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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女眞城李氏旌閭閣記 命圭(一諱壽延)之妻 孺人眞城李氏殉烈後三十四年因道啓臣自上特命旌閭粤四年閣始成噫閭巷間潛悳懿行之闡發之 難類如是也儻非李氏卓異之烈愈久而愈彰者烏能然也按道啓曰英陽縣人李壽延妻李氏年十七之 正月歸壽延甫五日壽延病不起李氏躬執殮附身附棺必誠必信手寫一封書入之所着衣領內柩中而 不使人視也旣受衰晝夜不解侍舅姑側無慽容亦不見有擧顔啓齒時也飮啖朝夕約不過溢米猶手繭 繅以成祖姑若舅姑壽衣已請寧其父母歸十二月朔哭夫殯哀甚卽闔門却食曰夫死之日非不知卽死 同穴而送終之必欲以吾手也爲婦日묘吾惡乎用吾情壽衣之欲出吾機沀也吾又有親父母在往寧爲 與訣也祥月近期至矣斂時所內之書以告期也與死者約而可負耶强之飮輒暗吐衣當頷處皆腐積二 十四日日出時忽開戶遊目者久之傍人怪問之微小曰此吾命盡日天日不可復見且死後魂魄於此乎 棲所以識夫家山川也呼婢溫水來盥濯手足徧訣祖姑若姑曰吾先祖姑死死不瞑目姑主善養姑自愛 臨絶乎其舅曰小笥中有一小紙在吾死可發視也言訖就席而逝兩目如生不瞑者半日祖姑爲手摩而 泣諭之然後乃瞑其舅卽發笥中書血縷縷書屬以從葬也謹據實上聞嗚呼婦人義絶三從殺身而從夫 死者古今幾人而有能從頌就義若李氏者又幾人哉從夫而不遺其所自出已嫁而不忘其親父母死又 不以藥不以刃不以縊而全而歸之若李氏者非特其烈也生夫妻相約以死臨死不相倍者爲士者或難 之而死後一書不以爲無能也而倍之而能踐於一年之久非定計於鮮者能之乎將死而又能先知其死 吁亦異矣又聞李氏於退陶老先生爲族裔而平日喜觀三綱行實烈女傳小學諺解等書噫其素所養可 知而老先生家法之美亦不可誣也其可敬也已今其夫弟命存將以棹楔之日請余文以記之遂就加檃 括以遺之俾過者有以得其實而式焉 强梧赤奮若仲春冷節日晋州姜泰重書
열녀 진성이씨 정려각 기문 명규(수연)의 아내 유인 진성 이씨가 열녀로 목숨을 마친 후 三十四년만에 도백(道伯)의 장계에 『신(臣)이 임금으로부터 정려(旌閭)의 특명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므로 인하여 四년만에 정려각을 비로소 완성했다. 아! 마을에서 은은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펼치고 발휘하여 이와 같이 하기는 어려웠다. 이씨가 훌륭하지 않다면 뛰어난 정렬(貞烈)이 어찌 오래될수록 더욱 빛날 수 있겠는가? 도백의 장계를 살펴보니 이르기를 영양현 사람인 이수연(李壽延)의 아내 이씨(李氏)가 나이 十七세 되는 해 정월에 수연에게 시집와서 五일만에 수연이 잇따른 병으로 죽으니 이씨가 몸소 염(殮)을 하고 시신을 수습하여 관에 넣으니 반드시 정성이고 신의였습니다.
손수 적은 글 한 봉투를 옷깃에 부착하여 관 안에 넣으니 사람들이 보지 못했습니다. 입은 상복을 밤낮으로 벗지 않고 시부모를 곁에서 모시며 슬퍼하는 모습을 짓지 않고 또한 얼굴을 들고 이빨을 드러낼 때도 없었습니다. 조석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쌀뜨물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히려 손수 명주를 짜서 시조모와 시부모의 수의를 마련하고 부모가 편안히 돌아가시라고 청했습니다. 十二월 초하루에 남편의 빈소에서 매우 애절하게 곡을 하고는 곧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남편이 죽는 날 즉시 죽어서 같이 묻히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나 마지막 가는데 반드시 내 손으로 보내고 싶었고, 며느리가 돼서 내가 인정을 쓰는데 모질었던 날은 드물었으며 내 손으로 배를 짜서 수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나는 또한 친정 부모가 계시니 어찌 함께 죽어서 갈 수 있었겠습니까? 소상(小祥) 달이 가까운 기일에 이르렀습니다. 염을 할 때 속에 넣은 글에 기일을 함께 알렸으니 죽은 사람과의 약속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암죽(暗粥)을 마시게 하니 옷에다 토했으며 얼굴이 누렇게 뜨고 악취가 쌓였습니다. 二十四일 해가 뜰 무렵 갑자기 문을 열고 오래도록 두리번거리는데 곁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으니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이제 나의 명이 다한 날이니 하늘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또 『죽은 후에 혼백이 여기에 깃드는 것은 시집의 산천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계집종을 불러서 더운물을 가져오게 하여 손발을 씻고 결별(訣別)하면서 시조모와 시어머니에게 두루 말하기를 『내가 할머님 보다 먼저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어머님은 남편을 착하게 길렀는데 어머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질 때가 임박(臨迫)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시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작은 옷상자 속에 작은 종이 한 장이 있는데 내가 죽거든 펼쳐 보십시오.』라고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 들어 죽으니 두 눈을 생전 같이 감지 못했습니다. 한 나절을 시조모가 손을 문지르며 울먹였습니다. 그런 후에 시아버지가 눈을 감기고 곧 옷상자 속의 글을 펼치니 피가 서리서리 묻은 글에 남편을 따라 묻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삼가 (장계에 있는)사실을 거론했다.
임금이 들으시고 『아! 부인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의리로 자신을 버려서 남편을 따라 죽은 자가 옛날부터 몇 사람이나 되며 따라 갈 수 있어서 이씨(李氏)처럼 의리를 칭송할 자 또한 몇 사람이나 되리오.』하셨다. 남편을 따르라는 (남편의)유언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시집가서 친정 부모를 잊지 않았으며 죽음 또한 약도 아니고 칼날도 아니고 목을 맨 것도 아니고 온전히 돌아갔으니 이씨 같은 사람은 독특한 정열(貞烈)이 아닌가? 부부가 생전에 서로 죽음을 약속하고 죽음에 임하여 서로 배반하지 않는 것은 선비라 해도 어려울 것이고 죽은 후에 한마디 글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키지 않으면 배반하는 것이다. 일 년이나 오래되어도 실천할 작정을 함은 드문 일이 아닐까? 장차 죽으려함에도 또한 먼저 죽음을 알렸으니 아! 역시 특이하다. 또 들으니 이씨(李氏)는 퇴계(退溪-李滉)선생의 후손으로 평소에 삼강행실과 열녀전과 소학언해 등의 글을 즐겨 보았으니 아! 그의 소양(素養)을 알겠으며 노선생(퇴계) 가정의 훌륭한 법도(法度)도 역시 속일 수 없으니 공경할 뿐이다. 이제 그의 시동생 명존(命存)이 정려각을 세우는 날에 나에게 기문을 청하기에 드디어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남겨서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을 본보기로 삼을 수 있게 한다.
정축년(一八一七년) 이월 한식에 진주인 강태중(姜泰重)이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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