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아직 내겐 낯설기만한 단어다. 하지만 난 거리낌 없이 개인적으로 권유하는 이도 없는데 참가 신청서를 써냈다. 여행이라면 워낙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게 잘 놀고 다니는 터인지라 별 생각없이 따라 나선 것이다.
풋내기 신자 주제에 지각까지 하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잠을 설치고 캄캄한 새벽, 5시 45분. 서둘러 성당 앞에 이르렀더니, 이게 왠 일인가? 차도 사람도 안 보인다. 게다가 캄캄한 본당의 건물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출발 장소가 여기가 아닌가? 지난 미사 때 공지사항 전달할 때 분명 6시라고 했었는데...... 이른 새벽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수산나에게 전화를 하고, 수녀원에 전화를 한다. 왈, 6시 40분 집결, 7시 출발이란다. 아이고 이런! 이리하여 나는 오늘 노인네 반열에 들어서고 말았다. ㅠㅠ
이윽고 하늘이 환해지면서 버스가 들어오고 약속된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모여든다. 몇호 버스에 올라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성당에서 마주칠 때마다 다정히 인사해 주는 세레나 자매가 반갑게 인사한다. 언니는 저랑 함께 3호 차란다. 그녀가 고맙다. 나는 용머리 성당에서 기타 구역에 속하는 신자다. 기타 구역을 10구역이라고 한다는 것도 오늘 알았다. 그래서 나는 10구역 신자다. ㅎㅎ
이런 우여곡절 끝에 나는 이제, 성지순례가 아닌 산 좋고 물 좋은 곳, 제천의 배론으로 가볍게 가을을 마중하러 간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봉사자들이 수고하며 나누어준 떡이랑 과자랑 물로 거른 아침을 채우고나니, 잃어버린 1시간의 달콤한 새벽잠을 보충하려는지 내 몸은 자꾸만 잠속으로 잦아든다. 눈꺼풀만 붙이면 이내 잠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배론 성지에 대한 배경지식이 담겨있는 유인물이 돌고, 배론성지에 대한 설명이 있고, 드디어 묵주 기도가 진행된다. 그래, 이제 비로소 내가 가는 길이 유람하는 여행이 아니라 '성지순례'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맞다. 난 지금 천주교 신자로서 성지순례를 가고 있는 것이다.
묵주기도 중에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샘, 저 배론으로 성지순례 가고 있어요.'라고 문자로 송신. 답신이 왔다. "찬미 예수" ㅎㅎ. 그렇다. 지금부터는 천주교 신자의 마음가짐으로 성지순례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도 쏟아지는 잠. 묵주기도도 마치기 전에 스르르 잠이 들었나 보다. 손에든 종이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휴게소의 커피도 소용없다.
비몽사몽 중에 드디어 제천의 배론 성지에 도착했다. 하늘도, 기온도, 자연도 더 없이 좋은 날이다. 말라가는 풀냄새를 가슴 깊숙이 들이 마신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 이렇게 좋은 곳에 올 수 있는 건강을 주신 것에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 감사의 인사를 하느님께 올리다니....... 아~ 나도 이렇게 하느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가 보다.
*배론 성지의 대성당과 소성당의 전경
*성당 입실 전, 본당 김형수 신부님으로부터 배론 성지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 중...
*성당 앞 잔디 광장의 이모저모
*미사를 위해 배 모양의 대성당으로 입실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모였다. 푸른 산에 둘러싸인 푸른 잔디 위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성당은 한 폭의 그림이다. 미사를 위해 대성당으로 들어선다. 내부가 배 모양인 것이 이색적이다.
자료에 의하면 배 모양의 대성당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배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고,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여진천 배론 성지 주임 신부님의 집전으로 미사가 진행 된다. 배론성지는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고,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한 성 요셉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1861년에 선종하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또한 장주기 성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이라 하신다.
미사를 마친 후 점심을 먹는다. 이 좋은 하늘 아래, 숲에 마련된 식탁에 모여 앉아 먹는 밥맛도 꿀맛이다. 식사 후에는 자유롭게 '묵주기도의 길'을 가거나 '십자가의 길'을 가면 된단다. 나는 십자가의 길로 접어든다.
*배 모양의 대성당 내부의 모습
*점심 시간
*묵주기도의 길의 출발점
십자가의 길에 놓인 14처 조각상 앞을 지나며 의식을 치르는 동안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난의 순간들을 상징한다는 것도 알았다.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 앞에 서 보았고, 성 요셉신학교도 둘러 보았고,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렀던 토굴도 들여다 보며, 성인들께서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아름다운 초가을의 정취에도 빠져본다.
혼자인 나를 챙겨 주시는 대모님을 비롯한 몇몇 낯익은 자매님들의 염려 덕분에 이곳저곳 알차게 구경을 하고 나니 어느새 돌아가야 할 시간. 3시다.
*십자가의 길로 접어드는 길목의 이정표
*잘 가꾸어진 배론 성지의 아름다운 정원
*십자가의 길로 오르는 길목
*14처를 도는 길에 있는 성직자의 묘소
*최양업 신부의 묘
*최양업 신부의 조각상 탑신에는 '사향가'가 쓰여 있다.
*성 요셉 성당의 입구
*성 요셉 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당인 배론 신학교
*황사영 토굴과 백서, 순교탑
*순교자들의 집
*순교자들의 집 앞의 팔각정과 대성당,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으로 연결되는 다리
*대성당의 측면 모습
*대성당 뒷면의 모습
*최양업 신부의 조각 공원의 납골당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인생 여정
돌아오는 길에 우리 차 안에서는 오늘 성지 순례에 참여한 소감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이크만 들이대면 오갈이 드는 나이지만, 오늘은 할 말이 있다. " 저는 지난 해 성탄제 때 세례를 받은 풋내기 신자입니다. 아직은 기도문을 소리내어 낭송하거나 '아멘'을 입밖으로 내는 것조차도 어색합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서 여러분들은 성인들과 같은 순교의 경지에 오를 믿음을 말씀하셨지만, 저는 언제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여기에 계신 여러 분들처럼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성지 순례는 제가 하느님 가까이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과 노력들을 쌓아가면서 제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키워가렵니다."
첫댓글 세실리아 자매님!! 구석구석, 조목조목 상세한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애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 열심히 찍긴 했는디..
발길 닿지 못한 곳이 많네요.ㅎㅎ
배론성지에 가지않고도 알 수 있을 많큼 자세하게 사진과 글을 올리셨네요. 소박한 글 또한 좋습니다.
용머리 카페 자주 이용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홍보부장 신재철
그냥, 소중한 경함 글로 남기고 싶었어요.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세실리아!
솔직, 담백한 순례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한땀.. 한땀...한걸음..한걸음... 그렇게 가자구요...
ㅎㅎ.
열정은 부족하나 끈기는 제 특기거든요.
그래요. 한땀 한땀 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