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3.12.30(화)
06:30백무동-07:30하동바위-08:00참샘-08:25소지봉-09:00망바위-09:25장터목대피소-조식-10:25장터목대피소 출발-11:00통천문-11:20천왕봉-12:10장터목--12:40연하봉-13:25촛대봉-15:00한신폭포-15:45오층폭포-15:50지계곡갈림길-16:30백무동 매표소
계양산은 인천의 주산이며 진산이다. 김포평야에 우뚝 솟은 계양산은 불과 해발 400여m가 조금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서울의 인왕산, 남산, 북악산과 견주어도 대도시의 산으로 결코 손색이 없다. 과거 서해안으로 남파되는 간첩들은 계양산을 표적 삼아 침투를 했다고 들었는데 평지에 우뚝 솟아 근교의 산 어디서나 조망할 수 있다. 계양산을 알게 된 것은 불과 5년 전. 정상을 앞두고 오르막이 지리산 반야봉과 천왕봉처럼 급경사에 가쁜 숨을 쉬고 힘을 써야 할 만큼 만만치 않다. 요즘에는 한층 더 산님들의 사랑을 받는 듯하다. 지리산 생각이 나면 반야봉과 천왕봉을 생각하며 계양산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올랐다.
그러나 그리운 지리산. 마음은 늘 지리산으로 향한다. 11월 초에 단풍 구경삼아 내장산을 다녀온 후 12월 내내 계속 구례구역 기차표를 예매했으나 나는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 지리산은 저 멀리 남녘에서 신기루처럼 아른거렸지만 나는 젖은 짚단 태우듯 애태우며 가슴 아프게 보내야만 했다. 동계휴가가 시작된 날 교통량이 적은 평일을 이용하여 지리산으로 향한다.
그동안 가끔 나의 지리산행 파트너로 동행해 주었던 홍 선생이 교원대 박사과정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을 내주지 못하고 또 홀로 산행에 나선다.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며 4개의 휴게소를 들른 끝에 백무동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6시 30분. 아직 사위는 캄캄하다. 작년 14호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으로 오르는 길도 예외 없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매표소 앞에 설치된 강렬한 디지털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 세석고원을 오르는 한신계곡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꼬부라져 하동 바위로 오르는 길을 따라 장터목으로 향한다. 하동 바윗길은 과거 북쪽 지리산 함양 마천에서 천왕봉을 가장 쉽고 빠르게 오르는 루트로서 산님에게 사랑을 받던 길이다. 예전에는 백무동 야영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곡차를 마시며 노닐다가 행장을 가볍게 꾸리고 이른 아침 단숨에 천왕봉에 올랐던 정겨운 추억의 길이기도 하다. 초입 출렁다리를 지나 작은 지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바윗길을 따라 오른다. 하동 바윗길의 힘든 구간은 소지봉까지.. 참샘에서 약수 한 사발 들이키고 힘 한번 쓰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지리산의 북쪽 자락인 이곳은 지난번에 내렸던 서설로 아직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어 어둠 속에서도 은세계처럼 빛난다. 옛날 하동군수가 지리산 유람을 왔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일화를 간직한 하동 바위에 이르니 날이 밝아 온다. 아직 참샘까지는 구슬땀을 조금 더 흘려야 한다. 단시간 내에 천왕봉으로 오르는 이 길은 많은 산님이 늘 다녀서 중산리 길처럼 반질반질 길이 잘 나 있다. 휴일에는 붐비는 코스이지만 오늘은 한겨울이고 평일이라 산님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호젓하고 조용한 산행을 즐기는 나는 출입을 통제하는 비지정 탐방로로 자주 산행을 많이 다니기도 하는데 지리산을 관리하는 국립공원공단 측에는 반갑지 않은 손님일 것이다.
2년 전 겨울. 이별하는 서운함에 사감 선생과 이 루트로 역시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었다. 그리웠던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도 그대로 걷고자 한다. 사감 선생은 잘 생활하고 있겠지. 추억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참샘. 가지런히 정돈된 바가지를 들어 흐르는 약수를 담아 입안에 담는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는 땀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정면을 바라보니 소지봉 능선이 훤하고 이제 날은 완연히 밝았다. 일단 소지봉에 오르면 좌측으로 하봉과 중봉, 천왕봉과 제석봉을 바라보며 걷는 기쁨이 있어 이 등로는 정말 괜찮다. 소지봉에 오르면 좌측 아래는 창암산과 두지터로 가는 추성리 길과 칠선계곡으로 내려설 수 있고, 우측으로는 장터목 방향으로 망바위로 오르게 된다.
참샘에서 소지봉이 있는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눈에 묻힌 산죽 길이 이어진다. 좌측에는 하봉에서 뻗어 내린 초암능선과 칠선계곡으로 향하는 지곡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된비알도 끝나고 아기자기한 산죽 길을 따라 손쉬운 산행이 이어진다. 이렇게 장터목까지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정면 앞으로는 장터목 안부가 가깝게 보이기 시작한다.
기암괴석이 눈에 띄는 망바위에 이르러 우측으로 조망을 하니 장터목에서 시작하여 반야봉까지의 파나로마 주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주능선의 북쪽 사면은 흰 눈이 가득하다. 장터목이 눈앞에 보이기는 하나 제석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 사면을 돌아야 하는데 아직도 좀 더 걸어야 장터목에 도달할 수가 있다. 감춰진 루트 제석단으로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을 향하여 오르려 했으나 허기가 져서 일단 장터목에서 아침밥을 먹고 천왕봉을 오르기로 한다.
장터목 산장은 널널하다. 취사장 안에는 몇 명의 산님이 식사를 마치고 곧 떠나려는지 짐을 꾸리고 있다. 하지만 내일은 2003년의 마지막 날. 대피소는 예약이 이미 종료되었고 신년 일출을 보고자 전국 각지에서 온 산님들로 천왕봉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 먼저 천왕봉을 오른다.
팩 소주를 꺼내 몇 차례 마시고 뜨끈한 소고기국밥을 훌훌 먹으니 행복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며 얼큰하다. 주능에 올라서자 바람에 추위가 엄습하여 황급히 재킷을 꺼내 걸친다. 제석봉을 오르며 조망을 하고 설경의 풍광을 담는데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노고단 뒤로 광주의 무등산과 승주의 조계산. 그 너머 영암의 월출산, 해남의 두륜산까지 선명하다.
통천문을 지나면 천왕봉은 바로 지척이다. 이미 정상에 올라선 산님들의 모습도 가깝게 보인다. 눈과 얼음이 곳곳에 있고 빙판을 만들어 아이젠을 한다. 지난여름 새벽 칠선골에서 천왕봉을 오르다가 추락하여 무릎과 다리를 심하게 다쳐 8주간 목발 신세를 졌던 쓰라린 기억에 주의한다.
두 달 만에 다시 천왕봉에 올랐다. 일망무제. 탁 트인 풍광은 더는 말이 필요 없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천왕봉 아래 자세를 낮춘 모든 산을 바라본다. 하산 코스를 쑥밭재를 거쳐 어름터 쪽으로 생각도 해보았으나 역시 차량 회수에 걸림돌이 되어 한신계곡으로 한다. 미끄럼을 주의하며 다시 장터목으로 향하는데 서편 정면으로는 반야봉과 길게 뻗은 서북능선의 하얀 만복대가 멋져 자꾸 시선을 빼앗긴다. 명선봉과 삼정산을 이어주는 영원령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제석봉은 언제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수 있을까. 지금의 제석봉은 오히려 지리산을 처음 찾았던 20여년 전보다 더 황폐화 되었다. 그때는 많은 고사목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비와 바람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때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지금과 비교가 확연한데 한번 훼손된 자연은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 복원이 어려운 모양이다.
장터목 대피소에 내려선 후 연하봉을 향한다. 남쪽 청내골로 뻗은 일출봉 능선이 아름답다. 일출봉 능선 너머에는 지리산의 비경 도장골이 감춰져 있는데 도장골에 대하여 아는 산님들은 그리 많지 않다. 연하봉에 오르니 촛대봉이 지척이다. 연하봉부터 촛대봉까지는 길이 순하다. 세석에서 출발한 산님들이 바위틈에 모여앉아 추위에 술 한잔의 여유를 즐긴다. 드디어 촛대봉. 겨울 햇볕을 따뜻하게 받는 남향의 포근한 세석산장이 눈 아래 있다. 세석대피소에 들르지 않고 바로 한신계곡으로 내려선다. 한신계곡은 예전부터 자주 오르고 내리던 곳이다. 초입부터 급경사라 순식간에 고도를 낮춘다. 내리막길이 미끄럽다. 한신계곡을 치고 올라오는 3명의 산님을 만나 지리산을 이야기한다. 계곡은 꽁꽁 얼었다. 1시간쯤 내려서서야 간간이 물소리가 들리는 목조다리 끝에서 휴식을 취한다. 온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나 곧 한신계곡의 냉기에 몸이 시려온다.
한신 폭포를 지나 여유가 생겨 물을 끓여 간식으로 컵라면을 먹는다. 홀로 산행 때도 잘 챙겨 먹어야 되는데 귀찮아 배를 곯기가 일쑤이다. 오층 폭포 역시 매서운 지리산의 강추위에 꽁꽁 얼었다. 계곡 아래의 커다란 소는 깨진 빙판 사이로 차디찬 물이 유유히 흐른다. 출입이 통제된 한신 지계곡 갈림길을 만나면서 길은 편해진다. 뒤를 바라보니 내려왔던 영신봉 산정이 까마득하다. 14호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한신계곡은 곳곳이 파헤쳐져 비경을 잃었고, 철다리들도 힘을 쓰지 못하고 건성으로 매달려 새봄에는 보수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인적없는 계곡 길을 내려서니 곧 백무동 야영장이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다시 나는 멀고 먼 인천집으로 향한다. 지리산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스무 살 시퍼런 시절에 지리산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지리산은 나에게 신앙이 되었다. 실상사를 지나 산내중학교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차창을 내린 후 지리 능선을 다시 하염없이 바라본다. 하얀 지리산정이 나의 갈 길을 잡는다.
첫댓글 지리산은 베누스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