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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완벽하게 태어나 불완전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는다. 살면서 병치레를 하는 것은 그것을 일러주는 신호다.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과 마음의 준비를 알려주는 것이리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이 주는 징후를 덮고 완전체로 살아보려 하지만, 몸을 더 혹사하는 꼴이 되고 만다.
고향은 이런 사람을, 불완전한 인간을 껴안는 곳이다. 기쁠 때도 생각나지만,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더욱 생각난다. 너무 가난한 기억 때문에 떠올리기도 싫었는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살아서 찾는 쉼터는 고향이요, 죽어 찾는 쉼터는 흙이라 했던가.
둘은 서로 닮았다. 흙과 고향. 섬여행을 하다보면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 손죽도가 그런 곳이다.
이순신도 애석해 한 ‘큰인물’ 이대원
손죽도는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속하는 섬이다. 100여 가구에 180여 명이 살고 있다. 여수에서는 1시간 20분이 걸리는 거리지만, 고흥군 외나로도에서는 20여 분이면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녹도만호에 속했던 것이다.
손죽도(損竹島)라는 지명은 선조 20년(1587년)에 이대원(1566-1587) 장군의 사망과 함께 등장한다.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하면서 큰 인물을 잃은 곳이라 해서 손대도(損大島)라 불렀다고 한다. 이대원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손죽도(巽竹島)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이후다.
이대원 장군이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순신이 그렇게 애통해했을까.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호연이다. 1583년(선조 16년) 무과에 급제하여 같은해 녹도만호로 부임했다. 이듬해 남해안에 침입한 왜선 20여 척을 대파하고 적장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일주일 후 왜적은 많은 병력을 이끌고 다시 침입을 했다. 장군은 100여 명을 이끌고 손죽도에서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때 속적삼에 적은 장군의 절명시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손대남에 의해 가족에 전해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대원 장군의 공을 가로채려던 수사 심암을 파면하고 이대원 장군을 수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소식이 전달되기도 전에 22살의 나이에 장렬히 순국하고 말았다. 이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고향인 경기도 평택의 확충사, 전남 고흥의 쌍충사, 여수의 영당 그리고 손죽도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손죽도로 귀어한 김영란,순오 씨 부부.
고향이 준 선물, 5%의 기적 이루다
남편은 빚으로 마음고생이 심했고, 아내는 담도암으로 신한부 삶을 살고 있었다. 아내 김영란은 도시남자인 남편 순오 씨를 설득해 고향인 손죽도로 내려왔다. 모두 내려놓고 쉬고 싶었다. 5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 놀랍게 완치판정을 받았다. 그것도 생존율이 5%에 불과하다는 담도암이었다. 대체 작은 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김 씨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담담하다. 직접 기른 채소, 산에서 채취한 산딸기와 갯바위의 톳, 무인도의 방풍과 인동초 등으로 효소를 만들어 고향밥상을 차렸다.
어디 이뿐이었을까. 콩란과 담쟁이로 가득한 돌담, 와송이 자라는 지붕을 가진 한옥, 깨끗한 파도소리, 도란도란 정겨운 마을사람들, 포근한 마을과 산책길, 이 모든 것이 약이 되었을 것이다. 마당에 들어서니 꽃밭이 채소밭이고, 채소가 꽃이다. 원형을 잘 지키며 깔끔하게 정돈한 5칸 겹집이 인상적이다.
손죽도에는 이처럼 잘 보전된 옛집이 몇 채 있다. 찾는 사람이 있으면 민박으로도 사용한다며 김 씨가 햇볕이 드는 마루에 차를 내려놓는다. 가보고 싶은 섬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어떻게 작은 섬에 이렇게 품격을 갖춘 집이 지어졌을까. 손죽도는 일제 때부터 시작된 안강망어업으로 부자섬이었다. 한때 안강망 배 50여 척으로 오징어 철에는 울릉도로, 조기 철에는 연평도로 조선의 동해, 서해, 남해를 두루 다녔던 사람들이다. 최근 복원된 화전놀이의 전통도 거슬러 올라가면 고기잡이와 무관치 않다. 고기잡이가 활발하던 시절에 바다에서 몇 달을 보내야 했던 설움을 달래기 위해 가족과 마을주민들이 모여 난장을 펼치면서 시작됐다는 놀이다. 이날만큼은 처녀, 총각, 며느리, 시어머니, 시아버지라는 겉치레를 벗고 흥겹게 놀기 위해 가면을 쓰고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야 말로 원조 ‘복면가왕’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지지미재 너머 반짝이는 윤슬이 보고 싶다.
전남발전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