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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나침반 17 |
다시 풀어 읽는 문화곤궁文化困窮
우리는 '문화', '문화'하며 그 흐름 속에 살고 있지만,
'문화'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문화의 개념은 워낙 광범위해서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지만,
문화의 결과는 하나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길 위의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인간세계와 구분되는 지상의 생명 있는 모든 그들의 작태作態는
인간이 흉내 낼 수없는 깊은 '정적靜寂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처럼...
<그들에게는 문화가 아니고 본태本態라고 해야 하지만>
이달의 나침반의 화두話頭는,
"‘자연’의 세계를 ‘문화’의 눈으로 산책散策 하자.
‘인간’과 ‘자연’사이의 행간에서 ‘고절孤節한 Life map 문화’를 펼치자.
그리하여 생활에 ‘자연’의 색깔을 입히자"이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미개척지未開拓地는 ‘자신의 내면세계’이다.
여기에는 어느 지하자원에 못지않은 풍부한 자원과 강력한 에너지가 스며있다.
그 내면을 ‘문화’와 ‘자연’으로 연계해, 늘 다른 풍경이고 싶은 우아한 색상色相의 길을 걷자.
자연과 문화는 일상日常이고 마음의 풍요로운 삶이다.
혼돈混沌의 시대를 맞이하여, 문화와 자연에 함축含蓄된 보람을 삶과 공유共有하고,
‘문화훈련’이라는 색다른 ‘지적여행知的旅行’으로 떠나자.
'문화'와 '자연'을 어떤 ‘슬로건’ 쯤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적당히 생각하는 방법을 애시당초 배우지 말아야한다.
업무에는 전문지식이 필요하듯, ‘신명나는 삶’에는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엄청난
자기 훈련의 시스템 장치‘가 요구된다.
‘자연’이나 ‘문화’를 말할 때 화려하고 관념적인 수사修辭나 암호 같은 어휘語彙를 쓴다면
본질이 외곡歪曲 될 우려가 있다.
말하자면 詩人이나 문인, 인기人氣 강사가 흔히 쓰는 ‘감성의 허위虛僞’나 ‘과장誇張’ 또는
‘의인화擬人化’의 비유에 현혹眩惑되지 말아야한다.
계산된 ‘통제기제統制機制 control mechanism’로 ‘자연’과 ‘문화’라는 근본이 다른 의미의 본질을
‘인과론因果論’ 적으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설’에 대한 단상斷想>
나는 어쩌면 나만의 '숲'이 있어야 했다.
세상이 좋다는 것을 '산'에 가고 알았다.
숲이 나를, 내가 숲을 좋아하는 것인지 어느 쪽인지 햇갈린다.
산이 나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아 섭섭하기도하지만 기쁘다.
숲은 나를 길들이려 하지 않아 그저 좋다.
숲이 나에게 싸움을 걸어올때면 ‘슬픈화해’를 하고 싶다.
적당히 산을 걷자는 생각은 천賤한 비단가림에 불과하다.
혼자일때 왜? 그렇게 좋은지, 숲에 물어도 답이 없어 면구하다.
설한雪寒의 구름과 앙상한 가지 사이의 한천寒天으로 일월日月은 간다.
고관孤觀하고 고선孤線한 자연과의 사치奢侈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이 추운 겨울에 버들강아지싹이 벌써 올라와 바람 사이에 떨고 있었다.
‘북극 곰 캠핑’을 하며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 ‘전혜린’의 책을 꼭 품었다.
‘장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 하지 않도록 도와 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내속에는 이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전혜린’의 편지 중에서-
<Entropy>로 운을 뗀다. 무거운 주제일 것 같아 가볍게 넘긴다.
‘엔트로피Entropy’의 세계관을 조명照明하며 ‘거시적 이론巨視的 理論 Grand theory’
형식을 빌려 새로운 가치관의 지평地平을 편다.
<‘자연’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엔트로피Entropy’라는
자연과학의 물리현상의 개념을 알아보자>
<‘Grand theory’'란, 자기 전문분야에만 갇히지 않고, 사회, 문화, 예술, 그리고 자연현상까지도
폭넓게 연관시켜 논하는 이론전개이다>
이렇게 비유해보자. 이제까지는 의사가 건강을 위한 영양營養문제를 말 할 때,
칼슘성분이나 철분이 혈액에 얼마 들어 있고, 하며 분석적으로 세세하게 수치로 설명 했는데···
물론 ‘생화학적生化學的 분석’은 필수적이겠지만, 앞으로는 여기에 더하여,
어떻게 하면 사람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총체적 과제에 초점을 맞춰 ‘인간애적인’ 입장에서
치유의 설명을 해야할 것이다.
영국 세계영양학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힐링healing’치료는, ‘호올whole’ 이라는 말과 근원이 동일하다고 한다.
<엔트로피>란 무엇인가?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이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지만 ‘엔트로피’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에너지는 늘 일정하지만 그 에너지를 동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아황산가스’등 공해물질이 생긴다. 한번 바뀐 에너지는 다시는 환원되지 못하는 화학반응이며,
이것을 ‘엔트로피’라고 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사용 가능한 자원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구의 온난화와 여러 공해를 유발하고 종말에는 지구마저 사라진다는 관점이다.
<나무 조각 하나, 석탄 한 덩어리를 태워도 그 타고남은 재와 연기는 화학반응을 일으킨 물질로
지구상에 남아 ‘엔트로피’ 값을 증대시킨다. 즉, 공해상태는 지구상에 영원히 남는다>
여기에서 '물리학'을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 이론에 스민 ‘인류의 성찰省察’을 말한다. 문화로 자연을 본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엔트로피’를 통하여 세계가 당면한 문제점을 경고한다.
기술혁신에 의해 인류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 선진산업사회의 모순은 무엇인가? 를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세계에서의 에너지 제도,
경제·정치·과학·교육·종교·군사·가치관 등의 변화된 모습을 엮어 보이고 있다.
‘에딩턴Arthur Eddington’은 ‘엔트로피 법칙’을 가리켜 자연계의 최고법칙이라면서,
‘엔트로피’를 ‘시간의 화살(Time arrow)’이라고 불렀다.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은 붕괴되지 않을 유일한 물리법칙으로서
‘고전열역학古典熱力學’에 감명 받았다고 술회했다.
‘엔트로피’가 인간의 삶과 관련되는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제러미 리프킨’의 책 <엔트로피>, <공감의 시대>, <유러피언 드림>, <소유의 종말> 등을 통해
역사·철학·심리학·정신분석학·과학기술 등 모든 영역을 망라해 ‘공감과 엔트로피’의 개념을 서술했다.
새로운 우주관宇宙觀을 토대로 교양과 지식·감성을 종행무진으로 넘나들며 감성적 세계관을 희망하고
행동하게하는 동기를 갖게 한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문제가 말끔하게 정리되는 <자연+문화> 드림이다.
이제, 인간생활과 밀접한 시사점示唆点을 생각해보자.
인간역사를 ‘공감共感’ 이라는 잣대로 보면 ‘공감’은 문명사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이라는 것은 감정이입感情移入 이라는 독일의 미학美學에서 사용하는 ‘Einfuhlung’에서 유래됐다.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공감적Empathic과 공감하다Empathize같은 파생어들이 심리학자들에 의해 ‘감정Empathy’의 용어로 자라 잡았다. 인간의 ‘감정·감성’이 사람사이의 ‘소통疏通문화’를 만들어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설명이다.
사람사이에 ‘공감’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없으면 인간사회는 성립 될 수도 없고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사람들과 정서적 교감交感을 통해 살아간다.
기쁜 일이건 나쁜 일이건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야하고 그 속에서 일하며 놀며 고통도 나누며 사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의 ‘공감’ 본능 이라고 한다.
인종·국경·사상·이념을 초월해 서로 이해관계로 얽혀 거대한 ‘도시형’ 인간사회를 만들어 산다.
‘영어’는 세계의 언어가 되었고 삶의 양식도 서로 부대끼며, 전 세계를 경제활동과 여가를 위해 누비며 즐긴다.
서로가 지니고 있는 색다른 풍경에 끌려 인간 홍수에 휩싸인다.
<한 예로 요즘 ‘설’을 맞이하여 한국에서는 3천 200만명이, 중국은 무려 3억5천만 명이 난리를 펴며 대이동을 하고 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유행이며 거품이다.
‘화천’에서 얼음에 구멍을 뚫고 동면하는 고기를 잡아 올리는 ‘산천어 축제현장'을 뉴스를 통해 영상을 보았다.
그 좁은 산촌의 개울에 1만5천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발 디딜 틈도 없는 북새통을 이루며,
파르르 떠는 물고기를 날걸로 씹어 먹는 장면과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그것을 ‘문화’라고 자랑하는
인터뷰 장면은 영화 ‘몬도가네’를 뺨치는 슬프고 혼란스러운 그 자체였다.
기관장이 보란듯이 대중앞에 나와,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이 열기 넘치는 축제에··· 라고 운운하는
그 알 수없는 외침에···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우리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인가?
포퓰리즘과 저속문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부 어른들의 ‘문화곤궁’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느낌은
나만의 절박한 기우인 것일까?
<지금 여기에 다루는 주제가 ‘문화 곤궁’ 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공감’의 역사가 곧 인류의 ‘문명’이다. 그런데 이 문명이 ‘엔트로피’를 극대화시켜
막대한 공해를 유발하는 역기능逆機能의 문명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이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공감의 확장⇨커뮤니케이션의 확대⇨문명의 발전+산업·경제·상업 번창⇨저질문화 범람⇨엔트로피 증대⇨
인류의 위기⇨지구멸망>의 도식이 성립된다.
문명의 본질은 ‘엔트로피’ 증가이다.
전 세계 인구는 40년마다 갑절로 늘어난다.
개인이 1년에 사용하는 에너지의 양이 증가 일로에 있고,
고에너지를 쓰는 기능이 높을수록 문화인이라는 인식이 팽배澎湃 하다.
밥 한 공기·라면 한 봉지·버스표 한 장·화장품·옷·샤워 물·휴지 등 모든 물질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모임 +이동’에는 100%의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는 것을 성찰省察 하여야 할 것이다.
에너지를 아끼는 것 이상으로 ‘내면세계의 부자로 사는 문화 실천’이 더 아름다운 삶을 찾는 생태적
자기경영自己經營 이다.
'산'을 걷고' 캠핑'을 삶으로 여기는 자의 눈에 비친 도시인들의 풍요로운 소비를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문화 곤궁文化困窮’ 이야기로 넘어가자.
풍요로운 시대를 맞아 더 빈곤貧困해져가는 것은 무엇인가?
먹을 것을 걱정하는 절대적 빈곤과의 싸움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우리를 멍들게 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워킹푸어Working poor가 아닌 ‘문화곤궁文化困窮’을 말한다.
빈곤한 철학과 과잉된 욕망의 만남이 바로 ‘문화곤궁文化困窮’이다.
문화로써의 빈곤이 ‘문화곤궁文化困窮’이다.
<일러두기: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文化困窮’이지, ‘빈곤문화貧困文化’가 아니다.
혼돈을 막기 위해 ‘貧困文化’의 정의를 Lewis 저서 ‘산체스네 아이들’에서 인용한다.
‘빈곤문화’란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인 주류문화와는 다른 독립된 하위문화로 그 특성은
☆ 빈곤에 적응된 낮은 열망수준과 태도와 가치의 세대간의 전승으로 나타난다>
물질만능의 번창이 그대로 정신적인 행복으로 이어졌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문화의 다면성·다양성, 상업에 예속된 문화, 문화의 오락성 등을 포괄包括 적으로 바라보며, 모든게 잘 갖추어진 세상에서 왜 소외되고 만족하지 못하고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요즘 도처에서 제각각의 욕구와 불만으로 요동치는 정경을 보며···
‘문화’는 더욱 ‘문화’다워야 한다는 것을 통감痛感 한다.
결국 문화는 개개인의 생활 속에 ‘예술의 원전原典 정신’이 우선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선결 요건이다.
이런 기초 없이는 백방의 처방이 허사이고 한낮 허망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문화적인 삶이란 것은 ‘미적 경지의 아름다움’의 상위 개념을 내면화하고 ‘자유로운 생각’과
‘사랑의 기쁨’을 향한 ‘숭고한 선택’이어야 한다.
‘자연’을 알아야하는 것은 원초적原初的 의무이고, 문화를 응용 할용 하는 수준이 삶의 질차이다.
문화는 삶에의 유혹이자, 커다란 자극이다.
문화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누구나 예술가 이다.
남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신이 문화로 감동 받아야 한다.
문화는 편리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을 내안에 반기고, 문화의 궁극적 목적은 즐거움이다.
동물은 DNA에 내장된 본능적 행위 외의 다른 짓은 못하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행위는 우주만큼이나 크다.
인간은 문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과 사회와 만물을 만난다.
문화는 ‘학습’되는 것이지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라는 것은 ‘사회적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지 ‘유전인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은 유전인자를 통해 유전되지만, 그 본성은 문화프로그램에 의해 수정된다.
‘문화는 인간에게 주입된 정신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간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는 같은 자연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통합된 세계사조世界思潮를 인식하자.
자연력自然力 들의 정교한 순환일치를 새삼 신비하게 여기며,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삶을 탈피하여
자연에 귀의歸依 하는 열린 의식이 문화의 빈곤을 메워 줄 것이다.
세계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세계가 있다는 역발상逆發想을 해보자.
각 개인이 세계의 정신과 혼을 가지고···
세계의 의미를 우리 안에 간직할 때 ‘우리사이’라는 세계는 가능하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우리사이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흔히 ‘하나뿐인 지구’라고들 한다.
지구는 하나뿐이다.
그러나, 세계는 여럿일 수 있다.
지구는 만들 수 없지만, 세계는 사람의 문명으로 만들수 있다.
그래서 세계는 인류문명, 문화의 역사과정의 개념이다.
인간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모여서 살지만 그것이 개인적으로 합당하지 않을 때에는
개인의 문화영역을 만들어 살 수도 있다.
지구와 세계는 등식이 아니다.
또다시 문화를 생각한다.
문화는 느낄 수 있고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문화는 자연과 대립되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그 활동의 산물이며,
삶의 표현인 동시에 개선改善이다.
자연은 우주宇宙를 포함해 제 스스로 존재 하는 모든 사물事物이며,
그 산물産物이다. 삶은 자연과 문화사이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자연에 속해있으면서 자연의 연관聯關 밖에 나와서 그와 대면하는 주관이다.
인간은 이 주관을 갖고 자연을 위협하려한다.
우리는 삶속에서 ‘문화’와 ‘자연’을 그저 풍경風景 쯤으로 보고 지나치기 쉽다.
삶을 “존재로부터 생성生成From being to becoming”으로 창출創出 하는 커다란 새 흐름으로 이끌어야한다.
‘몰랐던 것’은 ‘알 때 까지만’ 최초이다.
세상은 사실과 진실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디든 거짓과 진실을 밝혀줄 잣대는 숨겨져 있다.
그 잣대는 <자연 +인문 +과학> 계를 융합融合 하여 지적 욕구를 자극刺戟해,
새 변화의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가치를 찾는 일이기도하다.
‘성공학’·‘행복론’·‘뻔한 컨설팅’·‘얄팍한 비법’ 등을 멀리하고,
숲에서 자유로운 바람을 쐬며 숲에서 ‘길’을 묻자.
모든 길은 희망의 또 다른 여로旅路이다.
현실에 탄탄한 뿌리를 두고 ‘내면세계’와 자연과의 친밀한 유대감의 합일合一을 이루자.
우리의 삶이 혼미昏迷 한 것은, 우리의 대상이나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체계’와 ‘대처방법’에 기인한다.
당나라 때의 임제臨濟의 어록에 수록된 ‘거주의 자유去住自由’를 보자.
<만약 진정한 견해를 얻는다면, 태어남과 죽음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거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若得眞正見解 生死不染 ‘去住自由’>
여기에서 ‘거주’란 집에서 산다는 뜻의 ‘거주居住’가 아니고,
사는 곳에 구애를 받지 않음을 가리키는 거주去住의 은유이다.
근대 개념으로 풀이 한다면 ‘Out door의 삶’··· ‘초로草露 문화의 인생’을 말한다.
자연은 제 스스로 자체 조절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자체 조절 및 조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생각은 깊게, 생활은 검소하게think globally, act locally 삶을 이루자는 것이다.
과소비를 억제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은 땅에서 얻어진다는 건강한 생각을 늘 간직하자.
'소박한 삶의 풍요로움'과 생태계에 대한 배려를 잊지말고, 맑고 간결한 삶을 추구하자.
새 집, 새 차, 새 옷, 새 머리모양, 새 명품···
끝없이 돈을 쫓고··· 곧 피폐해지고 마는 삶에 실증을 내고 또 헤매는···
현대인들의 무의미한 생활패턴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남과 구별 짓는 용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머릿속에서만 행복이 맴돌게 하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것 중 당장 집어치워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행동만이 모든 걸 바꿔놓을 수 있다!!
당장, 웬만한 약속은 집어치우고 <남과만이 아닌 자기와의 약속을 포함해>
‘됐다’, 이제 자신의 삶에 빠져들고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야생의 에너지가 그대로 뼈에 스미는 ‘자기 없음’이 되어야 한다.
내면의 갈등과 고뇌를 ‘지혜와 자연’으로 잠재워, 자아Ego를 넘어 ‘진아眞我’ 와
‘대아大我’의 참 자기모습인 ‘아상我相’과 마주하는 치열한 지성知性의 문화에
매몰되어 보자.
2012년 1월...
이 엄동설한에도 벌써 피어오른
바람에 떨고 있는 버들강아지 몽우리를 보며···
쉽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다시 다짐하는···
-깐돌이 박상설-
첫댓글 선생님괴 만난 이야기 중심으로 작은 에세이를 마무리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에필로그에 당근
이책을 선생님 영전에 바친다고 썼습니다
선생님의 나침판 너무나 명료하고 냉철한 글귀에
다시 한번 두 손 모음니다
부지런히 따라가야 할것 같습니다
이 엄동설한에도 벌써 피어오른
바람에 떨고 있는 버들강아지 몽우리를 보며...
'쉽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다시 다짐하셨다는
깐돌사부님의 글귀가 가슴을 칩니다....
괜히, 부끄러워 지기도 합니다....
에세이 원고를 먼저 다 읽어보아서 그런가
제 마음이 더 설레이고 두근거리는 이유는 뭘까요?
빨리 책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도 깐돌사부님께서 제일 기뻐하실것 같아요. ㅎ
은방울꽃 누님의 더 '멋진 활약' 기대하고 계속 응원할께요.
아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