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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애할 수 없는 이유 OST
내가 김종인에게 설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그 때 그가 내게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설레었던 것뿐이다. 드라마 속에 나왔던 말들에, 내가 마치 그런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그래서 그랬었을 것이다. 전쟁 같던 그 날 이후로 나는 김종인의 연락을 조금 피했던 것도 같다.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무언가 무서웠기 때문일 거다. 가령 뭐.. 내가 그에게 빠질 것 같다든지 감히 상상도 못할 그런 것들. 팀장님이 있으면서 무슨 이런 엄한 상상을 하지, 나는. 기념 파티 이후로 첫 주말이 됐고, 나는 그간 밀렸던 예능 프로그램이나 왕창 보며 널널하고 여유롭게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치만 그 계획은 아침 일찍 울린 핸드폰에 모두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에 더듬거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들어 잠에 덜 깬 목소리로 전활 받았다.
“..여보세요..”
-“잠 덜 깬 목소리 섹시하네.”
“..?”
-“내가 너무 일찍 전화한 건가.”
“헉.”
익숙한 목소리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발신자를 확인했다. ‘까만또라이.’ 라고 떠있는 핸드폰 액정에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 이 사람이 아침부터 왜.. 시발. 방금 목소리 존나 이상했겠다. 서둘러 핸드폰을 손으로 막고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오늘 만나자고.”
“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갑자기 무슨.. 그리고 그걸 당일 아침에 말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왜. 약속 있어?”
“..아뇨..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줄 알고 당일 아침에 전화한 거야.”
시발. 이거 내 욕이지? 입을 앙 물며 턱 끝까지 차오른 욕을 억지로 삼켰다. 아니 근데 진짜 갑자기 무슨 일인데. 난잡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내려 정리하며 핸드폰을 반대쪽 귀에 가져다댔다.
“무슨 일인데 만나자는 건데요?”
-“그냥 보고 싶어서.”
“..네?”
-“왜. 보고 싶어 하면 안 돼?”
대답을 하기 참 애매한 질문이었다. 보고 싶어 해도 된다는 것도 이상하고, 안 된다는 것도 이상한. 사람 참 이상하게 만드는 난감한 질문이다. 내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자 김종인이 다시 입을 연다.
-“오늘 낮에 있던 스케줄이 갑자기 취소가 돼서 시간이 비었는데,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아...”
-“내가 준 원피스 입은 거 보여준다며. 오늘이 좋겠는데.”
김종인의 말에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때는 그저 상황을 모면하겠다고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김종인이 저렇게 잘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김종인의 말에 조금 갈등이 되기 시작했다. 그가 큰맘 먹고 보내준 비싼 원피스도 안 입고 그랬는데, 거기에다가 또 이 약속을 거절하면 나 진짜 나쁜년일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톱배우 김종인을 상대로 내가 뭐라고 약속을 까. 어차피 약속도 없었던 차에, 그냥 나가야겠다. 거기다가 사준다는데 거절할 일은 더더욱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알겠다고 대답을 하자 김종인이 데리러 오겠다고 하는 걸 필사적으로 말렸다. 약속장소에서 보는 걸로 합의를 보고, 김종인이 약속장소와 시간을 카톡으로 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래도 나름 배우라는 사람과의 약속인데, 그에게 쪽 주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는 하고 나가야하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어마어마하게 예쁜 사람들이랑 함께하니까,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예쁨을 만들어야 좀 평범한 수준이겠지 싶었다. 씻고 나와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아이보리 색 상자를 꺼냈다. 다신 꺼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상자를 열고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이런 옷을 보고 나를 떠올렸을 그의 생각에 어쩐지 조금 낯 뜨거워졌다. 내가 이렇게 청순한 사람은 아닌데. 그는 대체 나를 어떤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원피스를 입고 화장도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정성스레 하고 고데기로 머리도 말았다. 이러니까 무슨 데이트 가는 것 같네. 나는 그저 예의를 차리는 것뿐이다. 신중을 기해 머리를 마는 도중에 김종인에게 약속시간과 장소가 적힌 카톡이 왔다. 약속장소까지 가려면 좀 빠듯한 시간이었다. 머리를 말던 걸 대충 마무리하고 가방에 이것저것 간단한 것만 집어넣고 하얀 구두를 신고 집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장소까지 30분 좀 걸릴 것 같으니까 지금 나가면 얼추 맞춰서 갈 수 있겠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서서히 열리는 문에 서둘러 올라타려다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뜻밖의 인물에 멈칫했다.
“어?”
“.....”
“..팀장님. 안녕하세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예상치 못한 팀장님의 등장에 심장이 쿵쾅댔다. 내 질문에 대답은 않고 그의 눈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더니 못미더운 표정으로 다시 내 눈을 쳐다본다. 이렇게 꽤 꾸민 모습으로 아는 사람이랑 마주치는 게 좀 창피한 일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괜히 멋쩍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어디가요?”
“네? 아.. 친구 만나러요.”
“그 옷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옷 같네요.”
“..하하.. 그래요?”
김종인이 준 옷이라고는 절대 말 못해. 괜히 김종인을 만나러 가는 게 들통 날 것 같아 그랬다. 팀장님께 고개를 여러 번 까딱대며 ‘들어가세요.’ 하고 말하며 슬금슬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자연스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팀장님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까지 그 앞에 서서 날 빤히 쳐다보셨다. 등 뒤로 식은땀이 찔끔 흐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팀장님이랑 마주칠 게 뭐람., 진짜 놀랐네.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약속장소로 향하는 동안 자꾸만 여기저기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이 정말 데이트를 나가는 사람 같아 민망해졌다. 그가 말한 약속장소는 대치동에 위치한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이었다. 장소도 존나 선보러 나온 그런 느낌이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잘생긴 서버가 내게 인사를 한다. 비싼 곳이라 서버도 잘생긴 사람을 쓰나.
“예약하셨나요?”
“네. 아.. 저. 김여주라고 말하면 된다고 하던데..”
“아. 김여주씨. 이쪽이요.”
내 이름을 대자 서버가 레스토랑의 조금 안 쪽으로 자릴 안내한다. 아무래도 그의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 안쪽에 있는 곳에 앉은 모양이다. 서버를 따라가다 보니 고급진 문이 보인다. 그냥 안쪽도 아니고 룸인가 보네. 서버가 열어준 문틈으로 김종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벌거벗은 것처럼 민망해졌다. 그가 준 옷을 이렇게 입고 단 둘이 만난다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일일 줄이야. 그의 맞은편에 앉고 나서도 김종인은 말없이 날 가만히 바라만 봤다. 입에는 작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가방을 옆에 있던 의자에 두고 김종인을 쳐다봤다. 계속 말이 없는 그를 보다가 민망해져 그냥 웃었다.
“예쁘다.”
“..네?”
“예쁘다고, 너.”
“아.. 인사치레 감사해요. 김종인씨도 잘생겼어요.”
물론 이건 트루. 내 말에 김종인은 그냥 웃고 만다. 전에 그런 일이 있고난 뒤라 어색할 줄 알았는데, 그와의 식사는 의외로 괜찮았다. 대화의 대부분은 날 놀려대는 김종인과, 그에 넘어간 내가 화를 내는 것이었지만.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는데, 맛이 좋았다. 향이 괜찮다며 흡족해하는 날 보고 김종인이 웃었다.
“네가 파티에 그 옷을 안 입고 와서 다행이다.”
“왜요?”
“다른 사람들도 너 예쁜 거 알 뻔 했잖아.”
“.....”
“나만 알아서 다행이네.”
“.....”
“앞으로도 나만 알고 있을게.”
김종인은 대체 왜 자꾸 내게 예쁘다고 하는 걸까. 그 말 때문에 설레게.
-
여느 직장인들도, 학생들도 느끼겠지만 주말헌터가 있는 것 같다. 그런 게 아니라면 주말이 이렇게 ᄈᆞᆯ리 지나갈 리가 없어. 분명 누군가가 우리의 주말을 훔쳐가는 게 틀림이 없다. 분명 주말동안 쉬었는데도 더 피곤한 것 같았다. 월요일이라 그런가. 눈가에 다크서클을 지우느라 컨실러를 얼마나 덧발랐는지 모른다. 팀장님이 월요일 아침부터 보는 게 내 얼굴인데, 예의없는 얼굴로 마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출근을 하는 동안 팀장님은 별 말이 없으셨다. 평소에도 말이 많이 없으신 분이라 익숙했었지만, 오늘은 공기가 뭔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주말동안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처음엔 주말동안 본 예능프로그램 얘기를 주절주절하다가, 이내 눈치를 보다 입을 다물었다. 상사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땐 공기처럼 있는 게 답이니까. 평소에는 팀장님의 옆에서 걸었었는데, 괜히 눈치가 보이니 그보다 세발자국 뒤 떨어져 걷게 됐다. 팀장님의 뒤를 졸졸졸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인터셉트 당하듯 누군가 내 팔을 확 잡아챈다. 깜짝 놀라 몸을 크게 떨며 고갤 돌려보니, 수정선배였다.
“아. 선배..”
“여주씨 잠깐만.”
오늘따라 다들 무슨 일이지. 사무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수정선배가 내 손을 잡아끌고 조심조심 사무실을 나오셨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비상구 쪽으로 날 이끄신다. 비상구 문 앞에 서서 미어캣처럼 또 주변을 두리번거리시던 수정선배가 몸을 웅크리며 날 쳐다보신다. 나까지도 긴장이 돼 같이 몸이 웅크러 들었다. 무슨 일이시지? 수정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으셨다.
“여주씨, 주말에 대치동에 있는 쎄라비라는 레스토랑에 갔었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세상에. 진짜네.”
“...네?”
뭐가 진짜라는 거고, 수정선배는 내가 주말에 했던 일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지? 어안이 벙벙해 그저 눈만 크게 뜨고 수정선배를 쳐다봤다.
“김종인이 거기에 웬 여자랑 같이 왔다고, 스캔들 이런 건 안 났지만 이 바닥에 소문이 자자해.”
“..세상에...”
“그 날 파티에서 내가 보기엔 여주씨랑 김종인이랑 뭐 있는 것 같았는데, 그런 소문이 나도는 걸 보니까 김종인이 다른 여자를 만난 건가, 아니면 여주씨랑 만난 건가 했었지. 나는. 근데 후자였네.”
“그게.. 왜 소문이..?”
“그 레스토랑에 이쪽 사람들 많이 가는 거 몰라? 뭐 거기 셰프도 스타 셰프라 거기 사람들도 꽤 알테고. 그 사람이 김종인이 여자랑 왔더라. 하면 이 바닥 소문 퍼지는 거 순식간이지.”
수정선배의 말에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시발... 연예인이랑 밥 한번 먹었다고 그게 소문이 나? 그럼 연예인들은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래, 대체. 나라고 소문이 퍼진 것도 아니고, 그저 여자와 함께 왔었다는 소문이 퍼진 건데도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후들대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수정선배의 팔을 붙들었다.
“그게 여주씨인 걸 눈치 챈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조심해 여주씨.”
“네..”
“그나저나 김종인이랑은 진짜 무슨 사이야? 팀장님은?”
“아니.. 그냥 밥 한번 먹은 거예요.. 시간이 빈다고 해서.”
멍한 표정과 목소리로 우물우물 대답하자 수정선배는 더 묻기를 멈추고 ‘그래.’하고 말았다. 그리고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아!’ 하고 작게 소리치며 선배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혹시 팀장님도 아실까요..?”
“팀장님? 당연히 아시겠지. 이 바닥 사람들한테 소문 다 났다니까. 거기다가 이번에 팀장님이 김종인 영화 맡으셔서 더 빨리 아셨겠지, 뭐.”
“아아...”
다리에 힘이 더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팀장님도 분명히 눈치를 채셨을 거다. 그 날 내가 입고 마주쳤던 옷도 김종인이 보내줬던 옷이었던 걸 아셨을 테고, 김종인이 준 옷을 입고 김종인을 만나러 간 걸 팀장님이 아신다.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끔찍했다.
-
빨리 집에 들어가서 마음을 식히고 싶은 이런 날에 회식이 잡혔다. 고대하던 스릴러 영화 쪽에 외주투자가 들어왔다나 뭐라나. 내게 이런 상황이 들이닥친 이 시점에 술이든 뭐든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거기다가 좆같게도, 팀장님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평소 같았으면 어떻게든 팀장님의 옆자리를 사수하려고 난리쳤을 텐데, 오늘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오늘 하루 종일 팀장님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팀장님을 좋아하는 티를 그렇게 내놓고, 김종인과 밥을 먹으러 간 게 창피했고, 그 와중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던 건 더 창피했다. 그래서 아까 조금 늦게 고기집에 들어왔을 때, 팀장님의 옆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고 급하게 다른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찬열씨가 날 부르는 바람에 어영부영 그쪽으로 향했다. 머뭇머뭇 대다가 팀장님의 옆자리에 앉을 동안 날 쳐다보던 팀장님의 그 표정을 잊지 못한다. 기분나빠하시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내가 싫어지신 걸 거야... 혼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회식 내내 말없이 술잔만 만지작댔다. 술을 별로 입에 대고 싶지도 않았다. 우울하니까 술도 안 내키는구나. 분위기가 좀 무르익어가고,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댔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팀장님 옆자리가 이렇게 좌불안석이었던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잠자코 계시던 팀장님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술잔에 소주를 채우시더니, 원샷을 하셨다. ..팀장님이 회식에서 술을..?
“팀장님..”
“....”
“팀장님 방금.. 술 드신 거예요?”
“네.”
“차.. 팀장님 오늘 차 안 가져 오셨어요?”
“가져왔어요.”
“근데 술을 왜..”
“마시고 싶으니까.”
내 질문들에 대답을 하면서도, 팀장님의 목소리는 한없이 딱딱했다. 그리고 팀장님은 곧 또 소주잔을 채우셨고, 자신의 두 번째 잔도 원샷하셨다. 세상에.. 팀장님 지금 뭐하시는.. 또 다시 자신의 술잔을 채우려는 팀장님의 팔을 붙잡았다.
“팀장님 운전.. 안 하세요?”
“대리 부르면 되죠.”
덤덤한 팀장님의 목소리에 그의 팔을 잡았던 손을 스르륵 풀었다. ...그럼 전부터 대리 부르시고 회식 때마다 술 드시지 그러셨어요. 왜 오늘 갑자기 입에도 안 대던 술을?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팀장님이 술을 드신다고 작게 수군대기까지 한다. 혼자 술을 드시는 팀장님을 가만히 쳐다봤다. 뭐라고 말을 걸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내가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다른 테이블에 있는 수정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빛으로 SOS를 쳤지만, 선배도 별 다른 방법을 모르시는 것 같았다. 정말 알 수가 없다. 회식 때는 입에 술도 안 대던 팀장님이 갑자기 왜 이러실까. 내 이런 타는 속도 모르고, 계장님이 팀장님의 옆으로 와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하신다. 팀장님이 회식에서 술을 드시는 걸 처음 봐서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나 뭐라나. 눈치도 없다, 정말. 시간이 더 흘렀고, 팀장님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보니 팀장님이 조금 취하신 것 같은 게 눈에 보였다. 얼굴이 좀 빨개지셨다.
“팀장님.. 좀.. 취하신 것 같은데.”
“안 취했는데요.”
누가 반듯하신 분 아니랄까봐 발음과 목소리는 또렷하다. 팀장님이 좀 집에 가셨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팀장님이 집에 가실 생각을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저쪽 테이블에 있던 수정선배가 큰 목소리로 ‘어머. 여주씨~’하며 이쪽으로 오신다.
“여주씨. 엄청 취한 것 같다. 응?”
“...? 저요? 저 안 취ㅎ,”
“취했지? 어머.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는 것좀 봐. 집에 가야겠네.”
마치 누구 들으라는 냥 크게 말하는 수정선배의 행동에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선배를 쳐다보니, 선배가 날 부축해주는 척 하면서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네가 집에 가고 싶어 해야 팀장님도 갈 거야.’ 하고. 수정선배가 내 가방을 챙겨주며 등을 떠밀었다. 이렇게 했는데 팀장님이 안 나오시면 어떡하지.. 그럼 팀장님은 누가 챙겨? 머릿속으로 팀장님의 걱정을 가득 채운 채 수정선배의 손에 밀려 고기집을 나왔다.
“이러면 진짜 팀장님이 나오세요?”
“그럴 거라니까.”
“안 나오시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기집 문이 열리며 팀장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얼굴은 분명 술에 취해 붉은데, 아까 또렷했던 말투처럼 걸음도 멀쩡하시다. 정말 안 취하신 걸까. 근데 진짜 나오셨네.. 팀장님이 나오자 수정선배가 눈에띄게 부산스러워진다.
“어어. 맞다! 여주씨 팀장님이랑 같은 아파트에 살지? 팀장님 술 드셨으니까, 여주씨가 대리 불러서 사이좋게 가면 되겠다.”
“네..?”
“그럼 여주씨한테 팀장님 맡기고 나는 들어갈게~ 잘 가, 여주씨. 팀장님도요!”
내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수정선배는 고기집 안으로 들어갔고, 팀장님과 나. 둘만 덩그라니 남았다. 팀장님의 눈치를 힐끗대며 보는데, 멀지 않은 팀장님의 차에서 삐빅.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팀장님이 차키를 손에 쥔 채 터벅터벅 자신의 차로 향하신다. 나는 서둘러 팀장님의 앞을 막아섰다.
“팀장님. 운전하시게요?!”
“아니요. 아까 안에서 대리운전 불렀어요. 타고 갈 거면 뒷좌석에 타.”
수정선배.. 팀장님은 제 도움이 필요 없으신 것 같은데요... 멀쩡한 모습으로 뒷좌석에 올라타는 팀장님을 보고, 나도 차를 빙 돌아 반대쪽 문을 열고 팀장님의 옆에 앉았다. 둘이서 말없이 차 안에 앉아있으니, 차 안 가득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취할 것 같다. 이렇게 술냄새가 나는데 안 취하셨다고?
“팀장님. 진짜 안 취하셨어요?”
“몰라.”
취했네, 취했어. 짧게 대답하는 팀장님의 모습에서 워크샵 때의 팀장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곧 대리운전기사가 도착했고, 그의 운전으로 차가 출발했다. 팀장님과 가만히 뒷좌석에 앉아서 오는 내내 팀장님을 힐끔대며 쳐다봤다. 팀장님은 미동도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계셨다. 밖에 뭐가 있나. 얼마 안 돼 차가 익숙한 아파트단지로 들어섰고, 곧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섰다. 주차를 끝낸 대리운전기사가 팀장님께 차키를 건네고 돈을 받고 사라졌다. 그 뒤로도 잠시 가만히 앉아계시던 팀장님이 차에서 먼저 내리셨고, 나도 뒤따라서 내렸다. 근데 팀장님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 가시고 가만히 차 앞에 서서 날 쳐다보신다.
“...? 안 가세요?”
“쭈쭈바 먹자.”
“..예?”
-
아무래도 팀장님의 술버릇은 쭈쭈바 먹기인가. 저번에도 쭈쭈바를 드시고 계셨었는데. 팀장님의 말에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다가 아파트 근처 편의점에서 쭈쭈바 두 개를 사 하나씩 입에 물고 단지 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물론 부끄러우니까 조금 거리를 둔 상태로. 입으로는 열심히 쭈쭈바를 빨면서 고갤 들어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서울 하늘은 공기가 탁해 별이 잘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달은 보이네. 초승달이다. 달을 그저 빤히 바라보다가 무심코 고갤 돌렸는데, 팀장님이 내 쪽을 보고 계셔서 놀랐다. 놀라서 몸을 작게 떠는 날 보고 팀장님이 입을 여신다.
“하얀색이네.”
“네? 뭐가요..?”
“쭈쭈바.”
팀장님의 말에 내 입에 물려져있던 쭈쭈바를 빼고 확인했다. 탱크보이라서 하얀색이죠. 그러는 팀장님은 답지 않게 갈색 빠삐코를 드시고 그러세요. 단 거 안 좋아하신다는 분이 초코맛이라니.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도 빠삐코를 드시고 계셨던 것 같은데. 팀장님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분이다.
“하얀색 좋아해?”
“...싫지는 않죠?”
내 대답에 팀장님이 내 하얀색 블라우스를 보며 ‘옷도 하얀색이네.’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시 눈을 올려 내 눈을 쳐다보신다. 가만히 마주한 팀장님의 눈동자에 괜히 심장이 뛰었다. 우리 둘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불이 괜히 내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난 하얀색이 싫다.”
“.....”
“네가 하얀색 옷을 입고 걜 만나서, 그래서 하얀색이 싫어.”
그의 입에서 나온 ‘걔’ 라는 사람이 누굴 말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게 하얀 옷을 선물해준 사람. 그 하얀 옷을 입고 내가 만난 사람. 김종인. 예상치 못한 팀장님의 말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네가 빨간색 옷을 입고 걜 만나면, 난 빨간색이 싫어질 거고.”
“.....”
“네가 노란색 옷을 입고 걜 만나면, 난 노란색이 싫어질 거야.”
“.....”
“그러다가 온 세상이 싫어지면 어떡하지.”
“.....”
“큰일이잖아.”
“.....”
“그러니까 하지마. 김여주.”
“.....”
“걔 만나지마.”
가로등불 아래로 날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팀장님의 눈이 너무나 또렷했다. 내 머리를 사고를 멈췄으며, 눈을 깜빡이는 법도, 숨을 쉬는 법도 잊었다. 지금 내 심장이 마구 뛰는 게 숨이 차올라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우릴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게 어지럽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팀장님이 지금 하시는 말이 무슨 뜻인지 팀장님은 알까.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 손에 쥐어진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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