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5월에 뉴욕의 후러싱에 무지개의 집이 창설 되었다. 주로 국제결혼에 실패하여, 독립을 하기 어려운 우리 한국 여성들을 위한 쉘터이다. 원인이 있었으니 '송종순' 이란 자매가 '노스캐로라이나' 에서 3살 짜리 아들이 서랍장 위에 있는 TV를 켜려고 올라 가다가, TV가 너머져 아들이 압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저녁일을 나가고, 누나와 함께 방안에 갇혀 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달려온 엄마의 넉두리가 "내가 죽였다" "내가 죽였다" 한국식 탄식을 하니 자기가 죽였다고 했다는 증인들이 나와 25년의 형을 언도받고 6년째 감옥에 있을때, 한인 사회에 알려졌다. 한국의 메스콤에도 알려지고... 여러곳에서 구명운동을 펼쳐 결국 무지개의 집을시작 하면서 K대표 (여자 목사) 가 그의 신병을 인도받고, 2년의 책임 감호로 석방 되었다. 그는 두 미군에게 아이 하나씩을 낳고도 두 아이들을 거느리고 홀로 살다가 그런일을 당했다.
당시 K대표는 무지개 교회(국제결혼 여성들의 교회) 담임 목사였고, 교회에 속한 건물에 송종순은 있었다. 후러싱 사무실엔 내가 주말에 숙직을 했는데, 10년간 있을곳 없어서 떠돌아 다닌 C자매가 거기왔다. 그래서 나와 함께 자는데, 작은 방에 딱 붙어서 잠을 자려니 정신병 약을 먹는 그와 누워있는것이 큰 고문이다.
그후 자매들이 모이면서, 어느 지하실을 얻어 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시카고 교회에 가는 K대표에게 두자매가 린치를 가했다. 코너에 몰라넣고때린 것이다. "너는 우리를 팔아 돈을 받아먹는 나쁜 포주다" 라고 퍼 부으면서... 얼굴에 멍이든채 K대표는 시카고를 다녀왔다.
그후 여러곳의 후원을 얻어 집한채를 샀다. 그때부터 나는 무지개의집의 이사장직을 받고 아주 입주했다. 친정 엄마란 명색으로... 돈은 안받고 오히려 쓰면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일본 여성도 있었다.
넘쳐나는 인원으로 근처에 APT를 하나 얻어서 '민들래네 집' 이라고 이름 붙였다. 주로 매매춘과, 마약과 맛사지 팔러 들이었다. 내가 있는 동안 무지개의 집에 거쳐간 여성들이 백여명은 되는데, 그들의 처지는 밖에 발설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거기에서 내가 주로 한것은, 자매들에게 친정 엄마로서 한가족 이라는 울타리를 치는 일이다. 사연도 들어주고, 때론 야단도 치고... 그러노라면, 늦게 들어온 두 자매에게서 심한 욕을 먹은적도 있다. 쌍시옷을 쓰는 욕이 두가지 있는데, 그 욕을 다 먹었다. 뭐라 할수 없어서 멍 하니 있을 뿐이었다.
원래 무지개 집이라고 이름 지은것은, "내가 무지개를 구름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창세기 9장 13절의 하신 말씀을 의지하여 지었을 것이다. 또한 -에스겔 37장 6절- 말씀도 의지하고...
그들의 대부분은, -동두촌 보산리 기지촌- 출신 들이다. 그들은 '양색시' '양갈보'란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들과 함께 하는동안 정이 많이 들었다. 그들은 아주 순수한 사람들이다. 잘하지 못해서였나 송종순이 나에게 붙여준 이름은 '팥쥐 엄마' 였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들은 나에게 이따금 맛사지도 해주었다. 거의가 맛사지 팔러 였으니... 생색을 내면서 해준다. 자기의 기가 나에게 옮겨와 저는 무척 힘들다고... 어찌 이루 다~ 말할수 있을까...
끝으로 한자매와의 일. 이름은 '이정희' 미군과 세번 결혼 했으나 다 실패. 결국 '뇌혈전' 의 증세로서 거의 반신불수가 되었다. 하루는 화려한 외출로 자매들이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나는 방에 쉬고 있는데, 정희가 그 불편한 몸으로 2층까지 올라와 나에게 같이 가잔다. "같이 식사하러 가요" 나는 너나 먹고 오라 했다. 얼마후 그는 먹고 뒷문에 들어서자 쓰러져 버렸다. 911을 불러 경찰이 왔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함께 가자고 사랑을 표시한 것이다.
그때의 책임자가 나였기에, 며칠간 경찰의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의연 했다. 그리고는 장례식을 잘 치러줬다. 그의 평시 좋아하던 노래가 유연선의 얼굴이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나도 이노래를 좋아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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