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중국여행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彩霞
여러가지로 뒤숭숭한 시절에 한 방을 날려줄 인물이 그립습니다.
백호 임제 같은 인물을 만나서 한바탕 세상사는 이야기를 풀어보았으면 시원해질 것 같습니다.
백호 임제 (스크랩한 글)
영모정.....'임제'가 시를 즐기며 거닐던 곳
조선을 통틀어, 풍류남아로 둘째 가라 하면.....아마, 이양반 삐져서 벌떡 일어나 돌아 앉을걸? ^^
묘자리 부터 심상치 않다.
양지바른 전형적인 명당이 아니라, '신걸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품새부터가.....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의 물줄기를 내리 굽어보고 있다.
묘 옆에는 외손자인 '허목(許穆)이 세운 비석이 버티고 서 있다.
'허목'이 누구인가.
'숙종'이 흠모해 마지 않던, 대유학자 이자 명재상이다.
(허목 [許穆, 1595 ~ 1682] : 시,문장,그림에 능함. 일찌기 벼슬길이 막혀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제자양성과 학문에
정진하던 중, 56세때 관직에 처음 등용되었는데,실력을 인정받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좌의정 까지 역임했다.
성리학자인 그는 실학파의 초석이 된 인물이다.)
그의 이력...........
임제(林悌) 1549~1587
본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병마 절도사이던 부친 임진(林晋)과 모친 남원 윤씨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 부터 시에 능하였다. 벼슬에는 관심이 없고 벗들과 어울려,자연에 묻혀 술을 마시며 시와 거문고에 심취하기를
즐겼다. 그러던 차, 주위의 성화에 못이겨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는데, 선조 9년인 1576년에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 하다.
( * 알성시: 임금이 보는 앞에서 치르는 과거시험)
예조정랑 등을 역임하다가 당파싸움을 개탄하여 벼슬을 사직한 후, 명산대천을 유람하다가 여생을 마치다.
당대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시풍이 호방하고 기발하였다.
1000 여 수의 시와, 수성지,화사,원생몽유록 등의 소설을 남겼다.
그는 변변한 초상화 하나 없다.
하지만,
뭇 여인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미남(美男)에다가,
타고난 높은 기개와 배포,
시와 거문고로 일세를 풍미한 풍류남아인 그.....
비록 아쉽지만, 레고를 맞추듯, 흩어져 있는 일화 몇가지를 맞추어 보면서,
당대의 화려한 아웃사이더였던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보자.
'임제'가 16세 되던 해, 평양감사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신부측 집안에서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파혼을 알려오는 것이 아닌가.
퉁소를 기막히게 잘불었던 '임제'는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날 아침 일찍이 신부집으로 찾아가서 퉁소를 불어댔다.
멋들어진 퉁소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감탄할 즈음,
'임제'는 갑자기 '거시기'를 꺼내, 오줌을 갈기며 소리쳤다.
" 내가 이래도 고자냐? "
'임제'의 기백에 할말을 잃은 신부측.
결국 '임제'를 사위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임제'가 28세 때인, 어느 봄날.
한양에서 술에 만취하여 가다보니, 수원의 어느 주막에 이르렀다.
그집 주모와 눈이 맞아 하룻밤을 보내었는데, 그만 주모의 남편에 발각되어 버렸다.
눈에 쌍심지를 켠 남편이 칼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드는게 아닌가.
'임제'왈, " 이왕 이렇게 죽을 바에야, 시(詩)나 한수 짓고 죽겠으니 허락해 주시오." 하니,
" 그래라, 이놈아! "
허락받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은다.
" 어젯밤 장안에서 술에 취해 여기오니
복숭아꽃 한가지가 아름답게 피었네
그대, 어찌 이꽃을 번화한 땅에 심었나
심은 자(者)가 그른가, 꺾은 자(者)가 그른가. "
'임제'가 시(詩)를 다 지은 후, 이제 죽이라고 목을 내민다.
남편은 시(詩)를 읽어 보는데...
요염한 복숭아꽃(마누라)의 유혹, 그리고 그꽃을 쉽게 꺾을수 있는 술집에 둔 자기의 잘못도 있음을
은근히 꼬집는 글귀에 그만 감복한다.
'임제'의 호탕하고 출중한 인품에 매료된 그는, 오히려 술상을 들여와 융숭히 대접하면서, 권커니 자커니.......
'임제'가 문과에 급제한 뒤, 제주목사로 있는 부친을 뵈러 제주도로 떠나던 날.
그날은 바람이 몹시 사나웠고, 풍랑이 거칠었다.
그가 꾸린 짐이라곤, 문과 급제자에 하사한 어사화(御史花),거문고,칼 한자루...딱 세가지.
사공 왈, " 나리,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사나워서 도저히 배를 띄울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무슨 소리냐, 나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꼭 봐야겠다. 어서 띄워라! "
사공을 재촉하여,기어이 배를 띄우고 제주도로 향해 가는데,
하도 파도가 거세서,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토하고,일어나지도 못하는데, 그는 그순간에도 시를 읊으며
태연히 앉아 있었다.
한편, 제주 관아에서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아랫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 목사 나으리, 이 날씨에 자제분이 오시는 건 불가능 할것 같습니다." 하자,
" 두고봐라, 내 아들은 반드시 온다." 하였다.
하지만, 부친은 내심 걱정이 되는지,제주도의 모든 부두에 사람들을 보냈다.
부두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얼마 안있어, 넘실거리는 거친 파도를 헤치고 이쪽으로 오는 배 한척을 발견하였다.
배가 요동치지 않게 큼지막한 돌을 배위에 얹어놓고, 거문고를 뜯고 있는 '임제'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한우(寒雨)라는 기생이 있었다.
평양의 명기(名妓)인데, 가야금과 시(詩)에 능했으나, 콧대가 높고 쌀쌀맞기가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허나...'임제', 그 콧대를 꺾어보려고 작정하고 찾아간다.
밤이 깊도록, 술상을 앞에 두고,둘이서 권커니 자커니 하던차,
이윽고, '임제'가 한 수 던진다.
" 북천(北天)이 맑다 하기에, 우장(雨裝)없이 길을 가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하자,
곧바로 튀어나오는 '한우'의 화답.
"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
이리하여 '한우'의 콧대를 꺾고 하룻밤을 동침하게 된다.
그런데 사단은 다음날에 발생했다.
'임제'에게 푹 빠진 '한우'가 옷을 부여잡고 아예 같이 살자고 매달리는데,
이를 한사코 뿌리치며 길을 떠나는 '임제'.
( * 한우(寒雨)의 우리말은 '찬비'이다. 즉 '찬비'는 기생 '한우'를 비유한 것)
'임제'의 나이 35세 되던해.
그는 '서도 병마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던 길에, 개성에 이르렀는데, 평소에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황진이'가 불과 석달전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닭 한마리와 술 한병을 사들고,묘소를 찾았다.
그리고는,양반의 체통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제사드리며 곡을 한 다음, 다음과 같은 시(詩) 한수를 남긴다.
"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
그런데, 지체 높은 사대부의 신분으로 일개 천한 기생의 묘에 제사드리는 행위는,당시의 양반사회에서는
용납이 안되었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그는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당하고 말았다.
호탕하고 거칠것 없는 성품을 옆볼수 있는 일화 한토막.
어느날, '임제'가 잔칫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신 후, 말을 타려 하는데,
하인이 하는 말, " 나으리! 취하셨습니다. 가죽신과 나막신을 한짝씩 신었구만요."
" 말 위에 있는 나를 보고, 길 오른편에 있는 자(者)는 날더러 가죽신을 신었다 할 터이고,
길 왼편에 있는 자(者)는 날더러 나막신을 신었다 할 터이니,
이놈아,그게 무슨 문제란 말이냐! "
하고, 그는 말에 힘껏 채찍을 가하며 달려 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옥퉁소'와 '거문고', 칼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옥퉁소와 거문고는 선비의 넉넉함을, 칼은 무인의 기개를 상징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나라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는 우국지사였다.
왜구의 침범이 빈번하자, 무인(武人)가계의 후예답게 백의종군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호방하면서도 명쾌하고,높은 기상의 쾌남아!!
다음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호령하고 싶어하는,그의 높은 기개를 알수 있는 시(詩)이다.
"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 구나. "
다음의 일화는,
그가 뭇 여인들이나 희롱하면서 세월을 보내던,양반 나부랭이 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임제'가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려 할때,
집안 사람들이 슬피울며 곡(哭)을 하는 걸 보고, 벌떡 일어나서 만류하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 천하의 여러나라 중에,'황제'를 칭하지 않는 나라가 없거늘,
유독 우리나라만 그러지 못하니, 이런 못나고 욕된 나라에서 태어나 죽는다는 게,무엇이 아깝고 서럽겠느냐!
내 죽거든 곡(哭)을 하지 마라!! "
자료출처/ 퀵라이더연대
==> 사실은 한우가를 찾다가 임제에 관한 글을 발견하고 옮겨왔는데
윗글 중에 한우와 주고받은 시와 황진이 무덤앞에서 읊은 시가 단연 압권인 것 같습니다.
한우와 주고받은 시조는 고교시절에 암송하면서 그 맛에 흠뻑 빠지기도 했는데
나이 좀 먹고나니 첫머리가 도무지 도무지 생각이 안나는 증상이 나타나서리...
[필독] 중국여행동호회 카페 이용약관 ◁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