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으로 피난해 온지 일주일이 되었다
처음엔 닭울음 소리도 들리고 개짖는 소
리도 소울음 소리도 들렸건만 완전히 적막산성이다
벌써 다 잡아 먹었단 말인가?
날씨는 엄동설한에 먹을것도 없고 땔 것
도 없으며 보급로 마져 끊겨 있으니 희망
도 없고 깊은 절망 뿐이다
인조는 날씨도 춥고 방도 추워 이불속이 좋은데 신하들은 아침 문안드리는것이 충성
인양 눈구더기를 해치고 기를 쓰고 아침문안을 오지 말래도 빠지지 않고 찾아온다
군신간에 기껏 논한다는 것이 초가 지붕
을 벗겨 배고픈 군사용 말먹이로 쓸것인가 추위 에 떨고 있는 백성을 위해 불쏘시개로 쓸 것인가 다툼 뿐이다
성을 지키기 위해서 부슬비 추적추적 내
리는 겨울날 밥도 못 먹은 병사에게 가마
니 하나 주고 보초를 서라하니 동상에 걸
려 적이 가까히 와서 건드려도 겁에 질려
눈만 껌벅껌벅한다
어느 백성은 굶주려 꺼져가는 부모 봉양
을 위해 갓난 아기를 삶아서 목숨을 연명
케 했으며 나무 뿌리를 캐기 위해 언 땅을
손이 해어지도록 팠답니다
쓸데없는 영웅심에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끝까지 싸울것을 주장하고 그래도 나이먹은 영상 최명길은 항복을 설득하고 풍천등화처럼 흔들렸으니
결국 최명길이 금은보화를 싸가지고 청
나라 진지로 찾아가 청태종 홍타아치와
적장 용골대 마골대를 만나 청나라를 섬
기고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고 맹세했답니다
처음에는 인조 임금이 평복을 입고 관을
메고 오라 했는데 다시 금은보화를 싸가
지고 가서 관을 메는 것만은 면케해 주십
사 통사정을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인질 30만을 주는데 합의 했답니다
결국 삼전도(현 송파구 삼전로)에 가서
높게 쌓인곳에 앉아 있는 홍타아치 앞에
크게 세번 큰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
리는 의식(삼궤구복)을 하고 용서를 빌
었답니다
30만 인질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갈 때
거기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아내도 며
느리도 딸도 친구도 있으니 온 나라가 슬
픔이고 마중나와 북으로 가는 길은 작별을 아쉬워하는 이들의 피눈물이요 통곡의 장이었답니다 삼학사도 개 끌리듯 끌려가 갖은
핍박과 고문을 당한후 처형 당했다 합니다
심양으로 끌려간 젊은 남자는 노예가 되
고 노인들은 경로효친 사상이 강한 자식
들 때문에 거래의 대상이 되고 여자들은
오랑캐(청나라 이전엔 오랑캐라 불렀고
세종 임금시절 김종서가 많이 도와줌)의
노리개가 되어 갖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
으며 농락의 대상으로 입었던 옷이 지금
의 몸빼라 하니 아이러니합니다
그 후로 심양으로 끌려간 인질들이 봉림
대군(훗날 효종)이 석방되어 환국할 때 같이 와 다른 사람들은 큰 문제 없었는데 여자들은 사대부 집에서도 자기딸인데도 거부하여 죄없이 끌려 갔다 돌아왔는데 화냥년(본래 還鄕女)이라 부르며 받아주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온 기쁨에 가슴 설래였는데 보고 싶픈 엄마 아빠 형제 자매 들이 외면해 버리니 목매달아 자살한 사람이 부지기수 였답니다
그리하여 인조 임금은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은 4대강에 가서 몸을 씻어
라 그리하면 허물이 지워진 것으로 인정하며 몸을 씻었는데도 받아주지 않으면 왕명으로 다스리겠다하여 문제를 잠재웠다 합니다
오호 통제라! 남한산성을 찾는이들은
구경하고 놀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역사
의식을 갖고 이곳이 어떤곳인지 알고 남
한산성에 대하여 쓴 책이 많으니 한번 읽
아 보셨으면 합니다 역사를 바로 보지 못 하고 왜곡하고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답니다