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목 시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유진목 〈신체의 방〉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보았다
한 사람이 가고 여기 움푹 패인 베개가 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요
그러나 여기 한 사람이 오고 반듯한 베개가 있다
저녁에는 일어나 저녁을 보았다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도 없었다
금방 또 저녁이 오고 있었다
〈신체의 방〉(유진목 시집 《연애의 책》, 삼인, 2016)
낯선 시인이 《연애의 책》이라는 매혹적인 시집 한 권을 들고 나타난다. 이 시집은 유진목 시인이 독자와 첫 대면하는 시집이다. 시인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오직 시집 한 권만이 있을 뿐이다. 읽어보니, 시집은 사랑의 미묘하고도 복합적인 감정들, 살이 부벼지는 촉각과 살의 익숙한 냄새들, 사랑의 찰나들이 쌓인 추억들, 이를테면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잠복〉), “우리는 서로를 만져보았다 / 냄새가 났다” “우리는 젖었고 / 점점 거세졌다”(〈동산〉), “우리 이제 뭐 할까 / 한 번 더 할까”(〈동지〉) 등 몸의 사랑, 성애를 암시하는 일들로 풍성하다. 사랑은 마음의 일이면서 동시에 몸을 가진 자가 몸을 매개로 벌이는 일이기도 한 까닭이다. 타자를 갈망함은 타자의 현존인 몸을 갈망함이다. 사랑의 중요한 성분적 요소는 몸의 애달픔, 몸의 헐떡임, 몸의 갈망과 난입인 것이다. 사랑의 안팎을 두루 품고 아우르고 있으니 시집 제목을 ‘연애의 책’이라고 한 까닭이 충분히 납득되는 것이다. 어쩌면 《연애의 책》은 우리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최고의 연애시집일지도 모른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는 베개가 놓여 있다. 아침에는 한 사람이 가고 한가운데가 움푹 파인 베개인데, 저녁에는 한 사람이 오고 반듯한 베개가 놓여 있다. 시인은 이 베개라는 오브제를 통해 시의 화자가 애모하는 “한 사람”이 한 집에서 늘 함께 하는 동거자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 사람”은 가끔 저녁에 와서 자고 아침에 나가는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저녁에 오고 아침에 머리를 뉘었던 자리가 움푹 파인 베개만 남긴 채 떠나는 사람을 기다린다. 이 사랑은 두 사람이 한 집에서 늘 함께하는 사랑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무도 없었다”라는 구절은 그 이면에 사랑하는 자의 부재가 만든 공허와 슬픔을 감추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두고 혼자 있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그랬기에 “혼자서 잘 있어야 한다고 일기에 적었다”(〈혼자 있기 싫어서 잤다〉)라는 문장이 불쑥 튀어나온다. 연애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혼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은 그 혼자 있음이 쓸쓸하고 아프다. 《연애의 책》에는 만났다가 헤어지는 사랑, 한없는 기다림의 사랑, 그래서 늘 갈급하고 애절한 사랑이 펼쳐진다. 이 기다림들에 대한 보상으로 가끔 이루어지는 성애의 갈급함은 두 몸이 타오르게 만드는 불쏘시개이자, 사랑이 뜨거워지도록 풀무질을 해대는 동력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보았다”라는 문장과 “저녁에 일어나 저녁을 보았다”라는 문장 사이에 시간의 경과와 함께 지나간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누군가 베고 잔 베개는 간밤에 사랑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사랑은 나 아닌 타자가 있어야만 가능한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이다. 그런데 저녁에 와서 나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잤던 사람은 아침이면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난 뒤 부재가 만드는 공백과 무아를 홀로 견디며 한없이 기다리는 사람의 외로운 사무침만이 돌올하다. 일방적인 기다림은 기다리는 자의 심신을 소진시킨다. 외로움이 아무리 사무쳐도 시의 화자는 제 감정이 흐트러지는 걸 절제하며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면서 사랑의 풍경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두 사람의 연애가 어떤지 그 사정을 제 3자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 사람은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요”라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 사랑하게 될 거라는 미래 시제의 예언과 당신을 죽일 거라는 이 죽임의 예고는 크게 멀지 않다. 사랑에서 애증은 손바닥의 안팎으로 붙은 감정이다. 사랑의 연료가 곧 증오의 연료이기도 한 까닭이다. 이 사랑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 한 사람은 달아나고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울고 한 사람은 ‘울지 마’라고 달랜다.
어쨌든 한 사랑이 지나갔다. 사랑은 “밥을 먹이고 상을 물리고 나란히 누워 각자 먼 곳으로 갔다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깨어나는 일”이고, 누운 자의 등을 바라보며 “당신도 이제 늙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나 등이 아름답네요”(〈잠복〉)라고 말하는 일이다. 사랑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이다. 이토록 등이 아름다운 당신은 내가 소유하거나 소비할 수 없는 객체다. 사랑하는 자의 아름다움은 내가 움켜쥘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달아난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데 있으면서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가장 멀리에 있다. 그래서 애무와 쾌락은 달아나는 것, 사라지는 것을 움켜쥐려는 헛된 시도다. 즉각적으로 손에 움켜쥘 수 없음으로 그 아름다움은 숭고 그 자체다.
사랑과 그 정념이 지어낸 발화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시집 《연애의 책》 여기저기에 넓게 흩어져 있다. 유진목의 연애시들은 사랑의 시작과 끝을 만드는 우연의 계기들, 사랑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기분들,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인 임신과 출산, 그 모든 경험들을 포괄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구나”(〈벚꽃 여관〉) : 이 사랑은 지독한 지병(持病)이다. 품어 안고 앓을 만큼 앓아야만 떨어지는 것이다. “내게서 당신이 가장 멀리 흐를 때 / 나는 오래 덮은 이불 냄새”(〈접몽〉) : 사랑을 했는데, 당신은 멀리 떠나갔다. 그리고 내게서 가장 먼 곳에 있다. 혼자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 함께 사랑할 때 덮었던 이불 냄새를 맡는다. 지금 내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신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래 덮은 이불에 밴 당신의 냄새뿐이다. “매일 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당신, 이라는 문장〉) : 사랑은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그 “하나의 문장”을 열망한다. 그 열망이 큰 만큼 그 일이 녹록지 않음을 드러낸다.
유진목(1981~ )은 서울 동대문에서 태어났다. 영화를 만들고 시나리오와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신춘문예나 문학지 공모와 같은 기존의 등단 절차를 버리고, 한 출판사에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투고해 시집을 출간하면서 등단을 한 것이 이채롭다. 한때 필리핀의 한 섬에서 1년을 머물면서 시를 썼는데,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 중 그때 쓴 것도 있다고 한다. 시인은 첫 시집을 묶는 데 16년이 걸렸다고 한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단편영화와 뮤직비디오를 찍고, ‘목년사’라는 1인 제작사를 꾸리고 있다. 현재는 제주도 조천읍에서 살며 시를 쓰고 장편영화 데뷔를 위해 시나리오를 쓰며 살고 있다.
*《topclass》2016년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