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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85회)
무당의 예언 탓인가 사고를 당한 김삿갓.
봄이 되었지만 김삿갓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낮에는 친구들 조차 농사일로 모두 들녘에 나가 있으니 허탈감에 빠져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황은 조금 달라져
모임방에 나가 음담패설을 듣고 여담을 나누다가,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수안댁과 정을 나누는 것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쩌면 이런 재미라도 붙였기에 천동 마을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던 장마철인 어느날, 그날은 김삿갓이 모임방에 모인 친구들에게 술 한 턱을 냈다.
김삿갓이 술을 사게 된 까닭은 마누라 수안댁의 충고 때문이었다.
"남의 술을 한 번 대접받거든 당신은 두 번씩 술을 사드리세요.
남의 술을 얻어 먹기만 하는 사내처럼 쩨쩨한 인간은 없으니까요.
돈은 뒀다 뭤에 쓰게요. 우리 집 돈은 모두다 당신 소유인걸요."
그러면서 수안댁은 삿갓이 모임방으로 나가기 전에 넉넉한 돈을 쥐어 주었다.
그날은 초저녁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밤이 깊어서도 계속되었다.
모임방 친구들과 나눈 술에 거나해진 김삿갓은 도롱이를 쓰고 조조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오늘은 술 맛도 좋았지만, 참새와 땡굴이의 음담에는 정말 놀랐는걸.
너무 웃다보니 배가 다 아프구먼." 그러자 조조가 말을 받아,
"아닌게 아니라 그 친구들 걸쭉한 농담에 배꼽이 빠질 뻔했네." 한다.
두 사람은 오늘, 모임방에서 오가던 음담패설의 여운을 생각하며 서로 껄껄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렇게 소리내어 웃던 김삿갓이 흙탕길을 천방지축 걸어가다 일순간 발을 잘못 디뎌 두 길이 넘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앗! 이 사람아!"
조조는 무심중에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벼랑 아래로 떨어진 김삿갓은 "아이쿠!" 소리만 한 번 질렀을 뿐,
인기척이 없었다.
조조는 부랴부랴 벼랑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김삿갓이 풀밭에 빨래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이 사람아! 어디를 다쳤기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가?"
김삿갓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사지를 조금씩 움직거리며
"인명지 재천이라, 죽지는 않았으니 걱정말게!"하며 위급한 상황임에도 익살을 부렸다.
그러자 조조는 무심중에 웃음을 터트리며 "예끼 이 친구야!
어디를 다쳤는가 말일쎄, 자네가 죽은 줄 알고 걱정하는 줄 아는가?"
"그러게, 죽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가 없는 걸 어떡하나.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네."
"뭐? 다리가 부러져 ... 그게 정말인가?"
조조는 기겁하여 김삿갓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워낙 캄캄한 밤이라서 어디를 어떻게 잡아 일으켜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사람아! 내가 업어 갈 테니 어서 등에 업히게!"
조조는 김삿갓을 부축해 등에 업고 벼랑을 기어 오르다시피 올라왔다.
그리고 김삿갓을 업은채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집으로 데려갔다.
"이거, 미안허이..."
조조의 등에 업힌 김삿갓이 말하자.
"미안은 그만두고 많이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수안댁! 수안댁! 어서 방 문을 열어요!"
삿갓의 집에 다달은 조조는 황급한 어조로 수안댁을 불렀다.
그러자 다급한 소리에 놀란 수안댁이 벼락같이 뛰쳐 나왔는데
비에 쫄딱 젖은 두 사람의 모습도 기가막혔지만 남편인 김삿갓이 조조의 등에 업혀 축 늘어져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머니 ... 이게 무슨 날벼락이에요!"
수안댁은 울음 섞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이 사고가 나, 다 죽게 된 몸으로 친구인 조조에게 업혀 온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놀란 마누라를 보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보게!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네.
재혼을 하면 남편이 또 죽게 된다는 무당의 예언은 멀쩡한 거짓말 이었어!"
그러자 수안댁은 남편이 죽지 않은 것을 알게되자
한편으로 뛸뜻이 기뻐하며,
"어디를 어떻게 다치셨어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그러면서 황급히 방 문을 열어 젖혔다.
조조의 등에서 방바닥으로 눕혀진 김삿갓의 몰골은 형편 없었다.
그러자 김삿갓의 험한 몰골을 씻길 물과, 비에 젓은 몸을 닦아줄 천을 찾아 황급히 밖으로 나가던 수안댁은 조조에게 부탁을 한다.
"수고스럽지만 약국에 가셔서 의원님을 빨리 좀 모셔와 주세요. 어서요!"
조조는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약국으로 향했고, 수안댁은 대야에 물을 받아와 김삿갓을 씻기고 있었다.
"어디를 다치셨어요?'
"응, 다리가 부러진 것 같네, 꼼짝할 수가 없구먼"
수안댁이 비에 젖은 남편의 저고리는 벗겼지만
바지는 발이 부러진 김삿갓이 아파 하므로 벗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곧 가위를 가져와 김삿갓이 아파하는 다리쪽 바지단을 갈라 내고 보니,
발목위에서 무릅사이 정강이 뼈가 어그러져 보였다.
수안댁이 그 모습을 보고, 공포감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도,
마치 자신의 팔자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조조가 의원 영감을 모시고 왔다.
의원이 진찰을 하는 동안에도 수안댁은 공포감을 억제할 수 없었던지,
"의원 어른! 이 양반 설마 돌아가시지는 않겠지요?"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사람이 죽기가 그렇게도 쉬운 줄 아시오 ?
다리뼈가 좀 부러졌으니 서너 달은 누워 있어야 겠지만
그러고 나면 완전히 회복 될 테니 아무 걱정 말아요!"
의원은 부러진 곳을 버드나무로 동여매 준 뒤에 산골을 듬뿍 내 주며 말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산골이나 열심히 먹어요.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 정도의 횡액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 인데, 무슨 걱정인가!"
늙은 의원이 태평스럽게 위로해 주는 바람에,
김삿갓과 조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수안댁만은 아직도 미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마음을 놓을 수 없는지, 계속 불안해 하였다.
모두가 가버리고 나자 김삿갓은 상처가 새삼스럽게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누라가 걱정할 것이 안쓰러워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한잠 잘테니, 당신도 아무 걱정 말고 눈을 붙여요."
"제 걱정은 마시고 당신이나 어서 주무세요.
상처가 아파서 어디 주무실 수나 있겠어요?"
"걱정 말아요.
당신이 잠을 자야 나도 마음놓고 잘 수 있을게 아닌가."
"알았어요. 그럼 저도 잘 테니 당신도 주무세요."하며 김삿갓에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도 불을 끄고 옆에 눕는다.
생각해 보면 둘은 오다가다 아무렇게나 만난 부부간이다.
처녀 총각으로 만난 처지가 아니기에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부부였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남녀간이라도 밤마다 살을 섞으며 지내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정이 두터워졌다.
그래서 김삿갓은 자신 때문에 수안댁을 불안하게 된 게 무척 미안했다.
(수안댁 ! 당신에게 이런 걱정을 끼치게 되어 정말 미안하네. 그러나 나는 결코 죽지 않을 테니 그 점만은 안심하게. 그러니까 당신은 "또다시 과부가 된다"는 잘못된 망상만은 깨끗이 씻어 버리게 ! ...)
방랑시인 김삿갓 (86회)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삿갓이 눈을 떠보니 날은 어느새 환히 밝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수안댁이 보이지 않았다.
"응 ... ?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김삿갓은 방안을 두루 살폈으나 마누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짓문 너머 윗방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아,
문틈으로 윗방을 옅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하였다.
수안댁이 바람벽에 산신 탱화를 걸어 놓고 그 앞에 단정히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반위에 정안수와 촛불까지 밣혀 놓고 두 손을 허공에 벌렸다가 합장하며
큰 절을 올리며 입으로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괴상한 광경을 보는 순간, 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해 왔다.
물어 보나 마나 마누라는 지금 "남편을 죽지 않게 해달라"고
무언가에게 축원을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내가 죽을까 봐 저렇게도 겁이 나는 것일까 ?)
다리가 부러진 정도로 죽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저렇게까지 겁을 내는 것은
"재혼을 하면 남편이 죽는다"고 말한 무당의 예언이 강박 관념이 되어,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성싶었다.
(사람이 미신에 빠지면 저렇게도 어리석게 되는 것일까?)
김삿갓은 그런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제 흉악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뭐라고 말하면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기도 하여, 못 본것 처럼 넘길수 밖에 없었다.
수안댁은 축원을 연방 올려대며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는데,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 보니 그 가운데는 이런 말도 있었다.
"기사생己巳生 김삿갓은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오니,
전지전능하신 천제天帝께서는 특별히 헤아리시와,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죄 많은 이 사람을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 몸은 본디 청상살을 타고난 죄 많은 몸이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분수를 넘어 선량한 남자를 유혹한 것은
오로지 이 몸의 죄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제님께서는 이 몸을 처벌 하시고,
김삿갓으로 하여금 환생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김삿갓은 그와 같은 주문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 왔다.
(혹시 마누라가 정신이 돌아 버린 것은 아닌가?)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소중하다고 한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겠나?
그럼에도 수안댁은 지금 "남편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을 올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김삿갓은 가슴이 메어져 오는 고뇌감을 느꼈다.
(저 여인과는 오다가다 만난 부부이건만, 이렇게 까지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무당이 함부로 지껄인 허튼수작이 수안댁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도 크게 파급된 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리고 수안댁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뿌리 깊이 자라온 망상을 일조일석에 불식시켜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한 일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그렇다! 이런 일이란 시급히 바로잡으려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쉬운 법이니,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고쳐 주기로 하자!)
김삿갓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만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수안댁은 오랫동안 축원을 올리다가 시치미를 떼고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어떻세요? 간밤에는 상처가 아프셔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죠?"
김삿갓은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간간이 아프기는 했지만 잠을 자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당신은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는 길인가?"
"옆집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침을 곧 지어 올테니 그동안 한잠 더 주무시도록 하세요."
수안댁은 제단을 모아 놓고 축원한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은밀한 일이 알려지면 효과가 없어지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김삿갓 역시 그 일에는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며,
"하룻밤 자고 나니까, 아프기가 훨씬 덜 하군.
이대로 가면 의원이 말대로 석달 안에 틀림없이 완쾌할 거야"
일부러 수안댁이 듣기 좋아할 소리만 했다.
그러나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수안댁은 김삿갓이 매일 잠든 때마다
비밀리에 정안수를 떠 놓고 축원을 올리는 일은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매일 남편이 잠든 오밤중부터 축원을 올리다가
새벽닭이 울면 부랴부랴 아랫방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이러기를 두어 달 지나는 동안에 김삿갓의 부러진 다리는 거의 붙어,
스스로 변소 출입을 비롯해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느날 마누라에게 이런 농담을 하였다.
"그동안 자네는 내가 죽을까 봐 무척 겁을 냈던 모양인데,
이것 보라구, 내가 죽기는 왜 죽는가?"
김삿갓이 입빠른 농담을 지껄인 것은
마누라를 기쁘게 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말한다.
"에그머니나! 천제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런 방정맞은 말씀을 하고 계세요? 상처가 아무리 좋아졌기로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천제께서 노여움을 타시면 무슨 앙화를 받게 될지 모르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금 그 말씀은 당장 취소하세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우리나라 풍속으로는 병자가 자기 입으로 "병이 좋아졌다"는 말은 하지 않도록 되어있다.
왜냐하면 천제께서 그 말을 듣고 노여움을 타 병을 또다시 나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신이나 다름없는 민속 신앙인지 모른다.
김삿갓도 그런 풍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뱉어 놓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왕 말이 난 김에 마누라의 미신적인 망상을 조금이라도 시정해 주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미신에 불과한 것이야.
한번 좋아진 상처가 그런 말을 했다고 다시 나빠질 리는 없지 않은가.
당신은 무당의 말을 과신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은 게 좋아요.
세상에 무당처럼 무식한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무당의 허튼수작을 신주처럼 떠 받드냐 말이야."
김삿갓은 마누라의 생각을 고쳐 주려고 무당을 의식적으로 깎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남편을 나무라는데,
"당신은 어쩌려고 오늘따라 그런 무서운 말씀만 함부로 하세요.
무당처럼 무식한 사람이 없다지만, 무당은 학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유식하더라도 천제께서 신神을 내려 주지 않으시면
무당이 절대로 될 수 없어요.
무당은 학식이 없더라도 전지전능하신 천제로 부터 특별히 점지 받고
인간세계와 하늘을 연결하는 "하느님의 사자使者"라는 걸 아셔야 해요.
당신은 그런 것도 모르시면서 어쩌면 무당을 그렇게도 업신여기세요."
김삿갓은 무심중에 반발심이 솟구쳐 올라 대번에 마누라를 공박했다.
"뭐? 무당이 하느님의 사자라고...?
자네가 무당을 그렇게까지 신봉하고 있는 줄 정말 몰랐는걸.
무당은 어디까지나 혹세무민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무당 따위가 무슨 빌어먹을 "하느님의 사자"란 말인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깨끗이 청산해 버려요."
김삿갓은 정면으로 공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고 참아 오던 불만이 무심중에 폭발한 것이었다.
이런 저변에는 마누라인 수안댁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질책으로 무서운 결과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수안댁은 책망을 받고 나자 두려움으로 몸을 벌벌 떨더니
"다 당신은 천 천제님한테 무슨 앙화를 못 받으셔서 그 그런 저주의 말씀을 하 함부로...."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원인 불명의 공포감에 질려 졸도를 한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 왜 이러는가?"
방랑시인 김삿갓 (87회)
금반삭립 봉천첩 金盤削立 峰千疊
(소반위에 나란이 빚어 놓은 송편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히 겹쳐 있는것 같다.)
김삿갓은 혼비백산하여 마누라를 잡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수안댁은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여보게 정신 차리라구!" 얼굴에 냉수를 끼얹고 인정人定을 비벼주고 하여 한바탕 소란을 떤 뒤에 수안댁은 간신히 숨을 돌렸다.
"여보게! 정신이 좀 드는가? 자네, 별안간 왜 이러는가?"
수안댁은 남편의 얼굴을 얼빠진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 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한다.
"몸도 불편하신 당신에게 이런 꼴을 보여 드려 미안해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요, 잠시 그대로 누워서 안정을 취하구려."
김삿갓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당을 저주한 말이 당신 마음에 거슬렸던 모양이지?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테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아요."
사실 이제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누라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줄 말은 안 할 결심이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당신만 빨리 회복해 주세요."
"나만 회복해 가지고 되는가, 자네도 건강해야지."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수안댁은 일어나 앉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연방 외어대고 있었다.
이렇게 졸도 사건이 있은 날 부터 수안댁의 얼굴에는 날마다 수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밤중이면 제단 앞에 정안수를 떠놓고,
남편의 환생을 비는 축원만은 어느 하루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삿갓은 "제발 그런 짓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누라 혼절을 겪어 본 바가 있으므로 무슨 오해를 사게 될지 몰라, 숫제 수안댁의 일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김삿갓도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가까운 곳을 다닐 수 있을 만큼 상처가 좋아졌다.
그러나 수안댁의 공포 증세만은 여전히 가실줄을 몰랐다.
그런 마누라의 안색을 눈여겨 본 김삿갓은 마누라의 마음도 추스릴겸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지난 여름은 여러가지로 우울한 계절이었어,
이제 계절도 바뀌었으니 이번 가을에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행복이 찾아 올거야." 마누라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위로의 말이었다.
"고마워요. 그래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은 "고맙다"고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보면
수안댁은 아직도 정체 불명의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피해망상으로 보기 보다는 "신의 저주를 두려워 하는 공포감"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만 같았다.
김삿갓은 마누라의 정신상태를 바로 잡아 줄 방도를 여러가지로 궁리해 보다가 어느날
"참, 수안 고을에 당신 큰아버지께서 살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 가을에는 우리 둘이 큰아버지를 한번 찾아가 뵙기로 하면 어떨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누라의 얼굴에는 불현듯 싱싱한 기쁨의 빛이 역력하였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우리 둘이 함께 찾아가면 큰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래요, 조만간 수안에 한번 다녀오도록 합시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김삿갓의 상처는 거의 완쾌되어 갔다.
그러나 수안댁은 오밤중만 되면 남편 대신에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을 하루도 빠트리는 날이 없었다.
그런 마음의 고민을 안고 지내는 탓인지 수안댁의 얼굴은 점점 수척해갔다.
김삿갓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날그날을 살얼음판을 밟으며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날은 마누라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주려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추석 명절이 가까워 오니, 우리 송편을 한번 만들어 먹을까?"
송편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누라의 불안한 심리를 다른 일로 상쇄시켜 보려는 심산이었다.
마누라는 그 말을 듣더니 과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어머! 송편이 잡수시고 싶으세요?"
"응, 당신이 만들어 주는 송편을 먹고 싶네."
"가만계세요. 당신이 자시고 싶다는데 오늘 당장 만들어 드리지요."
수안댁은 전에 없이 밝은 얼굴로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다가 반죽을 하여 송편을 빚기 시작하는데 그 솜씨는 보기만 해도 신기할 만큼 능숙하였다.
적당히 반죽한 재료를 조금 떼어내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달달 굴리니 새알처럼 동그란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의 네 손가락으로 새알의 한복판을 오목하게 파헤치고
그 속에 고물을 넣은 뒤에 가장자리를 마주 잡아 오므리니 조그만 조가비 같은 송편이 되었다.
이렇게 빚은 것을 쟁반위에 하나씩 나란히 세워 놓으니
얼른 보기에는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늘어서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도 재주 좋은 여인이 어째서 허망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측은한 생각이 든 김삿갓이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게!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양을 보니, 나는 시흥이 샘 솟네그려.
내가 "송편"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수 읊어 보기로 할까?"
생각조차 못 했던 말을 듣고 수안댁은 어리둥절하는 표정이었다.
"송편을 빚는 모양을 시로 읊어 보신다고요?"
"그래, 시로 읊어 볼 테야."
"그런 시도 지을 수 있어요 ? "
"그럼."
"어디 한 번 써보여 주세요."
수안댁은 김삿갓이 유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 까지 능숙하게 지을 줄은 몰랐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남편을 바라 보았다.
지필묵을 꺼낸 김삿갓,
그 자리에서 "송편"이라는 제목으로 한시, 한 수를 써갈겼다.
수리회회 성조란 手裡廻廻 成鳥卵
지두개개 합방순 指頭個個 合蚌脣
금반삭립 봉천첩 金盤削立 峰千疊
옥저현등 월반륜 玉著懸登 月半輪
물론 그 시는 한문이었기에 수안댁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나는 한문을 몰라 알아볼 수가 없네요."
"이 시는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습을 글로 표현한 것이라네.
내가 설명을 할 테니 잘 들어 보라구."
김삿갓은 첫째 줄과 둘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수리회회 성조란 手裡廻廻廻 成鳥卵이란
쌀 반죽을 손바닥으로 달달 굴리니까 새알처럼 동글하게 된다'는 소리요."
"'지두개개 합방순 指頭個個 合蚌脣은
송편 속에 고물을 넣고 가장자리를 하나하나 조가비 처럼 오므린다'는 소리라네."
"어머나. 당신은 어쩌면 솜씨가 이렇게도 오묘하세요.
반죽한 것을 손바닥으로 새알처럼 동글하게 만든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송편의 가장자리를 조가비처럼 오므려 만든다는 말은 기막히게 좋네요."
"그 다음을 마저 설명해 줄 테니까, 끝까지 들어 보라구."하며
이번에는 셋째 구절과 넷째 구절을 가르키며 설명을 계속 하였다."
"'금반삭립 봉천첩 金盤削立 峰千疊
빚어 놓은 송편을 쟁반위에 차례로 세워 놓으니까,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이 겹쳐 있는것 같다'는 소리요.
"'옥저현등 월반륜 玉著顯登 月半輪은
빚어 놓은 송편을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 드니까
마치 하나 하나의 송편이 반달처럼 보인다'는 말이야.
어때? 이만하면 잘 지었지?"
"나는 시를 모르기는 하지만, 정말 재미있게 지으셨어요.
당신이 글을 잘 아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시를 지으시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수안댁은 모든 시름을 잊은 듯이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 (88회)
김삿갓에게 닥친 불행.
그로부터 며칠 지난 비 오는 날 밤, 김삿갓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변을 보려고 요강을 찾았다.
"여보게! 요강이 어디 있지?"
수안댁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마, 내 정신 좀 봐!
요강을 우물가에 그냥 내버려두었네요. 지금 곧 가져올께요."
김삿갓은 비가 오는데 심부름을 시키기가 안되 보여서
"자네는 그냥 앉아 있게. 내가 나갔다 옴세."
"아니에요.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남들이 뭐라 하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내가 갔다 올테니까 당신은 그냥 있어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억지로 못 나오게 막았다.
마누라의 수고와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가 요강을 가져오려고 한 것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다
칠흙 같은 어둠으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어둠 속에 더듬거리며 우물가에 도착한 김삿갓은
우물가를 한 바퀴 돈 뒤에야 요강을 찾았다.
그리고 어둠속에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돌 층계에서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러졌다.
"쨍그렁!"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요강이 허공에 떳다가 돌 위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냈다.
"에구머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
방안에 있던 마누라가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달려 나왔다.
"저런! 아무것도 아니야, 돌에 미끄러져 잠시 넘어졌군.
걱정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요."
김삿갓이 넘어져 비에 젖은 옷을 툴툴 털고 마누라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보니 김삿갓은 무릅이 까져서 피가 한줄기 흘러 내리고 있었다.
수안댁은 피를 보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어마! 저 피!"
"괜챦아요. 이 정도를 가지고...."
"아니예요. 당신은 지금 신의 천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은 무슨 재주로도 피할 수 없는 천벌이에요."
"이 사람아! 어두운 밤중에 한 번쯤 넘어진 것을 가지고
당신은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하룻 밤 자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테니 어서 잠이나 자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가까스로 달래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마누라는 어둠 속에서도 공포감으로 떨고 있었다.
김삿갓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잠도 자지 못하고
마누라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깐 동안 눈을 붙였다 다시 떠보니 옆에 누워 있던 마누라가 없지 않은가!
"여보게! 어디 갔는가?"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를 또 한 번 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까지 부슬부슬 오던 비가 지금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게다가 천둥이 울고, 번갯불이 번쩍이며 뇌성 벽력까지 귀청이 따갑도록 때려대고 있었다.
김삿갓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천방지축 마누라를 찾아 헤맸다.
"여보게 ! 나를 두고 어딜 갔는가?"
섬뜩한 예감까지 압도했던 김삿갓의 소리는 차라리 피를 토할 것 같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애간장이 타도록 불러도 마누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물가에 가 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개천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개천가에도 없었다.
"여보게! 자네가 나를 두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김삿갓은 미친 사람처럼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산으로 들로 허겁지겁 찾아 헤매다가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산신당山神堂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허연 것이 공중에 대롤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엉? 혹시 저게 바로...?"
김삿갓은 눈 앞이 아찔해 오는 전율감을 느끼며 부리나케 달려와 보니,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마누라가 아닌가!
김삿갓은 부리나케 밧줄을 끊고 마누라를 집으로 업고 돌아오며 울부짖었다.
"이 못난 사람아 ! 이게 무슨 짓인가 ! "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방바닥에 눞혀놓고
인공 호흡도 해보고 손과 발을 주물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마누라의 사지백태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누라는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이 대신 죽어 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못난 사람아! 죽기는 왜 죽어?
나를 살린다고 자네가 대신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부등켜안고, 무당처럼 푸념을 하며 울부짖었다.
"자네가 청상살을 타고났다면 내가 죽어야 할 일인데
어째서 자네가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애간장을 녹여내는 넋두리를 한없이 계속했다.
새벽부터 곡소리가 들려 오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너무도 처참한 현실이 놀라워 한동안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숨가뿐 침묵이 잠시 계속된 뒤에 대동계장 제제가 입을 열어 물었다.
"여보게, 그만 울고 진정하게. 어쩌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김삿갓은 울음을 멈추고 그간의 자초지종을 대강 말해 준 뒤에
"마누라는 나를 대신해 죽었으니 세상에 이런 비통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며 울부짖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안댁이 이런 식으로 죽은 것은 어쩌면 그녀의 팔자인지도 모를 걸세."
"팔자 .... ?
나와 결혼만 하지만 않았다면 죽을 일은 없었을 것 아니겠나!"
"그러고 보면 수안댁은 전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남편 대신에 자기가 죽지 못한 것을 무척 한탄스러워 했거든.
그러니 수안댁은 남편을 기피하는 직성을 타고난 여자였는지도 모를거야."
"그렇다면 수안댁을 죽게한 죄인은 나였다는 말이 되지 않은가?"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점점 확고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제제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자네 식으로 따지자면 수안댁을 죽인 죄인은 자네가 아니고 우리들이었을 걸세.
왜냐하면 두 사람을 강제로 결혼시킨 사람은 우리들이었으니까 말이야.
이러나 저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려 버리고,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러자 동석했던 늙은이 하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참견을 했다.
"옳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었거니와 산 사람은 어디까지난 살아야 하거든.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이제는 그만 고정하고 장사 치를 의논들이나 하라구."
살아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한 지리인지도 모른다.
늙은이는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듣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방랑시인 김삿갓 (89회)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감춰진 비밀.
"요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실상인즉 수안댁은 3대째 내려오는 무당의 딸이었다네.
수안댁이 하필이면 산신당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 할머니가 모두 산신령을 추앙하며 모셨던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수안댁이 3대 무당의 딸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제제도, 김삿갓도 놀랐다.
모두가 처음 들어 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조조가 놀라면서 노인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내가 죽은 사람에 대해 왜 거짓말을 하겠나?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려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틀림없이 할머니도 어머니도 무당이었다네."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 내심 크게 한탄하였다.
(아, 그래서 그 사람이 무당에 대해 각별한 숭앙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게다가 그 무당의 말이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씀이었으니,
어찌 각별히 받들지 않았으랴!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이 철썩같이 의존하고 있었던 무당의 예언을 혹세무민으로 몰아 세우지 않았던가! 아! 진작에 이런 사실을 알았던들....
이제는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해 줄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나저러나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든 누구의 딸이었든 간에 마누라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김삿갓으로서는 그녀를 장사 지내 줄 의무가 있었다.
수안댁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이 도와 주어 장사는 어였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장사를 잘 치러 주었다고 마누라를 잃은 슬픔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삿갓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파 마누라를 땅속에 묻으며,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망인에게 들려 주었다.
"여보게 마누라! 나를 두고 죽다니, 자네는 너무도 무심하네 그려.
부부가 되려면 삼생지연三生之緣이 있어야 한다는데
나만 남기고 자네는 죽었으니 우리 두 사람에게는 본시부터 삼생지연이 없었더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의 인연은 없었는지 몰라도
이승에서는 잠시나마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 왔으니, 금생지연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삼생지연이 없으면서도 이승에서나마 부부 관계로 살아온 우리들의 만남은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가?
자네는 진실로 마음이 곱고 인정이 많은 여인이었네.
자고로 부침浮沈은 천고의 상사常事고,
꽃이 필 때면 풍우가 많고, 인생에는 이별이 다반사이거늘,
오늘날 자네와의 별리에는 가슴이 너무도 아프이.
때마침 가을인지라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의 슬픔만은 참을 수 있어도
당신이 마당가에 심어 놓은 국화꽃을 이제는 누구와 더불어 즐기라는 말인가? 그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네그려.
당신의 얼굴은 모란꽃처럼 아름다웠고,
또 웃음은 꽃이 피어나는 듯이 화평하였고,
그대의 목소리는 옥쟁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아름다웠나니,
이제와서 눈물을 흘려 본들 지난날의 즐거움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두 손 모아 자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비노니
희노애락이 없는 극락 세계에서 부디 편히 쉬어 주기를 바랄 뿐이네."
김삿갓의 고별사가 얼마나 애절했던지, 조문객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수안댁이 저승에서 저 소리를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조문객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누라 없는 집안은 무덤처럼 쓸쓸했다.
김삿갓은 마누라가 죽은 뒤로는 방안엔 들어가기도 싫어
날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로 보내고 있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마누라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줄 것만 같아서였다.
사람은 이미 갔건만 그녀가 가꾸어 놓은 국화꽃은 아직도 싱싱하게 피고 있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
이렇게 마음이 쓸쓸하다 보니 어느 하나 쓸쓸해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김삿갓은 뜰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옛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을 풀을 쓸쓸하게 바라보려니
슬픈 바람이 천 리를 불어온다.
슬프다 가을 바람에 낙엽만 휘날리고
메마른 버들가지엔 부엉새만 살고있네
오늘도 그대 생각으로 눈물만 자꾸 흐르는데
국화꽃은 해마다 피어도 그 누가 알아 줄 것인가]
김삿갓은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그러나 길을 떠나기에 앞서,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수안댁의 재산 정리 문제였다.
사후에 알고 보니, 수안댁은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살던 집을 비롯하여 밭은 3천여 평, 임야는 1만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재물들은 응당 남편에게 귀속될 재산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남편의 권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이 남기고 간 그 어떤 재물도 자신이 차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상조계원을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나는 마누라가 죽은 것을 계기로 천동 마을을 떠나 갈 생각이라네.
수안댁이 남겨 놓은 재산이 적지 않은데 자네들은 그 재산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 것 같은가?"
계원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어리둥절하였다.
"이 사람아 ! 마누라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 마을을 떠날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힘을 모아서 새장가를 들여 줄 테니, 행여 떠날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야."
김삿갓이 계원들과 함께 유산 문제를 상의하고 있을 때, 계장인 제제는 무슨 이유인지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자네가 우리 마을을 떠나려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네.
그러나 우리들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가?"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한 해 겨울만 지내고 떠나갈 예정이었어.
자네들의 권고에 못 이겨 마누라를 얻는 바람에 이태 동안이나 더 살아왔는걸.
나는 본디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팔자를 타고난 놈이라는 것을 자네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의 결심은 확고부동 하였다. 그러자 제제가 조용히 말한다.
"그럼 이렇게 하세.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데도 돈은 필요할 게 아닌가?
수안댁이 남긴 유산은 모두 자네의 것이니까, 집이랑 밭이랑 산이랑 모두 팔아 가지고 떠나게."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럴 생각은 없네.
수안댁의 유산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재산이지 내 것은 아니거든."
"수안댁은 자네 마누라가 아닌가?"
"나는 사람하고 결혼했을 뿐이지 돈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나는 횡재를 바라는 놈도 아니고 올 때에도 빈손으로 왔으니까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겠나?
수안댁의 유산은 자네가 적당히 처분해 주었으면 좋겠네."
"이 사람아!
남의 재산을 내가 어떻게 처분한단 말인가?"
김삿갓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힘차게 들며 말했다.
"자네가 독단으로 처분하기 어렵거든 내가 말하는 대로 처분해 주기 바라네.
지금 자네들이 쓰고 있는 "모임방"은 너무 협소해, 따라서 수안댁과 내가 살았던 집을 마을의 공청公廳으로 쓰도록 하고,
3천 평짜리 밭은 계원들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거기서 나오는 소득은 마을의 공동 재정으로 쓰도록 하고, 또 1만여 평의 산은 공동으로 조림造林을 한다면 좋을걸세."
유산의 처리 방법을 그렇게도 소상하게 말해 주는 바람에
계원들은 더 할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김삿갓은 기어이
전과 다름없는 죽장망해로 천동 마을을 떠났다.
마을 친구들은 멀리까지 배웅을 나오며 약간의 전별금도 모아주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친구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몇 푼만 받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주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방랑생활을 하기로 돈 없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는가?"
김삿갓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안댁의 경우를 보게나. 인생이란 공수래空手來공수거空手去하는 것이야.
나는 이미 돈 한푼 없이 40여 년 동안이나 살아온 놈일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