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잎 하나로
세상일들은
솟아나는 싹과 같고
세상일들은
지는 나뭇잎과 같으니
그 사이사이 나는
흐르는 물에 피를 섞기도 하고
구름에 발을 얹기도 하며
눈에는 번개 귀에는 바람
몸에는 여자의 몸을 비롯
왼통 다른 몸을 열반처럼 입고
왔다갔다 하는구나
이리저리 멀리멀리
가을 나무에
잎 하나로 매달릴 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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暴風
-1973年 9月 초 폭풍 불던 밤의 紀念(기념)
구름과 땅이 맞붙어
검은 鐵철과 같은 暗黑암흑이
땅의 모가지를 조인다
千億천억 메가톤의 암흑이 공중에서 쏟아져
땅은 숨 끊어졌다
암흑이 땅에서 솟아 하늘을 찌른다
暴風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폭풍의 普遍性(보편성)만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거나
죽은 듯이 떨고 있다
나무들은 쓰러지며 電光전광처럼 맹렬히
몸이 땅에 내팽개쳐지며
땅의 발바닥을 핥는다
휘몰리며 불꽃처럼 타오른다
폭풍은 이미 불이다
사람들은 이미 시달리며
땅의 발바닥을 핥고 있다
우리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땅의 발바닥을 핥고 있다.
시집:고통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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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밝은 밤에
해 질녘 이면 해지는 대로
어두움 모아 선 자리에
별들이 떨어진날
지세운 창가 너머로
나부낀 하늘 녘
바라보고 한참을
유난히 밝은 별빛
그대 닮아서 눈시울 남몰래
별들 부스럼인날
목놓은 하늘 보았지
밤 타는 가슴안고
그대 닮은 강가에서 남몰래
아스란한 하늬결
가지 사이로 서리
녹음진 밤별 철 마다로
무지개 처럼 핀 별 잔치
나부낀 그대 맘
바라보고 한참을
유난히 맑은 그대
포개진 가슴안고서 남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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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아니면 죽음을!
가로수야 그렇지 않으냐
도시 생활이라는 거 말이지
문명의 난민(難民) 아니냐.
아스팔트의 지옥
맹목과 명목(暝目)의 역청*에
허덕이는 오토 피플
우리는 난민이다.
오 지긋지긋한 자동차들,
바퀴벌레들아 그렇지 않으냐,
도시 표면을 다 덮어버린
저 달리고 기고 서 있는 찢어지는 구역질
저 자본의 토사물 속에서 허덕이는
삶이라는 이름의 재난!
그렇지 않으냐 하필이면 도시에 사는 비둘기들아
유독 가스 속을 아장거리며
던져주는 먹이에 정신없는 우리의 동료들아
유황의화력(火力)과 마력(馬力)과 금력(金力)의 불길
그 날름대는 혀의 불타는 마비의 추력으로 우리는 오늘도 생산하고 소비하고 지지고 볶고
자동적으로 이반이고 나 몰라라 사판이며
진짜에서 멀리 진짜에서 멀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힘으로
이런 절규를 힘껏 숨긴다, [가짜 아니면 죽음을!]
*역청 : 천연산의 고체.반고체.액체 또는 기체의 탄화수소
화합물의 총칭. 고체는 아스팔트, 액체는 석유, 기체는 천연가
스로 도로포장, 방부제의 재료로 쓰임.
실린 곳:[문학과 사회]`9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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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기쁨
-봄 숲에서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神殿(신전)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무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즈시 주고 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때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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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느닷없이, 미안합니다
뜻이 있는데 길이 있어서 그럽니다
맘대로 하라시지만
어렵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시지만
길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까 갑니까
가는 게 아닙니까
좋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나는 사랑합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그 대답이 접니다
그래도 우리가 고개 숙이는 만큼의
이 땅의 인력(引力)을
운명으로 사랑합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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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四季
싹이 나올 때는
보는 것마다 신기한 어린애의
눈빛으로도 모자라는
기쁨의 광채, 경이의 폭죽이다가,
연초록 잎사귀의 청춘이
물 불 안 가리듯 이 바람 저 바람에
나부껴
가지에 앉은 새들의
다리들도 간지르다가,
여름 해 아래 짙게 발라 보는
40대 후반의 여자이다가,
벌써 가을인가, 잎 지자
넘치던 여름잠에서 깨어
가을 바람과 함께 깨어
말없는 시간과 함께 깨어
제 속에서 눈 뜨는 나무들
눈 덮인 산의 겨울 겨울 나무여
환히 보이는 가난한 마음이여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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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客(가객)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걸신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시집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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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명함
이 저녁 시간에
거두절미하고
槐江(괴강)에 비친 산그림자도 내
명함이 아닌 건 아니지만,
저 석양-이렇게 가까운 석양!-은
나의 명함이니
나는 그러한 것들을 내밀리.
허나 이 어스럼 때여
얼굴들 지워지고
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
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럼 때야말로 항상
나의 명함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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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이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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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들면 지옥이지. 2
이땅 위를 걸어가는 건
물 위를 걸어가는 일
그러나 기적은 쉽지 않은 일
피 묻은 날개도
미소하는 날개도 없으니
기적은 쉽지 않은 일.
물 위를 걷는 건 어려운 일
공기空氣의 모습으로 걸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
게다가 물귀신들,
물 밑으로 발 끌어내리는,
쥐뿔로 발바닥을 받으며
정사情死를 타진하는
각계各界 물귀신들!
우리가 각자에 대하여
물귀신이라면?
(그런 건 생각하기도 싫으시다면
그건 좋은 징조)
위 아래가 다 무거울수록
그래도 물 위를 가기는 걸어가야지
기적이 쉽지 않지만
공기를 물 먹이는 일도 어려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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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적막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엇다.
말 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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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바람을 일으키며
모든 걸 뒤바꾸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집들은 물렁물렁해지고
티끌은 반짝이며
천지사방 구멍이 숭숭
온갖 것 숨쉬기 좋은
개벽.
돌연 한없는 꽃밭
코를 찌르는 향기
큰 숨결 한바탕
밀려오는게 무엇이냐
막힌 것들을 뚫으며
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으며
무한 변신變身을 춤추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오 詩야 너 아니냐.
시집 : 세상의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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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연으로
더 맛있어 보이는 풀을 들고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꼬신다.
그저 그놈을 만져보고 싶고
그놈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그 살가죽의 촉감, 그 눈을 통해 나는
나의 자연으로 돌아간다.
무슨 충일充溢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
동물들은 그렇게 한없이
나를 끌어당긴다.
저절로 끌려간다
나의 자연으로.
무슨 충일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
시집:한 꽃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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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광인狂人
-한산寒山에게
거지와 광인.
나는 너희가 체현體現하고 있는 저 오묘한
뜻을 알지만 나는 짐짓 너희를 외면한다
왜냐하면 나는
안팎이 같은 너희보다
(너희의 이름은 안팎이 같다는 뜻이거니와)
안팎이 다른 나를 더 사랑하니까
너와 나는 그 동안
은유隱喩 속에서 한몸이었으나
실은 나는 비의秘意인 너희를 해독하는
기쁨에 취해
그런 주정뱅이의 자로 세상을 재어온지라
나는 아마 취중득도醉中得道했는지
인제는 전혀 구별이 안 가느니-
누가 거지고
누가 광인인지
(구걸이든 미친 짓이든
한산寒山이나 프란체스코
덤으로 그 팔촌八寸 그림자들쯤이면
필경 우주의 숨통이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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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걸어가듯이
시간은 흘러
흐르는 시간
쓸쓸하여
마음 안팎을 물들여
가을 바람이 나무를 흔들 듯이
내가 말없이 걸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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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이는 작은 폭풍
잠깬 마루에
새벽 달빛 한줄기
번개 같다, 보이는 세게의 심연
부들부들 떠는 마음의 고요
뿔뿔이 끊어졌던 뿌리를 모은다
내 귀는 크고 또 커져
깃 속에 푸른 바람 품고 잠든 새의
꿈을 듣고 있는 그대의 꿈을
· · · · · ·듣는다
마음에 이는 작은 폭풍
막 태어나고 있는 움직임 ㅡ 영원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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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하늘
새들아
하늘의 化肉
바람의 정령들아,
새들아
보이는 神들
영원한 전설들아
너와 함께 실로
나도 날아오르고
날아오르고 하였으니
오늘 산보하다가 숲길에서
죽어 떨어진 까치를 보았을 때
그게 왜 청천벽력이 아니겠느냐
하늘 무너지고
길은 죽고
나는 수심에 잠겼느니
새들아
세상의 기적들아
<현대문학/19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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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안은 바깥을 그리워하고
바깥은 안을 그리워한다
안팎 곱사등이
안팎 그리움
나를 떠나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남에게 돌아가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이 노릇을 어찌하리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부느니
어찌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느니
이 노릇을 또
어찌하리
시집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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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지호梅芝湖에 가서
水面과 한몸으로
나도 퍼진다
가 없는 마음이
여기 있구나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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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노래
新婦는 이미 죽었거나
아직 오지 않았으니
꿈일랑 그냥 비워두어라 그대여,
고향 없는 人生一場들이
눈송이처럼 빗방울처럼
아득히 휘날려 내리는구나.
거리의 薔薇 속에 불을 묻고
술잔 수 없이 넘쳐 흘러도
영원한 <아직>인 꿈에 홀려
육체와 영혼의 메아리 사이를
그대 아직도 도둑으로 떠도는가.
菩提樹 그늘 같은 눈동자는
언제 그대 눈의 깊은 데서 솟아나리오.
시집:고통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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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祝祭
-편지
계절이 바뀌고 있읍니다. 만일 당신이 生의 機微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이 기미지, 그게 얼마나 큰 것입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
합니다. 당신을 만나면 나는 당신에게 色쓰겠습니다. 色卽是空. 空是.
色空之間 우리 인생. 말이 색이고 말이 공이지 그것의 實物感은 얼마나
기막힌 것입니까. 당신에게 色쓰겠읍니다. 당신에게 空쓰겠읍니다. 알겠
읍니다. 편지란 우리의 感情結社입니다. 비밀통로입니다. 당신에게 편지
를 씁니다.
識者처럼 생긴 불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시민처럼 생긴 눈물 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불덩어리 눈물에 젖고 눈물덩어리 불타
불과 눈물은 서로 스며서 우리나라 사람모양의 피가 되어
캄캄한 밤 공중에 솟아 오른다.
한 시대는 가고 또 한 시대가 오도다, 라는
코러스가 이따금 침묵을 간싸고 있을 뿐이다.
나는 監禁된 말로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금된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감금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나는 감금
될 수 없는 말로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영원히. 나는 祝祭主義者입니다.
그중에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합니다. 합창 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하다>(까뮈)고. 生의 기미를 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녕.
시집:고통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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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도다
詩를 썻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이 보이도다
시집:나는 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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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부질없는 詩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시집:고통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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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노래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것에 미쳐
病을 따라가고 있었고
밤의 살을 만지며
물에 젖어 물에 젖어
물을 따라가고 있었고
눈에 불을 달고 떠돌게 하는
물의 香氣
불을 달고 흐르는
원수인 물의 향기여
시집:고통의祝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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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
재 속의 불씨와도 같이
나는 감격을 비장하고 있느니
길이여 시간이여 살림살이여
點火 없이는 살아 있지 못하는 것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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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하세요
나무들을 열어놓는 새소리
풀잎들을 물들이는
새 소리의 푸른 그림자
내 머리속 유리창을 닦는
심장의 창문을 열어놓는
새소리의 저 푸른 통로
풀이여 푸른빛이여
감격해본지 얼마나 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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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탈 자아니
-成鎭兄께
너도 알거라 만
참 변하지 않는 거 있지
그분의 가는 길의
有情한 바람
일종의 醉氣를.
어느 선술집에서거나
그댁 犬公도 웃으며 좋아하고
하나님도 싱긋 웃고 지나가시고
더 말할꺼 없는
너도 다 아는 일.
또 알거라 만,
너는 보았지
가장 즐거운 醉中의
그분의 쓸쓸한 웃음
내가 들어 본 일이 있는
氣笛소리 같은
그분의 상말씀을.
원수같은 그 情感은
한없이 어디서 오고 있을까
집도 흘러가고 빛도 흘허가게 하는
다 아는 情感은......
만나 보면 늘 旅路
때때로
떠도는 者들을 업어주며 가시는
센티멘탈 자아니
참 변하지 않는
원수같은 그 情感
일종의 醉氣
가장 즐거운 醉中의
그분의 쓸쓸한 웃음을
너도 다 알거라 만.
시집:고통의 祝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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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일까
너를 보면 취한다
피와 기대에 취하고
性的 향기에 그 아지랭이에
취하고, 참 희한한 때도 있느니
세상 걱정이 없다
너는 누구일까
너는 바람을 넣는다
땅과 그 위의 길들에 바람을 넣고
심장과 발바닥에
그게 헤쳐 가는 시간에
바람을 넣는다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제도의 公認으로 무죄를 비는 거야말로 외설이지
관습에 기댄 자기기만이야말로 외설이지)
저 자연을 보렴
저 찰랑대는 防心을 보렴
INNOCENCE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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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건졌지?
무얼 건졌지?
건지긴 뭘,
인생이 한 그릇 국인가,
나는 시금치와 배추와
아욱과 근대 같은 걸 잘 건지는 바이지만,
술 만든 사람들한테 축복 있으라
(나쁜 술 만드는 사람들한테는 물론 저주 있으라)
세상의 물결에 떠 저도
물결이라며 흘러가는 술병을
건지고,
허공 허공 피어나는
술잔들을, 술잔을 낚는 어부처럼
잘 건지는 바이지만,
또 酒色은 가끔 神通이라,
제물에 빠져 연꽃 파는 여자도 건지고
내물에 빠져 물불 허덕이는 나도 건지는 바-
가만있자 브르통이란 사람은
끝없는 始作으로 시간을 건지려 하면서
초현실주의 삼십 년에 여자 셋 건지고
네루다는 여자 여럿, 시 여럿,
세상 모든 걸 건지고,
로르카는 同性 두엇, 피와 죽음
그리고 메아리를 건지고,
정현종은 제 눈 속의 仙女와
스친 여자
(놓친 기차는 모두 낙원으로 갔다)
삼천서른세 명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가 저 들꽃과 화장품과 먼지와 한몸으로
폭풍인 긋, 지평선인 듯
너울거리는 거길 헤매고 있는데,
실로 나무 몇 그루, 새 몇 마리
노래 몇 자락 건지긴 건졌는지-
도망가는 시늉으로 낯술 한잔 하고
끼적거려놓은 걸 다시 읽어보노니,
우리를 건지는 건 예술과 사랑이라,
꿈이여, 태어나기만 하는
만물의 길이여.
시집:1995년도 현대문학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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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도 끝도 없는 시간은
시간의 모습이다
얻는 건 없고
잃는 것 뿐이다
흉악하다거나 야속하달 것도 없이
시간은 슬픔이다
그 심연은 밑도 끝도 없어
밑도 끝도 없이 왜 그러시는지
정말 밑도 끝도 없어
석탄을 캐내고 금을 캐내고
지축(地軸)을 캐내도
무량(無量) 슬픔은
욕망과 더불어
욕망은 밑도 끝도 없이
운명을 온 세상에
꽃도 허공의 눈짓도
실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온 세상에
시간이여, 욕망의 피륙이여
무슨 거짓말도 변신술도
필경 고통의 누더기이니
살아서
다 놓아버린 뒤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여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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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게으름
나, 시간은,
돈과 권력과 기계들이 맞물려
미친 듯이 가속을 해온 한은
실은 게으르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도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면
그건 오히려 게으름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은 잠들고 돈만 깨어 있습니다.
권력욕 로봇들은 만사를 그르칩니다.
자동차를 부지런히 닦았으나
마음을 닦지는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뻔질나게 들어갔지만
제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가 없으니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 버리니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시간은 원래 자연입니다.
내 생리를 너무 왜곡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천천히 꽃 피우고 천천히
나무 자라고 오래 오래 보석 됩니다.
나를 <소비>하지만 마시고
내 느린 솜씨에 찬탄도 좀 보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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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간의 시작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線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나는 바라건대 마음먹은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 · ·
~~~~~~~~~~~~~~~~~~~~~~~~~~~~~~~~~~~~~~~~~~~~~~~~~
가을 원수 같은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拷問하는
우리를 무한無限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 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
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
너에게 살의殺意를 느낀다
가을이여, 원수 같은.
시집:고통의 축제祝祭/민음사/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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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할 수 있다
상상 할 수 있다
추억 하듯이
선잠에서 깨어나 문밖에서서
희뿌연 새벽 공기뚫고
어제의 쓰레기만 뒹구는
그 공간위에
시간이 양각 되어 간다
전설이다
시간이기도 하고
이젠 상상 할 수 있다
추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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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아저씨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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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꽃망울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당신을 통과하면
모든 게 살아나고
춤추고
환하고
웃는다.
터질 듯한 빛-
당신, 더없는 광원(光源)이
빛을 증식한다!
(다시 말하여)
모든 공간은 꽃핀다!
당신을 통해서
모든게 새로 태어난다, 내 사랑.
새롭지 않은 게 있느냐
여명의 자궁이여.
그 빛 속에서는
꿈도 심장도 모두 꽃망울
팽창하는 우주이니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시집: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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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잎
벚꽃잎 내려 덮인 길을
걸어간다-이건 걸어가는 게 아니다
이건 떠가는 것이다
나는 뜬다, 아득한 정신,
이런 , 나는 뜬다,
뜨고 또 뜬다.
꽃잎들,
땅 위에 깔린 하늘,
벌써 땅은 떠 있다
(땅을 띄우는, 오 꽃잎들!)
斌燒寬?
꽃잎은 지고
땅은 떠오른다
지는 꽃잎마다
하늘거리며 떠오른 땅
꿈결인가
꽃잎들......
시집:`9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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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설렁
바람은 저렇게
나뭇잎을
설렁설렁 살려낸다
(누구의 숨결이긴 누구의 숨결,
느끼는 사람의 숨결이지)
바람의 속알은
제가 살려내는
바로 그것이거니와
나 바람 나
길 떠나
바람이요 나뭇잎이요 일렁이는 것들 속을
가네, 설렁설렁
설렁설렁.
시집:`9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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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증이며 샘물인 -J에게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
갈증이며
샘물인
너는 내 속에서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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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깨물었더니
하늘을 깨물었더니
비가 내리더라
비를 깨물었더니
내가 젖더라
시집: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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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깃들어
나무들은
난 대로가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든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어 사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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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아지랭이
내 평생 노래를 한들
저 산에서 생각난 듯이 들리는,
생명바다 깊은 심연을 문득 열어제끼는
꿩 소리 근처에나 갈까.
벌레와 흙과 그늘이
목에 찬 듯한 허스키,
무슨 창법唱法 따위커녕은
그냥 제 생명에 겨운,
도무지 말 같지도 않은
꿩 소리 근처에나 갈까.
만물 속에서 타오르는
저 생명의 아지랭이를
내 노래는 숨 쉬는니
말이여, 바라건대
생명의 아지랭이여.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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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네
갈수록, 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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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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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폐허
1
내 마음에 깃든 이 폐허는
머나먼 조상 물거품보다도 더 전에
벌써 살랑대기 시작하여
지나가는 것과 함께
사라지는 것과 함께
그 기운 더욱더 깊어져왔으니
손짓과 포옹들이여
눈물과 웃음들이여
시간의 바람결이여
2
다만 미의지(美意志)가 어떤 무너진
신전(神殿)에 위엄이 어리게 했듯이
욕망의 폐허여 애틋한 거기
내 노래는 허공을 받치는 기둥들을 세워
한줌의 위엄이라도 감돌게 하였으면......
시집: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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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벙덤벙 웃는다
파도는 가슴에서 일어나
바다로 간다
바다는 허파의 바람기를 다해
덤벙덤벙 웃는다
여기선 몸과 마음이 멀지 않다
서로 의논이 잘 된다
흙의 절정인 물
물의 절정인 공기
물불 가리지 않는 육체
의 가락에
자연의 귀도 법法도 어우러진다
고통의 뺄셈
즐거움의 덧셈
슬픔 없는 낙천이 없어
덤벙덤벙 웃는다
시집:나는 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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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나무 옆에다 느낌표 하나 심어 놓고
꽃 옆에다 느낌표 하나 피워 놓고
새소리 갈피에 느낌표 하나 구르게 하고
여자 옆에 느낌표 하나 벗겨 놓고
슬픔 옆에는 느낌표 하나 울려 놓고
기쁨 옆에는 느낌표 하나 웃겨 놓고
나는 거꾸로 된 느낌표 꼴로
휘적휘적 또 걸어가야지
시집: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문학과지성사/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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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의 말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가 대답하여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물방울도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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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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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향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잎 그림자를
따온다
영원히
푸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
그림자를
따온다
마르지 않는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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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픔이에요
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저쪽 어두운 구석에서
지키고 있었다는 듯이 시간이
귀신과도 같이 시간이
검은 바람결로 움직이며 말한다
'나는 슬픔이에요'
오가는 발소리들
무슨 웅얼거림들
그 시간에 물들어
비치고 되비치며 움직이느니
우리는 때때로
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리.
조용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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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나비떼
두어 건件의 막무가내가 있으니
바람과 꽃가루가
길 떠나는 냄새
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
내 마음의 나비떼, 나비떼
시집: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문학과지성사/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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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녹는다
여름 바닷가
모래 위의 발자국
속에 햇빛 가득,
밤바다 모래 위의
가슴자국
속에 밤바람 가득
파도 소리 숨 소리 가득,
별빛과 눈맞춤
그대와 입맞춤
여름 뜨거워
살이 녹는다
여름 화려해
육체도 화려해
물 향기에 젖어
살이 녹는다.
시집 : 나는 별아저씨/문하과지성사/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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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굽은 곡선
그 굽은 곡선
내 그지없이 사랑하느니
풀 뜯고 있는 소들
풀 뜯고 있는 말들의
그 굽은 곡선!
생명의 모습
그 곡선
평화의 노다지
그 곡선
왜 그렇게 못 견디게
좋을까
그 굽은 곡선!
시집:제40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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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
헤게모니는 꽃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헤게모니는 저 바람과 햇빛이
흐르는 물이
잡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내가 지금 말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가 저 초라한 헤게모니 병을 얘기할 때
당신이 헤제모니를 잡지, 그러지 않았어요?
순간 터진 폭소, 나의 폭소 기억하시죠?)
그런데 잡으면 잡히나요?
잡으면 무슨 먹을 알이 있나요?
헤게모니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편한 숨결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숨을 좀 편히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검은 피, 초라한 영혼들이여
무엇보다도 헤게모니는
저 덧없음이 잡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들의 저 찬란한 덧없음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집 : 세상의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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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디
안길 수 있을까.
비는 어디 있고
나무는 어디 있을까.
그들이 만드는 품은 또
어디 있을까.
시집: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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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시집: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다/세계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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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가
아침에 브람스 자장가를 듣는다.
자장가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장가 없이도 잘 자니까.
자장가는 실은
어른들한테 필요하다.
평화에서 멀리
한마음에서 멀리
구겨지고 찢겨 헤매고 있으니.
자장가의 품이여
인간은 어른이 된 적이 없느니.
시집:현대문학상수상시집/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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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창작 교실
내 소리도 가끔은 쓸만하지만
그 보다 더 좋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를 듣는거 보다는
냅다 한번 뛰어보는게 나을 걸.
뛰다가 넘어져 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 보는 게 훨씬 낫지.
가령 '전망'이란 말, 언뜻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 보다는
나무 위엘 올라가 보란 말야,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
어디 냇물에 가서 산고기 한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딱이는 심장, 따뜻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선생 얼굴보다는
애인과 입을 맞추며
푸른하늘 한번 쳐다보고
행동속에 녹아버리든지
그래, 굴신자재(屈伸自在)의 공기가 되어
푸르름이 되어
교실 창문을 흔들거나
장천(長天)에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든지
하여간 사람의 몰골이되
쓸데없는 사람이 되어라.
장자(莊子)에 막지무용지용(莫知無用之用)이라.
쓸데없는 것의 쓸데있음.
적어도 쓸데없는 투신(投身)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가라.
너 자신이되
내가 모든 사람이니
불가피한 사랑의 시작
불가피한 슬픔의 시작
두루 곤두박질하는 웃음의 시작
그리하여 네가 만져 본
꽃과 피와 나무와 물고기와 참외와 새와 푸른하늘이
네 살에서 피어나고 피에서 헤엄치며
몸은 멍들고 숨결은 날아올라
사랑하는 것과 한몸으로 낳은 푸른하늘로
세상위에 밤낮 퍼져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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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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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데없이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뜻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빛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 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데없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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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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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바닷가 술집에서
내 젊은 친구는
한 달이나 앓은 몸살을 이야기했다.
혼자 앓은 병을 향하여
그 병의 외로움을 향하여
내 미안한 마음은 퍼져나갔다.
일이 고되고 놀이도 고됐을 것이다.
인생살이가 몸살이니
인생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내 앞의 얼굴에는 인제
한결 좋은 빛이 감돌아야 한다.
몸살을 지나 몸은 강해지고
시련을 지나 마음은 굳건해지는 것이니.
詩. 정현종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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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을 기리는 노래
여자들의 권력의 원천인
부엌이여
利他의 샘이여.
사람 살리는 자리 거기이니
밥하는 자리의 공기여.
몸을 드높이는 노동
보이는 세계를 위한 聖壇이니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향기인들
어찌 생선 비린내를 떠나 피어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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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시집:제1회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중앙일보.문예중앙/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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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애인들을 위한 노래
겨드랑이와 제 허리에서 떠오르며
킬킬대는 만월滿月을 보세요
나와 있는 손가락 하나인들
욕망의 흐름이 아닌 것이 없구요
어둠과 열熱이 서로 스며서
깊어지려면 밤은 한없이 깊어질 수 있는
고맙고 고맙고 고마운 밤
그러나 아니라구요? 아냐?
그렇지만 들어보세요
제 허리를 돌며 흐르는
滿月의 킬킬대는 소리를
시집:사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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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交感
교감交感
밤이 자기의 심정心情처럼
켜고 있는 가등街燈
붉고 따뜻한 街燈의 정감情感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街燈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친화親和
시집:사물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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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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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은 슬픔이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은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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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야視野가 어디 있느냐
청계산 능선을 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홀연히
눈앞이 빛 천지다!
진달래꽃 때문이다.
천지에 웃음이 가득,
이런 빛 녈반이 어디 있느냐,
이런 시야視野가 어디 있느냐.
(모든 종교들,이념들,철학들
그것들이 펼쳐 보이는 시야는 어떤 것인가)
이런 시야라면
우리는 한없이 꽃피리니
웃는 공기 웃는 물 웃는 시방十方과 더불어
꽃빛 빛꽃 피리니.
시집<여우구슬을 물고 도망치는 아이들>.작가.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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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나무들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가슴이 그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리지 나무들아 날이면 날마다
첫사랑 두근두근 팽창하는 기운을!
계간<시평 제3호/나는 나를 조율한다,2001,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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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미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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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향수
나는 본다
시집 간 여자들
어른 된 여자들 속에
숨어 있는 처녀
신출귀몰
남의 얼굴엔 듯 지나가는
그리움과도 같은 꽃
열 네 살의 소녀
열 일곱 살 처녀를
시집 간 열 두 살
어른 된 열 일곱
남의 얼굴엔 듯 지나가는
오 열린 향수
그리움과도 같은 꽃이여
시집: 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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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놓고
놓은 줄도 모르게
마음 놓고 있으니
아, 모든 마음이 생기는구나.
지금은
마음 못 놓게 하는 일
마음 못 놓게 하는 자도
다 마음 놓이는구나
사랑도 무슨 미덕도
내꺼라도 안 할 수 있을 때
나는 싸울 수 있으리
내 바깥에서만 피어나는
사랑도 미덕도 만나리
마음 놓고
자꾸 모든 마음이 생긴다면!
시집: 가객歌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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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新生
-비와 술에 젖은 날의 기념紀念
비에 술 탄 듯 술에
비 탄 듯 비가 내린다
자기의 육체肉體로 내리면서 비는
여성女性인 바다에 내리면서 여성이 되는 비는
바다의 모든 가장자리의 항구港口에
불을 켜 놓는다.
헤매는 꿈에, 무의식에 묻어 있는 땀
묻어 있는 깊은 피
죽음 뒤에도 불타거라
모든 사물의 붉은 입술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가장 작은 것들 속에도 들어가고 싶은 치정痴情
들어가고 싶은 공기空氣, 물, 철鐵, 여자......
비에 술 탄듯 비가 내린다
자기의 육체로 내리면서 비는
여성인 바다에 내리면서 여성이 되는 비는
바다의 모든 가장자리의 港口에
불을 켜 놓는다.
시집 : 사물事物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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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별인가
- 시인(詩人)을 위하여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는 반짝인다'고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밤이 되고 모래가 되고
모래의 살에 부는 바람이 될 때까지
자기의 거짓을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지
자기의 거짓이 안 보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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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주고 받음이 한 줄기
바람 같아라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차지 않는 이 마음.
내 마음의 공터에 오셔서
경주를 하시든지
잘 노시든지
잠을 자시든지.....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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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가지의 애로시티즘
겨울나무에 보인다 말도 없이
불꽃모양의 뿌리
헐 벗은 가지의
에로시티즘
그래 천지간에 거듭
나무들은 봄을 낳는다
끙긍거리지도 않고
잎 트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를 내며
낳는다.
항상 외로운 사랑이
사람 모양의 아지랑이로 피는
내 사랑
헐 벗은 가지의 애로시티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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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게
노래는
마음을 발가벗는 것
노래는
나체의 꽃
나체의 풀잎
나체의 숨결
나체의 공간
의 메아리
피, 저 나체
죽음, 저 나체
그 벌거숭이 대답의 갈피를 흐르는
노래, 벌거숭이
武裝도 化粧도 없는 숨결
돌아가야지 내 몸 속으로
돌아가야지 모든 몸 속으로
불꽃이 공기 속에 있듯
그 속에서 타올라야지
마음을 발가벗는
노래여
내 가슴의 새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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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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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窓)
자기를 통해서 모든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자기는 거의 不在에 가깝다.
부재를 통해 모든 있는 것들을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이 넒이 속에 들어오지 않는 거란 없다.
하늘과,
그 품에서 잘 노는 천체들과,
공중에 뿌리내린 새들,
자꾸자꾸 땅들을 새로 낳는 바다와,
땅 위의 가장 낡은 크고 작은 보나파르트들과.....
눈들이 자기를 통해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 외로워하는 이건 한없이 투명하고 넓다.
聖者를 비추는 하느님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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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술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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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버려진
서늘한 정신과 공복의 가슴
참 많은 것들을 품고 싶었는데
사랑이니 희망이니 그런 것들
오래오래 품고 싶었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지 못하는 당신들, 당신들이
우겨 넣은 고기 덩어리와 깡통 맥주
먹다 남긴 생선 부스러기와
썩어 가는 파뿌리
이 허섭쓰레기 같은 나날들을
견딘다는 게 정말 치욕스러웠다.
무언가 품지 않으면 안 되었던
내 生이 용도 폐기되는 날
아무도 모르게 공터에 버려졌다.
벌겋게 녹을 뒤집어쓰고 누워
서서히 빠져 나가는 나의 영혼
아르곤 가스를 보았다.
안녕, 푸른 하늘이여 --
그렇게 조용히 눈감고 싶었는데
구청직원이 달려 나오고
환경단체 감시원이 뛰어나와
쓰레기 종량제를
오존층 파괴를 들먹이며
덜렁거리는 문짝을 걷어찼고
지나가던 똥개 한 마리가
태연스레 일을 보고 갔고
썩어 가는 몸 속, 열린 두개골 속으로
오후 내내 파리만 들끓었다.
사랑이니 희망이니 그런 것들
오래오래 품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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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기다리며
시 안 써지면
그냥 논다
논다는 걱정도 없이
논다
놀이를 완성해야지
무엇보다도 하는 짓을
완성해야지 소나기가
자기를 완성하고
퇴비가 자기를 완성하고
虛飢가 자기를 완성하고
피가 자기를 완성하고
연애가 자기를 완성하고
잡지가 자기를 완성하고
밥이 자기를 완성하고
죽음의 胎 속에
시작하는 번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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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저녁
여름 저녁에 젖으려고
필경 흠뻑 젖으려고
농원 식당 배나무 아래
맥주 한잔 하고 있는데
종업원 아가씨가 저 아래 집 안에서
창 밖을 향해 뭐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
여름 저녁 그 시간 속으로
여름 저녁 그 공간 속으로
쨍―
퍼지는데,
내 가슴 네 가슴
허공의 가슴
싸아―
퍼지는데,
그 소리
안팎이 아득하여
아득한 것들을 쟁쟁
수렴하는데,
생명 만다라, 오
그 목소리의 여름 저녁이여
비치지 않는 게 없는 공[球]이여.
- 현대문학 (19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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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공간의 숨결
때와 공간의 숨결이여
내가 드나드는 공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집과 일터
이 집과 저 집
이 방과 저 방
더 큰 공간에 품겨 있는
품에 안겨 있는 알처럼
꿈꾸며 반짝이는 그 공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꿈꾸므로 반짝이고
품겨 있으므로 꿈꾸는
그 공간들은 그리하여
항상 태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항상 새로 태어나고 있다.
어리고 연하고 해맑은
그 공간들의 胎內에 나는 있고
나와 공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서로 품어 더욱 반짝여
서로가 서로를 낳는 안팎은
가없이 정답다
그 공간들을 드나드는 때를 또한
나는 사랑한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그 모든 때는 太初와 같다.
햇살 속의 먼지와도 같이
반짝이는 그 때의 숨결을
나는 온몸으로 숨쉬며
드나든다. 오호라
시간 속에 秘藏되어 있는 태초를
나는 숨쉬며
드나든다.
모든 때의 알 또한
꿈꾸며 반짝이며
깃을 내밀기 시작한다.
시간이란 그리하여
싹이라는 말과 같다.
시간의 胎가 배고 있는 모든
내일의 꽃의 향기를
(폐허는 역사는 짝이거니와)
그 때들은 꽃피운다.
내가 드나드는 공간들이여
그렇게 움직이는 때들이여
서로 품에 안겨
서로 배고 낳느니
꿈꾸며 반짝이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