병대가 없었고 전열의 용병부대와 제2열의 아프리카 보병대가 한꺼번에 패배했다(→ 자마 전투). 스키피오는 정예병사로 이루어진 한니발의 제3열이 전혀 손실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자기 전열을 재편하는 한편, 자신의 누미디아인 동맹세력인 마시니사 기병대를 카르타고군의 배후로 올려보냈다. 한니발은 2만 명의 병력을 잃고 패배했으나 자신은 마시니사의 추격을 벗어나 몸을 피했다. 망명과 죽음 - 자마 전투 이후 1년이 지나 체결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평화조약은 한니발의 필생의 목표를 좌절시켰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무기를 들고 로마와 싸우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비록 전쟁을 잘못 치루었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수페트(민간 행정관)가 되었으며 아울러 군지휘권도 그대로 보유했다. 수페트의 지위에 있으면서 그는 카르타고의 과두적인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일정한 행정적·정치적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카르타고 귀족계급 내의 일부 세력과 사이가 나빠졌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를 부추겨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만들려고 한다는 혐의로 로마 당국에 고발당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에페소스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궁전으로 피신했다(BC 195). 처음에는 로마와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던 안티오코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수행에 관해 그가 타당한 충고를 하는 것이 점차 말썽의 원인이 되자 그는 안티오코스를 위해 함대를 마련하고 지휘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페니키아에 있는 도시로 가야 했다. 그러나 해전에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팜필리아의 시데 앞바다에서 로마 함대에게 패배했다. 육지에서 안티오코스는 190년에 마그네시아에서 패배했으며 로마인들이 그에게 내건 요구조건의 하나는 한니발을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마그네시아 전투). 이 지점에서 또다시 한니발의 뒤이은 행적에 관한 설명은 여러 가지이다. 그는 크레타를 거쳐 비시니아의 프루시아스 왕의 궁정으로 달아났거나 아니면 아르메니아의 반군세력에 가담했던 것 같다. 결국에 그는 프루시아스에게 피신처를 구했다. 프루시아스는 당시에 로마의 동맹세력인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와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한니발은 이 전쟁에서 프루시아스를 도왔으며 해상에서 에우메네스와 전투를 벌이던 중 뱀이 가득 들어 있는 큰 솥들을 적군의 배에다 던져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로마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과정을 통해 한니발의 항복을 요구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는 피신할 길이 없게 되자 한니발의 비시니아의 리비사라는 마을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아나톨리아). 인품 - 한니발에 관해 쓴 로마 전기작가들이 그를 공정하게 다루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폴리비우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최소한 편견 없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 전기작가들은 그의 잔혹성에 관해 비난하고 있지만 그는 실상 파비우스와 포로 송환에 관한 협정을 맺기도 했으며, 죽은 적장들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BC 215 콘술)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BC 216)의 시체를 정중하게 대우하는 면모도 보였다. 그가 탐욕스럽다는 또다른 비난에 관해서는,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장수들이 불가피하게 하는 행동 말고는 달리 그렇다고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파비우스의 농장을 약탈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에 관해 제기된 많은 비난(예를 들면 폴리비우스가 말하는 식인행위 같은 것)은 휘하 장군들의 개별적인 과오에서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과오가 있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그의 용맹성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절제력과 금욕생활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바였다. 그의 지도력은 그가 장기간 지휘했던 복잡한 혼성부대 내에서 전혀 소요사태나 불협화음이 없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알 수 있다. 그가 자기 병사들과 아울러 코끼리와 말에 대해 쏟은 배려는 그의 인정 많은 성격을 증명해준다. 로마인들이 말하는 '카르타고인의 신의'(punica fides), 곧 그가 신의가 없다는 비난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쟁에서 풍부한 지략과 대담한 책략을 구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의 기지와 교묘한 말솜씨에 관해서는 많은 일화가 남아 있다.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했으나 그의 전기들에는 좀더 개인적인 정보가 빠져 있다. 그의 생김새를 알려주는 초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가 장군으로 선출된 BC 221년에 주조한 카르타헤나의 은화로 턱수염이 없고 쾌활한 젊은이의 용모를 담고 있다.[daum 백과사전에서]
27) [Scipio, Publius Cornelius]. 로마의 장군. BC 218년에 콘술(집정관)을 지냈으며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프로콘술(속주 총독)을 지냈다. BC 218년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의 이탈리아 진격을 막기 위해 남부 갈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항해해갔다. 그러나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와야 했으나 그때까지 스페인에 있던 카르타고군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에게 그의 군대를 맡겨 스페인으로 과감하게 진군하도록 했다. 그는 포 강의 지류를 따라 진격하던 한니발의 군대에 맞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지연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티키누스 강에서 패배하고 부상을 당했다. 트레비아 강으로 후퇴해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와 합류했으나 롱구스는 싸움을 고집하다가 참패당했다(BC 218. 12). BC 217년 스키피오는 스페인의 프로콘술로 파견되어 갔으며, 형과 함께 에브로 강 근처의 전투에서 이탈리아로 뚫고 들어오려던 하스드루발을 격파하고(BC 215) BC 212년에는 사군툼(지금의 사군토)을 함락시켰다. 그들은 더 남쪽으로 진군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각자 진격해가다가 둘 다 재난을 만나 BC 211년 푸블리우스는 바이티스(과달키비르) 강 상류에서, 그나이우스는 카르타고노바(카르타헤나) 내륙지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결국 패배로 끝났지만 이들 형제의 활약으로 7년 동안 한니발은 스페인의 자원을 이용할 수 없었다. 푸블리우스의 아들은 대(大)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28) 고두현. 옛시읽는 CEO. 21세기북스. pp. 187- 189.
29) 杜筍鶴(846-907)은 晩唐만당의 현실주의 경향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어려서부터 뾰족뾰족 풀숲에서 고개 들더니, 어느새 덤불 헤치고 솟아 오르네. 사람들은 장차 구름 위로 솟을 그 나무 몰라보고, 구름 위로 솟은 뒤에야 그 나무 높다 하네’라는 시 「어린 소나무 小松」도 유명하다.
30)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칵테일파티 효과’로 설명한다. 칵테일파티 효과란, 잡음 중에서 흥미가 있는 음만을 선별해서 듣게 되는 현상이다.
31) 자신의 행위나 언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리한 정보만 모으는 현상을 말한다.
32) 칭기즈 칸 (몽골 통치자) [成吉思汗, Genghis Khan, 테무진]. Chinggis는 Genghis, Chingis, Jenghiz, Jinghis라고도 씀. 본명은 테무진(Temüjin : 또는 Temuchin). 1155 또는 1162/67 몽골 바이칼 호 근처~1227. 8. 18. 몽골의 무사·통치자. 개요 - 그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원(元)을 세운 후 원의 태조(太祖)로 추증되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왕 가운데 하나이며, 유목민 부족들로 분산되어 있던 몽골을 통일하고 제위(帝位 : 칸)에 올라(1206) 몽골의 영토를 중국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확장시켰다. 역사적 배경 -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몽골족 비사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1240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 야만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초기의 투쟁과정 - 칭기즈 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그의 본명인 테무진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패배시킨 적장의 이름을 본뜬 것이라 한다.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피 한 움큼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강간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후 토그릴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자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족 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권력에의 부상 -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토그릴과 케레이트족은 모두 전멸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전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몽골족의 통일 -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식민통치)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누어져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족 비사〉에 의하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고대명은 옥수스) 강과 시르다리야(고대명은 작사르테스) 강 지역에서 화레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다른 측근은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징[北京]을 함락시켰다. 그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화레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를 받고 있던 한 이슬람 대상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화레즘의 왕은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화레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들을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화레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1223년 마침내 그는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더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평가 - 여러 가지 다른 근거들을 종합하여 판단해볼 때, 칭기즈 칸은 다면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뛰어난 체력, 강한 목표의식,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내들이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조언을 즐겨 들었다. 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토그릴이나 자무카와는 달리 충성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상관을 배신하는 적수들은 칭기즈 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들의 배신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 강하여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신성한 사명을 늘 의식했고, 위기의 순간마다 몽골족의 최고신에게 깊은 경배를 올렸다. 이같은 경향은 그의 유년시절에 특히 강했다. 그러나 스텝 지역을 벗어나 외부의 낯선 정착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성품 가운데 다른 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학살과 약탈에 의해 얻어지는 직접적인 이득 외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때로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평생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주위에 끌어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추종자들 중에는 동료 유목민뿐만 아니라 정착문화 세계에 사는 문화인들도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직, 기강, 기동성, 무자비한 목적의식 등이 근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특히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그가 정기적으로 사용해온 무기였다. 성읍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 일종의 심리전이었다고 이야기되어 왔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은 20세기에 저질러진 학살에 비교될 만큼 잔인했다. 학살정책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저항의식을 꺾고자 한 것이었지만 학살을 위한 학살도 많이 자행되었다. 칭기즈 칸의 업적은 위대했다. 그는 유목민 부족을 모두 통일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레즘 샤나 금 같은 대제국을 정복했다. 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부족들을 피폐시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하고, 다른 아들들이 오고타이의 말에 따르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으며, 오고타이에게 강성한 군대와 국가를 물려주었다. 칭기즈 칸이 죽었을 때, 베이징에서부터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그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또한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에까지 세력의 판도를 넓혔다. 그들은 칭기즈 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정복지역을 잘 조직된 제국으로 개편하는 일을 실행했다. 칭기즈 칸은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으나 그가 벌인 정복전은 몽골 제국의 출현을 처음으로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 제국은 중세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큰 제국이었다. C. R. Bawden 글 [daum 백과사전 중에서]
33) 고두현,., pp. 191-195.
34) 고두현. 옛시읽는 - . p. 198.
35) 고두현. 옛시읽는 CEO. p. 199.
36) 범(范)중(仲)엄(淹)(989-1052)은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학자. 송나라의 사대부 기풍을 확립하고 육경과 역경에 통달했던 인물. 그는 늘 천하를 겸허히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우지 않았던 개혁자이자 문인이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개가한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재상의 자리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늘 검소하게 생활했다. 인재양성과 부국강병의 개혁조치인 경력신정을 제안하고 실행했다.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실패하긴 했지만 나중에 왕안석에 의해 개혁은 다시 이루어졌다.
37) 조선 중기 풍류남아인 백호 임제(1549-1587)가 기생 한우에게 ‘작업을 걸면서’ 건넨 시다. 그는 강직한 성격에 재주가 뛰어났다.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로맨티스트였다. 35세 때 평안도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개성의 황진이 묘에 들러 관복 차림으로 제를 지내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을 어듸 두고 백골만 무쳤난이. 잔 자바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라는 추도시를 읊었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38) 고두현., pp. 171-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